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논증 V/제10장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제10장 · 16 / 34
마른 풀잎색과 검은 선
색은 묶고 선은 가른다
논증 V · 풍토는 색·선·여백·빛으로 형식화된다
제주 시기의 여러 그림에서 하늘과 바다와 땅은 한 가지 색 안에 놓이고, 그 위에서 검은 선이 사물의 모양을 세운다. 색과 선은 따로 일하지 않고 서로 기대어 일한다. 이 장은 마른 풀잎색(사례 A)과 검은 선(사례 B)을 한 장에 놓고, 풍토가 이 두 형식으로 어떻게 화면에 들어오는지를 묻는다.
사례 A마른 풀잎색 — 장소의 색에서 시간의 색으로
1해변에서 본 누런빛
뒷날 그가 돌아본 이야기가 있다. 제주에 내려와 그때까지 쓰던 화려한 색을 버리고 고민하던 어느 날, 그는 해변에 있었다. 흰 것이 햇빛을 받아 '하얗다 못해서 누렇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강한 볕 아래에서는 '모든 고유색이 변한다'고 그는 말했다. 볕이 이렇게 강한 섬이라면 색도 다른 고장과 다를 것이었다. 그렇다면 제주를 색으로 말할 때 '누런색'이 아니겠는가. 뒷날 그는 자기 색의 시작을 그렇게 돌아보았다.1
〈고독〉(1995)에서는 언덕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 사람 하나가 앉아 있다. 멀리 배 한 척, 가까이 새 한 마리가 있다. 그런데 하늘과 바다와 언덕이 모두 한 색이다. 마른 풀 같은 붓결이 화면 전체를 쓸고 지나간다.2 제주 시기의 여러 그림이 그렇다. 하늘과 땅과 바다는 서로 다른 색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색이 밝고 어둡게만 달라지며 화면 전체를 감싼다.
이 색은 흔히 황토색이라 불린다. 이 책은 이 색을 '마른 풀잎색'이라 부른다. 이 사례는 이름의 문제와 함께, 이 색이 화면 안에서 하는 일을 묻는다.
2이름이 바꾸는 것
황토색이라고 부르면 먼저 흙의 색을 떠올리게 된다. 색의 의미가 땅과 장소 쪽으로 기운다.
마른 풀잎색이라는 이름은 가을 들판에 선 풀을 가리킨다. 풀은 살아 있었고, 볕을 받았고, 바람을 맞았고, 말랐다. 색의 의미가 시간과 날씨 쪽으로 움직인다.
황토색이 물질의 이름이라면, 마른 풀잎색은 시간을 지나온 색의 이름이다. 이 책이 이 이름을 쓰는 까닭은, 이 색을 어느 지역의 표시가 아니라 오래 마른 시간의 흔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3색은 묶고, 선은 가른다
화면 전체가 한 가지 색일 때, 사물은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제주 시기의 여러 그림은 고유색에 기대지 않는다. 사과를 빨갛게, 잎을 푸르게 칠해서 사물을 알아보게 하지 않는다. 사물은 색보다 어두운 형태와 검은 선으로 구별된다. 〈고독〉에서 언덕은 검은 선 하나로 하늘과 나뉘고, 나무는 검은 형태로 서며, 그 아래 앉은 사람은 검은 점 하나다.
색은 사물들을 한데 묶는다. 선은 사물들을 가른다. 하늘도 바다도 땅도, 집도 새도 사람도 같은 색 안에 놓인다. 그 위에서 검은 선과 어두운 형태가 저마다의 모양을 세운다.
이 색은 어느 한 사물의 색이라기보다, 사물들이 함께 놓인 조건이 만든 색에 가깝다. 이런 색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4광학적 조건색과 장기 지속의 색
인상주의의 연작은 시간대와 날씨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 달라 보이는 광학적 조건을 회화의 중심 문제로 만들었다.3
변시지의 마른 풀잎색을 이 전통과 병치할 수는 있지만 동일한 '조건색'으로 등치해서는 안 된다. 인상주의가 순간적 광학 조건의 차이를 연속적으로 포착했다면, 변시지의 색은 오랜 체류와 반복된 관찰을 통해 특정한 색조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색채학적 용어의 확대가 아니라 시간 규모의 차이다. 마른 풀잎색은 한순간의 인상이기보다 장기간 축적된 볕·바람·기억을 회화적으로 압축한 색채 체계로 읽힌다.
이 색은 특정 사물의 고유색을 지시하지 않고, 하늘·바다·땅·사람을 동일한 기후적 장 안에 묶는다. 색채는 대상을 묘사하는 기능에서 관계를 조직하는 기능으로 이동한다.
