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Ⅵ 시간과 기억

Ⅵ 시간과 기억 · 75 / 100

폭풍 전후(前後)

고요와 움직임 사이의 시간

Before and After the Storm

풍랑 / Stormy Seas · 1983. 비스듬한 밝은 획들 아래 가까이 선 사람과 말, 뒤쪽의 작은 집. / A person and pony close together beneath diagonal light strokes, with a small house behind.
〈풍랑〉 · 1983FŪDO 067
선착장 / The Landing · 1979. 뭍의 사람과 작은 배 사이에 넓게 남겨진 수면. / A stretch of water separates a figure on shore from a small boat.
〈선착장〉 · 1979FŪDO 078

두 그림은 같은 폭풍의 전후가 아니다

〈풍랑〉에서는 밝은 자국들이 낮은 집의 둘레를 휘젓고, 아래쪽에 사람과 말이 가깝게 서 있다. 〈선착장〉에서는 짙은 뭍과 배 사이에 물이 벌어져 있다. 하나는 움직임이 먼저 보이고 다른 하나는 간격이 먼저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점이 실제 한 폭풍의 앞뒤를 기록했다는 뜻은 아니다.

제공 자료에서 〈선착장〉은 1979년, 〈풍랑〉은 1983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먼저 그려진 고요한 그림을 뒤에 놓았다고 해서 폭풍 이후의 장면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전후라는 말은 여기서 작품의 제작 순서보다 관객이 그림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시간의 문제다.

같은 고요도 무엇을 먼저 보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격렬한 화면을 본 뒤에는 넓은 수면에서 여운을 느낄 수 있다. 거꾸로 고요한 화면 뒤에 폭풍화를 보면 그 간격이 예감으로 바뀔 수 있다. 그림의 시간은 화면 안에만 있지 않다. 보는 순서에도 놓여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는 눈

〈선착장〉의 배는 짙은 땅과 맞닿지 않는다. 그 사이의 밝은 수면을 눈이 건넌다. 사람의 작은 형상이 뭍에 있어도, 그 사람이 배를 기다리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화면만으로 알 수 없다. 다만 두 자리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도착과 기다림을 생각할 틈을 만든다.

기다림은 아무 일도 없는 상태와 다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지금 보이는 것의 의미를 바꾼다. 빈 물의 폭이 길게 느껴지고 작은 형상의 자세가 눈에 남는다. 이것은 작품 속 인물의 심리를 확정하는 말보다, 그 화면 앞에서 관객이 겪는 시간의 설명에 가깝다.

폭풍을 기다린다는 이야기 또한 이 간격에 넣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유일한 해석은 아니다. 한낮의 멈춤일 수도 있고, 돌아온 뒤의 거리일 수도 있다. 좋은 전정의 읽기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크게 외치기보다, 여러 가능성 앞에서 지금의 장면을 오래 보게 한다.

움직임 속에 남는 접촉

〈풍랑〉의 사람과 말은 아주 가깝다. 집을 둘러싼 밝은 자국과 달리 두 몸의 어두운 획은 서로 닿을 듯 모여 있다. 그 가까움 때문에 화면의 움직임은 추상적인 소용돌이로만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몸을 둘 곳과 다른 몸 곁에 있을 필요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변시지는 실제 폭풍을 친구의 차 안에서 본 뒤 집에서 그렸다고 회고한다. 이 말은 화면의 현실감을 이해할 단서다. 그러나 붓질을 현장에서 느낀 충격의 직접 복사로 볼 필요는 없다. 보았던 것을 기억하고, 거리를 정하고, 어떤 형상을 또렷하게 남길지 고르는 과정이 사이에 있다.

폭풍을 삶의 시련과 겹쳐 읽는다면 그 접촉을 더 오래 볼 수 있다. 시련은 사람 혼자만의 의지를 시험하는 무대가 아니다. 서로 가까이 있는 몸과 보호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 집, 그 둘레의 불안한 자리가 함께 있다. 견딤의 그림은 누가 혼자 강한지를 겨루는 그림일 필요가 없다.

태풍의 눈이라는 비유의 경계

기상학에서 태풍의 눈은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고요한 영역이며, 그 둘레의 눈벽은 강한 바람과 비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이 구조는 고요와 격렬함의 이웃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상대적인 고요를 위험이 사라진 상태나 언제나 완벽한 무풍으로 바꾸어 말해서는 안 된다.

그림 속 굽은 등을 태풍의 눈에 비유할 수는 있다. 다만 사람의 내면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증거는 아니다. 몸을 낮추는 자세에는 두려움과 피로, 다른 몸에 대한 의지가 함께 읽힐 수 있다. 비유가 인물을 설명해 버릴 때보다, 여러 상태를 생각할 여지를 남길 때 더 조심스럽고 깊어진다.

