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논증 V/제11장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제11장 · 17 / 34

채색된 여백과 비방향적 광도

빈 곳과 밝음

논증 V · 풍토는 색·선·여백·빛으로 형식화된다

2011년의 〈제주 바다〉에서 화면의 거의 전부는 형상 없이 칠한 옅은 노란색이다. 1983년의 〈열대의 태양〉에는 해가 그려져 있는데도 그림자가 없다. 하나는 그리지 않은 자리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화면의 밝음이 어디에서 오는가의 문제다. 이 장은 두 사례를 함께 놓고, 형상이 없는 넓은 색면이 화면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를 묻는다.

사례 A채색된 여백 — 비어 있음의 물질성과 풍토

변시지, 〈제주 바다〉, 2011
도판 16. 변시지, 〈제주 바다〉, 2011. 작품 100 · FŪDO 010 작품 보기 →

1노트에 남은 문장

변시지의 노트에는 이런 문장이 남아 있다.1

그리지 않은 것이 그린 것을 지탱한다.

2011년의 〈제주 바다〉에서 화면의 거의 전부는 옅은 노란색이다. 오른쪽 아래에 검은 바위가 길게 누워 있고, 그 끝에 작은 사람 하나가 서서 긴 낚싯대를 바다 쪽으로 뻗었다. 왼쪽 위 멀리 작은 배 한 척이 있다. 수평선은 그어져 있지 않다.2 그린 것은 바위와 사람과 배뿐이고, 나머지는 그리지 않은 자리다.

그리지 않은 것이 어떻게 그린 것을 받칠 수 있는가. 이 사례는 이 한 줄을 그의 그림 속 빈 곳과 함께 놓고 읽는다.

노트에서 이 생각은 허(虛)와 실(実)의 짝으로 적혀 있다(노트2, 이미지 Image_20240121_0007·0008). 먼저 생략을 말했다. 생략하면 반드시 여백이 생기고, 생략은 허한 곳을 가장 살아 있는 곳으로 만든다고 했다. 실은 표현된 형이고, 허는 표현을 지탱하는 것이라 했다. 또 실은 허에 의해 지탱되어 비로소 예술의 형체가 되며, 허를 존중하는 것은 붓과 먹이 닿지 않은 곳, 형 밖의 형을 존중하는 일이라 적었다.

2넓게 남은 자리

이 사례에서는 뚜렷한 형상을 두지 않고 넓게 남겨 둔 자리를 '여백'이라 부른다. 제주 시기의 여러 그림에서는 화면의 넓은 부분이 이런 자리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비어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실제 화면에서 그 자리는 마른 풀잎색으로 칠한 면이다. 다만 그곳에는 사물의 형상도, 검은 선도 거의 없다.

제9장에서도 이런 자리를 보았다. 작은 배와 작은 사람의 둘레가 넓게 남아 있었다. 형상도 선도 없이 색만 남은 곳이다.

여백은 흔히 그리움이나 침묵으로 읽힌다. 그렇게 읽기 전에 먼저 살필 것이 있다.

3빈 곳이 하는 세 가지 일

빈 곳은 드러낸다. 둘레가 비어 있을 때 작은 배나 작은 사람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제주 바다〉의 사람은 화면에서 손톱만 하다. 그런데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형상이 적을수록 하나하나가 잘 보인다.

빈 곳은 열어 둔다. 넓게 남아 있기 때문에 휘어진 선의 방향이 다른 형상에 곧바로 막히지 않는다. 눈은 그 방향을 빈 곳 너머까지 이어서 본다. 낚싯대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이 따라간다. 그래서 빈 곳은 바람이 지나갈 수 있는 자리처럼 느껴진다.

빈 곳은 크기를 정한다. 넓은 빈 곳 앞에서 사람과 집과 나무는 작아 보인다. 빈 곳이 커질수록 사람은 작아진다.

