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시간과 기억 · 74 / 100
사계(四季)의 순환
돌아오는 계절, 돌아오지 않는 시간
The Cycle of the Seasons
제목 속의 계절, 화면 속의 시간
〈가을 애련정〉에는 정자와 물에 비친 정자, 그 둘레의 잎들이 있다. 제목은 가을이라고 말하지만 화면은 계절의 이름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기와의 규칙적인 선과 잎의 작은 자국, 반영의 아래쪽을 차례로 보면 한 번에 보였던 풍경 안에 다시 머물 시간이 생긴다.
〈열대의 태양〉에서는 해와 나무, 땅과 말 한 마리가 다른 밀도로 놓인다. 제목은 강한 볕을 떠올리게 하지만 제작한 날의 기온이나 계절을 정확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계절의 경험과 제목이 여는 상상, 실제 작업의 날짜를 구별할 때 오히려 그림에서 읽을 시간이 더 많아진다.
이 글은 네 계절을 그린 한 연작을 확인했다는 뜻에서 사계를 말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자연의 리듬과 한 번 지나간 사람의 시간이 어떻게 화면에서 만나는지를 묻는다. 계절은 반복되지만, 그 계절 앞에 서는 몸과 그 곁에 있는 사람은 그대로이지 않을 수 있다.
달력의 원과 날짜의 차이
달력에서는 같은 달이 돌아온다. 그러나 되풀이되는 이름과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다르다. 작년의 가을이라는 말과 올해의 가을이라는 말에는 같은 계절과 다른 날짜가 함께 있다. 이것을 곧바로 동양과 서양의 시간관으로 나눌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의 일상에도 두 방식이 함께 작동한다.
〈일몰〉은 하루의 끝을 제목에 둔다. 분홍과 푸른 기운이 섞인 수면, 왼쪽의 짙은 해안과 작은 배들이 보인다. 하루가 끝나면 다음 날이 오겠지만, 지금 본 수면이 똑같이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되풀이되는 일몰과 이 한 점에 남은 일몰은 같은 단위가 아니다.
회화의 날짜는 이 차이를 붙잡는 작은 표지다. 그러나 연도 하나가 그림의 모든 시간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린 해와 떠올린 풍경의 때가 다를 수 있고, 나중에 다시 손댄 시간이 있을 수도 있다. 날짜를 소중히 하는 것과 그림을 달력 한 칸에 가두는 것은 다르다.
돌아오는 것은 계절만이 아니다
같은 나무를 다시 보면 지난번 보았던 나무가 함께 떠오른다. 지금의 형상과 기억 속의 형상은 서로 겹치되 꼭 일치하지 않는다. 잎이 줄었을 수도 있고, 그늘이 다르게 놓였을 수도 있다. 오래 본다는 것은 차이를 놓치지 않을 기회를 얻는 일이지, 저절로 더 깊은 사람이 되는 일은 아니다.
변시지는 길에서 고목 같은 옛 풍경의 일부를 보면 이전의 풍경들이 연상된다고 말한다. 그가 설명한 마음의 풍경에는 현재의 관찰과 사라진 것의 기억이 함께 있다. 계절의 되돌아옴도 이런 만남으로 읽어볼 수 있다. 지금 보이는 한 부분이 이미 지나간 여러 날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때 기억은 풍경을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투명한 창이 아니다. 지금의 눈이 고른 자리에서 과거가 다시 나타난다. 무엇은 또렷하고 무엇은 흐리다. 그 차이를 모두 결함이라 부르기보다, 현재가 과거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 그림은 그 관계에 다시 형태를 준다.
영원회귀를 견딤의 명령으로 읽지 않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 341절은 지금까지의 삶이 기쁨과 고통까지 같은 순서로 다시 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는 물음을 던진다. 이는 계절의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시험하는 사유의 장면이다. 반복되는 소재를 그린 사실만으로 화가가 이 사상을 실천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물음을 그림 곁에 놓으면 반복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된다. 다시 보는 일에는 익숙함의 안도와 익숙함에 갇힐 위험이 함께 있다. 같은 것을 그릴 자유와 다른 것을 시도할 자유도 함께 있어야 한다. 어제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오늘의 그림이 불필요해지지도, 반드시 필요해지지도 않는다.