작은 형상이 화면의 중심에 있지 않아도 눈이 쉬는 자리가 될 수 있다. 〈풍랑〉에서는 아래쪽 두 몸의 가까움이 그런 역할을 한다. 그림의 고요는 기상의 고요를 그대로 그린 것만이 아니다. 어떤 획 앞에서 시선이 잠시 멈추도록 만드는 구도의 일일 수도 있다.

지나간 뒤에 남는 것을 함부로 정화라 부르지 않다

폭풍 뒤의 고요를 말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상실을 정화로 꾸미는 일이다. 사라진 것은 살아남을 가치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남아 있는 것은 더 고귀해서 남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자연의 사건을 인간의 도덕적 심판으로 바꾸면, 잃어버린 삶과 사물의 자리가 지워진다.

그림의 여백에서 상실을 느낀다면 그 여백을 곧 회복으로 채우지 않아도 된다. 빈 배를 보며 돌아오지 않은 이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이 특정 죽음을 기록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작품이 열어주는 애도의 가능성과 확인된 사건의 기록은 다른 방식으로 소중하다.

회복을 생각한다면 다시 살아갈 구체적인 조건까지 생각해야 한다. 쉬는 몸, 도움을 건네는 사람, 다시 고쳐야 할 자리. 이런 것들은 폭풍이 선물한 깨끗함이 아니라 폭풍 뒤에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다. 고요는 완성된 결말보다 아직 남아 있는 일의 시간일 수 있다.

한 화면에서 함께 있는 정과 동

〈풍랑〉의 격렬함 안에는 두 몸의 가까운 정지가 있고, 〈선착장〉의 고요 안에는 배와 땅 사이를 건너는 시선의 움직임이 있다. 정과 동은 반드시 차례대로 나타나는 두 장면이 아니다. 한 화면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함께 작동할 수 있다.

제공된 「묵화」 판독본에는 먹빛의 움직임과 종이의 고요함이 이루는 리듬에 관한 논의가 있다. 이를 변시지의 유화와 비교하면 검은 획과 밝은 자리의 관계를 살필 수 있다. 다만 유화의 밝은 자리가 칠하지 않은 흰 종이와 같은 재료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리듬을 찾는 일은 모든 작품을 폭풍과 고요의 교대표에 넣는 일이 아니다. 어떤 화면은 끝내 팽팽하고 어떤 화면은 어느 쪽으로도 쉽게 기울지 않는다. 작품이 같은 박자를 따르지 않을 자유를 남겨둘 때, 되풀이되는 소재 안의 차이도 더 잘 들린다.

생애를 정·동·정으로 닫지 않다

한 생애를 고요한 준비, 격렬한 발견, 평온한 만년으로 정리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 쉬움 때문에 각 시기의 실제 그림들이 사라질 수 있다. 젊은 날에도 갈등과 선택이 있고, 늦은 날에도 다시 고치는 손이 있다. 마지막을 알고 읽는 우리는 처음부터 그 마지막을 기다렸던 삶을 만들기 쉽다.

변시지가 작업을 설명할 때에는 관찰과 기억, 기다림과 재작업이 서로 얽힌다. 그 과정은 폭풍에서 고요로 한 번 건너가는 길보다 복잡하다. 같은 그림 앞에서도 구도를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는 구술은, 만년을 모든 판단이 끝난 자리로 만들지 못하게 한다.

전후를 읽되 가운데를 닫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폭풍을 지난 뒤에도 긴장이 남을 수 있고, 폭풍 이전의 장면에도 오래된 상실이 있을 수 있다. 그림의 고요를 화가의 최종적인 답으로 만들지 않을 때, 관객은 자신의 시간으로 그 앞에 설 수 있다.

소리가 멎은 자리, 눈이 돌아오는 자리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세 악장 동안 연주자가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면서 연주 환경의 소리에 주의를 돌린다. 이 작품과 변시지의 고요를 비교할 때 중요한 것은 둘이 같은 뜻이라는 결론이 아니다. 무엇이 멈추자 그동안 지나쳤던 것이 들리거나 보이기 시작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케이지의 연주에서 들리는 소리는 실제 그곳의 소리다. 그림에서 느끼는 바람 소리는 시선과 기억이 만들어내는 감각의 연상이다. 이 차이를 남겨도 비교는 가능하다. 그림이 조용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소리가 없다는 사실보다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다시 물을 수 있다.

〈풍랑〉을 본 뒤 〈선착장〉으로 눈을 옮긴다. 배는 뭍에 닿지 않았다. 그 사이의 물을 조금 더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