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기 / 4 / 5
4번째 이야기
남겨진 자리
적게 그린 그림이 오래 남는 까닭
배 한 척이 멀리 있다.그 둘레에는아무것도 더 놓지 않았다.
묻는 것 작은 배 하나가 어떻게 바다를 넓게 만들까?
1 작은 배
〈제주 바다〉는 2011년의 그림이다. 화면의 거의 전부가 옅은 노란색이다. 오른쪽 아래에 검은 바위가 길게 누워 있고, 그 끝에 작은 사람 하나가 서서 긴 낚싯대를 바다 쪽으로 뻗었다. 왼쪽 위 멀리 작은 배 한 척. 수평선은 그어져 있지 않다.
사람은 손톱만 하다. 그런데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둘레가 비어 있을수록 작은 것은 또렷해진다. 배는 더 작다. 먼 것은 작게 보인다는 가장 단순한 원리가 여기서 쓰인다. 작은 배 하나가 바다를 멀게 만든다. 배가 한 척뿐이라서, 그 둘레로 넓은 바다가 남는다. 배 한 척은 바다의 넓이를 재는 눈금이다.
〈점 하나〉는 더 적게 남겼다. 화면은 온통 밝은 노란색이다. 위에서 5분의 1쯤 되는 높이에 가는 검은 선 하나가 가로로 지나간다. 자로 댄 듯 곧지 않고, 손으로 그은 대로 조금 흔들린다. 그 선 바로 아래, 점에 가까운 배 한 척이 있다. 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화가는 말했다. 점 하나로 제주를 표현하고 싶다. 점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노란 화면은 바다로 읽힌다.
2 색이 있는 빈 곳
비어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 자리는 마른 풀잎색으로 칠한 면이다. 형상도 선도 거의 없을 뿐이다. 옛 그림에서 종이를 그리지 않은 채 남겨 두던 여백과는 다르다. 그의 빈 곳에는 색이 있다. 오래 쌓인 볕과 바람의 색이다.
빈 곳은 세 가지 일을 한다. 드러낸다. 둘레가 비어 있을 때 작은 배와 작은 사람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열어 둔다. 낚싯대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이 따라가고, 그 방향은 빈 곳 너머까지 이어진다. 크기를 정한다. 넓은 빈 곳 앞에서 사람과 집과 나무는 작아진다.
화가의 노트에 이런 문장이 남아 있다. 그리지 않은 것이 그린 것을 지탱한다. 빈 곳은 그림이 끝난 자리가 아니다. 그려진 것들이 보이고, 이어지고, 제 크기를 갖게 하는 자리다.
덜어냄은 가난이 아니다. 남은 것에 일을 모으는 방식이다. 적게 남길수록 남은 것이 더 많은 일을 한다. 배 한 척이 거리를, 한 가지 색이 묶음을, 몇 줄의 검은 선이 자세를, 넓은 빈 곳이 밝음을 맡는다.
3 곁
〈이어도〉(1980)에는 빈 배 한 척이 뭍에 올라 있고, 그 옆에 까마귀 한 마리가 있다. 배 안이 아니다. 배 위도 아니다. 옆이다. 배는 검은 선으로 둘러싼 작은 빈 곳이고, 까마귀는 검은색이 모인 작은 자리다.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은 검게 차 있다.
까마귀가 배 안에 있다면 배는 더 이상 비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옆에 있을 때 둘은 서로를 가리지 않는다. 빈 배는 빈 채로 보이고, 까마귀는 까마귀로 보인다. 곁은 빈 것을 빈 채로 둔다. 채우지 않고 곁을 남기는 구성이다.
그의 여백은 비어 있지 않다. 바람과 침묵으로 가득 차 있다.
글을 읽기 전에는 배가 보였다. 다시 보면, 배 둘레의 바다가 보인다.
글·기획·편집 변정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