이때 '마른 풀잎색'은 작가가 사용한 명칭이 아니라 이 책의 해석적 용어다. 그 명칭의 유효성은 제주를 상징하는 황토색과 구별되는 시간성—살아 있었고, 볕과 바람을 겪고, 말라 남은 색—을 얼마나 정확히 드러내는가에 달려 있다.
마른 풀잎색은 죽은 색이 아니다. 오래 견딘 생명의 색이다.
5고유색도 향토색도 아닌 조건색
마른 풀잎색은 이렇게 어느 한 사물의 고유색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제주를 알리는 표지도 아니다. 여기서 향토색이란 한 고장다운 풍경과 색을 그 지역의 표지로 내세우는 색을 말한다. 마른 풀잎색은 이 향토색으로만 읽히지도 않는다. 이 개념의 역사적 맥락은 이론적 중간결론에서 다룬다. 마른 풀잎색은 하늘과 바다와 땅, 사람과 나무가 함께 놓인 조건이 만든 색이다. 그 조건은 햇볕과 바람, 오래 흐른 시간, 그리고 그곳에서 산 삶이다.
화가도 이 색을 향토의 색으로 묶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주 사람들은 일할 때 갈옷, 제주말로 갈중이를 입었다. 풋감을 찧어 낸 물, 곧 감물을 들인 옷이다. 그 옷의 갈색에서 착안한 것 아니냐는 말에, 그는 "갈중이 색하고 달러"라고 답했다. 갈옷의 색이라면 열 점을 그려도 다 같겠지만, 자기 그림은 그릴 때마다 '누런 톤'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었다.1
풍토는 이렇게 색이 되어 화면에 들어온다.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떤 색 안에 모든 것을 함께 놓느냐로 들어온다. 그리고 색이 모든 것을 묶는 만큼, 사물을 가르는 일은 선이 맡는다.
이 사례는 마른 풀잎색을 고유색도 향토색도 아닌, 오랜 시간의 조건이 만든 색으로 읽었다.
사례 A는 색이 사물들을 한데 묶고, 사물을 가르는 일은 선에 맡긴다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 화면에서 검은 선은 가르는 일만 하는가. 사례 B는 1987년의 〈한라산〉에서 출발해 검은 선이 하는 일을 묻는다.
사례 B검은 선 — 윤곽·힘·자세의 회화적 문법
1선이 세운 산
1987년의 〈한라산〉에서 화면은 온통 노랑이다. 그 위에 검은 선이 산의 능선을 몇 겹으로 긋고, 돌담을 가로지르고, 초가의 지붕을 두르고, 말과 사람의 몸을 세운다. 사람은 막대를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선을 빼면 남는 것은 노란 바탕과 해뿐이다.4
1991년에 그린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제목으로 삼은 그림도 있다.5 그러나 그림은 보이는 것으로만 말할 수 있다. 바람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바람을 맞은 것들이다.
변시지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무엇으로 보이게 했는가. 이 사례는 그 답을 검은 선에서 찾는다.
2휘고, 기울고, 거칠다
제주 시기의 여러 그림에서 검은 선에는 되풀이되는 특징이 있다.
선은 곧게 뻗기보다 휘고 기운다. 소나무의 줄기도, 사람의 등도, 낮은 지붕의 선도 그렇다.
휘는 방향은 화면 여러 곳에서 비슷하게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선은 매끈하지 않다. 선의 두께와 진하기가 일정하지 않고, 붓질의 흔적이 거칠게 남는다. 그 고르지 않은 선은 매끈한 윤곽보다 움직임과 긴장을 느끼게 한다.
이 세 가지가 여러 그림에서 되풀이된다. 우연이라기보다 하나의 방식으로 볼 수 있다.
3한 획이 하는 세 가지 일
검은 선 하나는 여러 일을 한꺼번에 한다.
첫째, 가른다. 사례 A에서 보았듯, 마른 풀잎색이 모든 것을 한데 묶는 화면에서 사물을 구별하는 것은 선이다. 밝은 바탕 위에서 검은 선의 경계는 또렷하다. 선은 집과 땅, 사람과 하늘 사이에 경계를 긋는다.
둘째, 기록한다. 지나간 힘의 방향을 남긴다는 뜻이다. 선이 비슷한 방향으로 휘어질 때, 화면에는 같은 힘이 여러 사물에 작용하는 듯한 방향성이 생긴다. 선이 바람이라는 원인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셋째, 세운다. 선은 기울고,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진다. 기운 채로 이어지는 선은 쓰러진 형태가 아니라 버티는 자세를 만든다. 제16장에서 볼 굽은 몸도 이 선으로 서 있다.