이렇게 보면 빈 곳은 그림이 끝난 자리가 아니다. 그려진 것들이 보이고, 이어지고, 제 크기를 갖게 하는 자리다. 노트의 문장을 이 화면들과 함께 놓으면, '그리지 않은 것'이 무엇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4남겨 둔 바탕, 색이 있는 빈 곳

동아시아의 옛 그림에서는 종이나 비단의 바탕을 그리지 않은 채 남겨 두는 방식이 오래 쓰여 왔다. 물이나 하늘, 안개 같은 공간이 그 빈 바탕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을 흔히 여백의 미라고 부른다.

변시지의 빈 곳은 다르게 나타난다. 그의 빈 곳에는 형상이 없지만 색은 있다. 제10장에서 본, 오래 쌓인 볕과 바람의 색이다.

같은 '빈 곳'도 만들어지는 방식에 따라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5풍토가 형상 없이 펼쳐진 곳

변시지의 여백은 종이를 남겨 둔 자리가 아니라 마른 풀잎색을 칠한 자리다.

이렇게 보면 풍토는 그려진 것에만 있지 않다. 그리지 않은 자리에도 있다. 이 책에서 여백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풍토가 형상 없이 펼쳐진 곳이다.

〈제주 바다〉에서 바위와 사람과 배를 가리면 남는 것은 색뿐이다. 이 사례는 그 색의 자리를 풍토가 형상 없이 펼쳐진 곳으로 읽었다.

사례 A는 형상 없이 칠한 빈 곳이 그려진 것을 드러내고, 이어 주고, 제 크기를 갖게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넓은 빈 곳은 화면에서 밝은 자리이기도 하다. 사례 B는 〈열대의 태양〉(1983)에서 그 밝음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묻는다.

사례 B비방향적 광도

〈열대의 태양〉과 색면의 빛

변시지, 〈열대의 태양〉, 1983
도판 17. 변시지, 〈열대의 태양〉, 1983. 작품 100 · FŪDO 008 작품 보기 →

1제목 속의 태양

1983년에 그린 〈열대의 태양〉은 제목에 해를 담고 있다.3 이 그림에는 검은 소나무와 그 아래의 초가, 말 한 마리, 그리고 먼 배가 있다. 제9장에서는 이 그림의 먼 배를 보았다. 이 사례는 제목의 태양을 따라간다.

해는 그려져 있다. 왼쪽 위, 작은 노란 원에서 검은 붓질이 빛살처럼 뻗는다. 태양이라는 제목은 한쪽에서 쏟아지는 빛과 짙은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해가 만드는 그림자는 화면 어디에도 없다. 소나무도 집도 말도 한쪽이 밝고 다른 쪽이 어둡지 않다. 제주 시기의 여러 그림이 그렇다. 빛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이 화면들의 밝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퍼져 있는 밝음

제주 시기의 여러 그림에서 밝음과 어둠의 대비는 강하다. 밝은 마른 풀잎색 바탕 위에 검은 선과 어두운 형상이 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밝음은 어느 한쪽에서 들어오기보다, 마른 풀잎색을 넓게 칠한 면, 곧 색면 전체에 퍼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3밝음을 만드는 세 가지

이 밝음은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둘은 밝음을 만드는 까닭이고, 하나는 방향이 없는 까닭이다.

같은 노랑에도 흰색에 가까운 것과 갈색에 가까운 것이 있다. 이 사례에서 살피는 작품들의 마른 풀잎색은 검은 선과 어두운 형태에 비해 밝은 쪽에 놓인다. 이 색이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그림 전체가 밝아 보인다.

밝은 색과 검은색은 밝기의 차이가 매우 크다. 검은 선과 어두운 형태 곁에서 밝은 색은 더 밝아 보인다.

이 밝음에 방향이 없는 까닭이 하나 더 있다. 이 그림들의 어둠은 빛이 가려져 생긴 그림자라기보다 검은색이라는 색에서 온다. 그래서 명암 대비가 강해도 빛의 방향은 보이지 않는다.