특히 고통을 다시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남에게 건네서는 안 된다. 돌아오는 계절을 기다릴 수도 있고, 지나간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그림이 삶을 긍정한다면 그것은 모든 시련을 승인해서라기보다, 시련 이후에도 다른 관계를 만들 자리를 남겨서일 수 있다.
베르그송의 선율 곁에서
베르그송은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서로 분리된 단위의 나열로 환원되지 않는 지속을 설명하며 선율의 경험을 들려준다. 뒤의 소리를 들을 때 앞의 소리는 단순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 생각은 같은 계절을 만나는 경험에도 하나의 비교 관점을 준다. 다만 그림이 그 이론의 증명이라는 뜻은 아니다.
〈가을 애련정〉의 위쪽 정자를 본 뒤 아래의 반영을 보면, 눈은 처음 본 지붕의 형태를 완전히 놓지 않는다. 물속의 모양은 그 기억과 함께 읽힌다. 한 화면을 보는 데에도 앞서 본 것이 나중의 보기를 바꾸는 시간이 있다. 회화가 한순간에 전부 주어진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지난 시간이 언제나 더 풍요롭게 쌓인다고 약속할 수는 없다. 잊는 일과 흐려지는 일도 있다. 그림은 그 손실을 모두 되돌려주지 않는다. 다만 남아 있는 작은 감각과 지금의 시선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다시 본다는 말에는 되찾음과 달라짐이 함께 있다.
생활의 리듬과 작업의 리듬
계절은 눈에 보이는 풍경만 바꾸지 않는다.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기다릴지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을 모두 성스러운 의례라고 부르기 전에,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반복을 먼저 보아야 한다. 같은 일을 다시 하는 데에는 신비보다 구체적인 필요가 있을 때가 많다.
그리는 시간에도 날씨와 다른 리듬이 있다. 변시지는 물감이 어느 정도 마른 뒤 다시 손댈 수 있다고 설명했고, 집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이야기했다. 계절의 변화와 물감의 건조, 몸의 상태가 언제나 같은 박자로 움직인 것은 아니다. 작업실 안에는 여러 시계가 함께 있었다.
따라서 여름에는 반드시 폭풍을 그리고 고요한 날에는 고요를 그렸다고 순서를 정할 수는 없다. 기억해둔 폭풍을 나중에 그릴 수도 있다. 실제 날씨와 그려진 날씨 사이의 간격은 오류가 아니라 회화가 이루어질 여지다. 겪은 것이 곧바로 옮겨지지 않기에 고르고 다시 볼 시간이 생긴다.
다음 계절을 생각하는 자리
지금의 계절에는 지나간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에 올 것을 기다리는 마음도 있다. 그림 앞에 선 관객에게도 그 시간이 들어온다. 어떤 이는 잎을 보며 지나간 가을을 떠올리고, 다른 이는 곧 올 계절을 생각한다. 같은 화면이 같은 회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일몰〉의 작은 배들은 어느 쪽으로 갈지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저녁이라는 제목이 있다고 해서 하루의 모든 일이 끝난 것도 아니다. 그 너머의 항해와 귀가를 상상할 수 있지만 화면은 그 이야기를 확정하지 않는다. 끝을 뜻하는 이름 안에도 아직 열려 있는 시간이 있다.
이 열림을 무조건 희망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 기다리는 일은 불안할 수 있고, 다음 계절을 약속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를 완결된 상자로 만들지 않는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림에 남은 배 한 척이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시간을 관객 곁에 놓는다.
위로 오르지 않아도 이어지는 시간
계절의 시간을 나선에 비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선이 언제나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되돌아보는 자리와 앞으로 향하는 자리가 엇갈릴 수 있다. 그림마다 더 깊어지고 더 훌륭해졌다는 평가를 날짜만으로 줄 수 없다. 달라졌다는 것과 좋아졌다는 것은 따로 보아야 한다.
변시지의 여러 화면을 함께 보는 일은 그 차이를 살피는 일이다. 〈가을 애련정〉의 반영, 〈열대의 태양〉의 나무와 말, 〈일몰〉의 열린 수면은 하나의 계절표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두 오래 머물며 보는 시간을 만든다. 서로 다른 시간이 나란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회화의 넓이일 수 있다.
정자가 물에 비쳐 있다. 위쪽의 잎을 보던 눈이 아래쪽으로 내려온다. 같은 지붕을 두 번째로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