선은 테두리를 닫는다. 그러나 눈은 선이 기운 쪽으로 따라가고, 그 방향은 화면 밖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이 선은 테두리이면서 힘이고, 동시에 자세다.
변시지는 바람을 그리지 않는다. 바람을 맞은 자세를 그린다.
4골법용필과 유화의 선
동아시아 화론의 골법용필(骨法用筆)은 선을 단순한 윤곽이 아니라 형태의 뼈대와 붓을 움직인 몸의 힘이 함께 남는 것으로 이해한다.6 변시지의 검은 선을 이 전통과 병치할 수 있지만, 유화 화면에서 선이 수행하는 기능은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변시지의 선 역시 형태를 세운다. 차이는 바탕에 있다. 그의 선은 종이 위의 먹선이 아니라 유화 화면 위에 놓인다. 그 위에서 선은 기울어진 자세와 화면의 방향성을 만든다.
그런데 왜 검은색이었을까. 화가 자신의 말이 있다. 누런 바탕을 얻은 뒤 그는 검은색을 생각했다고 했다. 우리는 옛날부터 편지를 쓸 때에도 먹으로 썼고, 사람의 머리와 눈동자도 검다. 한국 사람은 먹으로 쓰는 데 익숙한 민족이니, 그것이 한국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검은색만으로 그려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7 그가 서예와 화론에서 무엇을 익혔는지는 제7장 사례 A의 매체 번역 논의에서 살폈다.
5두 몸이 만나는 자리
제8장에서 몸에 들어온 풍토가 선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몸은 둘이다.
하나는 그려진 몸이다. 바람 속의 노인, 기운 소나무, 낮은 집처럼 화면 속에서 풍토를 견디는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는 몸이다. 붓을 든 화가의 손과 팔의 움직임이 선으로 남는다.
오랫동안 제주에서 살아온 화가의 몸과, 화면 속에서 풍토를 견디는 몸이 선 위에서 만난다고 읽을 수 있다. 검은 선은 두 몸이 만나는 자리다.
이 책이 선을 오래 보는 까닭이 여기 있다. 색이 풍토를 화면 전체에 펼친다면, 선은 풍토가 몸을 지나온 흔적을 남긴다.
이 사례는 검은 선이 사물을 가르고, 힘의 방향을 기록하고, 자세를 세운다는 것을 확인했다.
두 사례를 함께 보면 마른 풀잎색과 검은 선은 한 짝으로 일한다. 색은 하늘과 바다와 땅을 한 조건 안에 묶고, 선은 그 위에서 사물을 가르며 바람을 맞은 자세를 세운다. 그러나 화면에는 선이 닿지 않은 넓은 자리가 남고, 그 자리는 화면에서 밝은 곳이기도 하다. 다음 장은 색이 칠해진 여백과, 그 여백에 머무는 밝음을 다룬다.
선은 기운 채 이어진다. 그 위에 자세가 선다.
주와 출처
- ↑ 『변시지 구술채록문』(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채록연구 이인범) 제7차 구술(2005년 4월 1일), 304~305쪽.
- ↑ 〈고독〉(1995).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14)으로 확인.
- ↑ 모네의 곡식 더미 연작.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의 소장품 〈Stacks of Wheat (End of Summer)〉(1890~1891) 설명은 1891년 5월 모네가 파리 뒤랑뤼엘 화랑의 작은 방 하나에 이 연작 열다섯 점을 나란히 걸었다고 적는다. 연작의 수는 빌덴슈타인의 모네 카탈로그 레조네(1266~1290번)를 따라 스물다섯 점으로 헤아린다. 시기(1890년 여름 끝부터 1891년 봄까지)와 장소(지베르니, 모네의 집 근처 들판)도 같은 자료를 따름.
- ↑ 〈한라산〉(1987).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09)으로 확인.
- ↑ 〈바람〉(1991). byunshiji.org 작품 100의 FŪDO 016. 짙은 초록빛 밤 화면에 휜 나무와 낮은 집, 말과 사람이 있다.
- ↑ 사혁(謝赫), 『고화품록(古畫品錄)』의 육법(六法): 기운생동(氣韻生動)·골법용필(骨法用筆)·응물상형(應物象形)·수류부채(隨類賦彩)·경영위치(經營位置)·전이모사(傳移模寫).
- ↑ 『변시지 구술채록문』(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채록연구 이인범) 제7차 구술(2005년 4월 1일), 305쪽. "검정색이 우리 한국사람들은 옛날부터 편지를 쓰거나 뭐 쓰느라 먹필로 썼으니까.... 사람은 머리도 까맣고 눈동자도 까맣고... 그 검정색을 그 만으로 그려보기 시작한 거죠". 누런 바탕에 관한 말(304~305쪽)은 사례 A의 주 a1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