4한쪽에 모인 빛, 화면에 퍼진 밝음

서양 회화의 명암법은 깊은 어둠과 국소적 조명을 통해 빛의 방향을 조직해 왔다.4

변시지의 제주 시기 화면도 명암 대비가 강하지만, 어둠은 그림자보다 검은 선과 형상에서 온다. 한쪽에서 빛을 떨어뜨리기보다 밝은 색면 위에 검은 형상을 놓기 때문에, 대비는 강해도 광원은 특정되지 않는다.

5쌓인 볕

제10장에서 마른 풀잎색을 오래 쌓인 볕과 바람이 만든 색으로 읽었다. 화가 자신은 이 색을 빛과 이어 말했다. 네비스의 글에 따르면, 화가는 이 색이 자연의 빛이 절정에 이를 때의 바다 색이라고 했다.5 가장 강한 한때의 빛에서 얻은 색이 수십 년 동안 화면의 바탕이 되었다. 그래서 이 화면의 밝음은 한순간의 햇빛이면서, 오래 되풀이되어 쌓인 볕이기도 하다.

사례 A에서 본 빈 곳도 이 밝음과 이어진다. 형상이 없는 넓은 자리일수록 밝음은 넓게 펼쳐진다. 빈 곳은 빛이 가장 넓게 머무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열대의 태양〉이라는 제목을 다시 읽을 수 있다. 해는 왼쪽 위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화면의 밝음은 그 한 점에서 오지 않는다. 제목의 '태양'은 그려진 해 하나보다 화면 전체의 밝음과 연결해 읽을 수도 있다.

〈열대의 태양〉에는 소나무 밑에도 말 밑에도 그림자가 없다. 이 사례는 이 화면의 밝음이 한쪽에서 오는 빛이 아니라 색면에 머무는 광도임을 확인했다.

두 사례에서 형상이 없는 넓은 색면은 비어 있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려진 것을 받치는 자리이자, 한쪽에서 오는 빛 대신 밝음이 머무는 자리였다. 이로써 논증 V는, 풍토가 마른 풀잎색과 검은 선, 여백과 빛을 통해 화면의 형식이 된다는 잠정 결론에 닿는다. 이어지는 이론적 중간결론은 논증 IV와 V의 결과를 모아, 화가가 붙인 '제주화'라는 이름에서 풍토모더니즘을 다시 정의한다.

빛은 한쪽에서 오지 않는다. 색 안에 머문다.

주와 출처

  1. ↑ 변시지의 노트에 적힌 문장이다(저자 확인, 2026-09-29). 육필 노트 전사(편지·구술채록 PDF 제외)에서 이 문장은 글자 그대로 찾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것은 노트2의 이미지 Image_20240121_0007의 「그리지 않는 것이 必然的이며 비로서 그리지 않으므로서 畵面이 一層 더 살아나는 것」과 「虛는 表現을 支撐하는 것이다」, 0008의 「実은 虛에 依해 支撐되여 비로서 藝術形体가 된다」이다(판독 상). 아래의 "채움은 비움에 의해 지지되며..."는 이 0008의 말과 같은 뜻이다. 이 쪽이 화가 자신의 구상인지 읽은 글의 정리인지는 아직 가리지 못했다. 『바람의 길: 변시지』(누보, 2020) 238쪽에 실린 작가노트에는 "채움은 비움에 의해 지지되며 비로소 예술형체가 된다"는 문장도 있다.
  2. ↑ 〈제주 바다〉(2011).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10)으로 확인.
  3. ↑ 〈열대의 태양〉(1983).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08)으로 확인 — 왼쪽 위의 해(노란 원과 빛살 붓질), 수평선 가까이의 배, 소나무 아래의 초가, 오른쪽의 말. 그림자는 없음.
  4. ↑ 렘브란트, 〈야경〉(1642),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정식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과 빌럼 판 라위턴뷔르흐 부관의 민병대〉.
  5. ↑ 캐럴 네비스(Carole Neves, 스미스소니언 연구소 정책분석실장), 「화가와 바다: 변시지」. 영어 원문: "The color ochre, Byun noted, is the color of the sea when the natural light reaches a pe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