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시간과 기억 · 76 / 100
유년의 빛
기억은 어떤 크기로 돌아오는가
The Light of Childhood
창문 밖의 아이
변시지가 구술에서 꺼낸 유년의 장면에는 학교 창문이 있다. 형들은 안에서 수업을 받았다. 아직 어려서 들어갈 수 없었던 아이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다 돌아왔다. 거대한 운명의 예고보다, 한 아이와 창문 사이의 거리가 먼저 남아 있다.
이 기억을 모든 그림의 기원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다만 이후의 화면을 보는 우리의 눈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가까이 있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자리, 보이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 그런 간격을 작은 집과 먼 배 사이에서도 느껴볼 수 있다.
유년의 빛은 언제나 눈부신 햇살일 필요가 없다.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을 나누는 창의 밝음일 수도 있다. 그 빛을 생각하면 풍경은 아름다운 배경이 아니라, 몸이 어디까지 다가갈 수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공간이 된다.
꿀 한 숟가락과 말의 등
또 다른 기억에는 효돈의 외갓집이 있다. 아버지는 말을 끌고 갔고, 아이는 그 등에 탔다. 외할아버지는 작은 광에서 꿀단지를 꺼내 한 숟가락씩 떠주었다. 그런데 안장 없이 말을 탄 뒤에는 살갗이 벗겨져 아팠다. 달콤함과 아픔이 같은 나들이 안에 있었다.
그 유년을 잃어버린 낙원이라고만 부르면 말의 등에서 생긴 아픔은 사라진다. 반대로 고난의 시작이라고만 부르면 꿀을 내주던 손이 지워진다. 기억이 오래 남는 까닭은 한 가지 감정으로 정리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장면이 서로 다른 감각을 품는다.
〈조랑말〉의 앞쪽 말은 고개를 낮추고, 뒤쪽 말은 목을 세운다. 두 몸은 가깝지만 같은 자세가 아니다. 이 그림을 어린 날 탔던 말의 초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말이 상징이기 전에 가까이에서 만났던 다른 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마들렌은 증명서가 아니다
프루스트의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차에 적신 마들렌의 맛은 콩브레의 기억을 불러온다. 그러나 그 장면은 단번에 과거를 설명하는 공식이 아니다. 낯선 기쁨이 먼저 오고, 화자는 그 감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거듭 더듬는다. 알아보는 데에도 시간이 든다.
그 장면과 변시지의 그림을 나란히 놓으면, 감각이 이야기를 앞서는 순간을 생각할 수 있다. 마른 풀잎색 앞에서 먼저 어떤 온기나 거리를 느끼고, 그다음에 자기 기억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감상의 한 가능성이지, 화가의 실제 기억이 작동한 과정을 입증하는 자료는 아니다.
그림이 기억을 부른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유년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마른 들을, 누군가는 오래된 방을 떠올린다.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고 색과 선만 오래 볼 수도 있다. 작품은 기억을 명령하지 않는다. 기억이 들어올 자리를 남긴다.
출항의 크기
일본으로 떠나던 기억에서 변시지는 큰 배와 작은 배를 구별한다. 큰 배가 해안 가까이 붙지 못해 작은 배로 건너갔고, 위에서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그때 누군가의 흰 고무신이 물에 떨어졌다. 출항은 섬 전체의 파노라마보다 손과 발의 높이에서 기억된다.
그 흰 신발에 이별의 모든 뜻을 맡길 필요는 없다. 그것은 먼저 구술에 남은 작은 물건이다. 작은 물건이 중요해지는 까닭은, 역사적 이동이 실제로는 각자의 몸을 옮기는 일이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건너가는 사람에게 바다는 추상적인 경계가 아니었다.
〈선착장〉의 배와 뭍 사이에도 간격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그 출항의 기록화로 부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른 시간에 그려진 간격을 보며, 건넜던 거리와 건너지 못한 거리를 함께 생각한다. 기억은 그림의 정답이 아니라, 그림 곁으로 가져오는 하나의 시선이다.
빛만이 아니라 냄새도
구술의 아이는 부산에서 이미 일본에 온 줄 알았다. 냄새가 달랐기 때문이다. 노년의 화가는 그것을 기름 냄새, 문명의 냄새라고 불렀다. 눈으로 확인한 지명보다 코로 느낀 낯섦이 먼저였다. 유년의 세계는 아직 지도처럼 가지런하지 않았다.
이 장면은 풍토를 눈에 보이는 지역색으로만 줄이지 못하게 한다. 장소는 빛의 차이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냄새, 이동의 수고, 말을 알아듣는 일, 다른 사람에게 몸을 맡기는 순간이 함께 있다. 기억 속 장소는 그러한 관계들의 묶음으로 다시 나타난다.
유화는 냄새나 몸의 피로를 그대로 담는 용기가 아니다. 대신 화면의 가까움과 멂, 무거운 덩어리와 가는 선이 다른 감각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 회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유년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유년을 다시 느끼는 조건을 새로 만드는 일이다.
떠난 뒤에도 유년은 계속된다
서귀포를 떠난 일로 어린 시절 전체를 닫을 수는 없다. 오사카에서 자라며 배운 것들도 그 사람의 시간이 되었다. 고향의 감각만 진짜이고 이후의 배움은 남의 것이라고 나누면, 이동하며 형성된 한 사람의 삶이 둘로 잘린다. 유년은 한 장소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림 속 인물의 시선이 옆을 향한다고 해서 그 눈이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확정할 수도 없다. 시선의 방향은 보이지만 마음의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전기는 형상을 읽는 데 도움을 주어도, 형상 안의 모든 침묵을 대신 말해주는 목소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변시지의 유년을 읽는 더 넓은 방법은 여러 장소가 한 손 안에 남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 손은 처음 만진 것만 기억하는 손이 아니다. 보고 배운 것들을 다시 고르고, 예전에 좋았던 것을 다르게 그릴 수 있는 손이다. 기억과 배움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돌아온 눈의 두 시간
노년의 변시지는 남아 있는 고목을 보며 사라진 옛 풍경을 떠올리는 일을 말한다. 현재의 나무 하나가 기억 속 주변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 그가 설명한 마음의 풍경에는 현실에서 본 것과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이 함께 있다. 기억은 현재의 관찰을 떠나 혼자 일하지 않는다.
그때 돌아오는 것은 과거의 완전한 복원이 아니다. 나무를 보는 사람도 달라졌고 주변도 달라졌다. 남은 것을 보는 일과 사라진 것을 헤아리는 일이 한 화면에서 만난다. 오래된 풍경이 오늘의 몸을 지나 다시 그려진다는 점에서, 그림은 기억이면서 새로운 사건이다.
그래서 유년의 빛은 한 번 발견해 영원히 보관한 색이 아니다. 다시 볼 때마다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는 빛이다. 마른 풀잎색을 한 아이의 눈에 봉인된 고정값으로 읽기보다, 오래된 감각과 지금의 판단이 만나는 색으로 읽는 편이 더 풍부하다.
한 숟가락만큼 남은 것
유년을 예술의 유일한 원인으로 정하면 그림은 전기의 삽화가 된다. 그러나 유년을 지워버리면 작은 사물이 왜 오래 마음을 붙드는지 놓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원인을 확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림과 기억이 서로를 비추면서도 서로를 대신하지 않는 거리를 지키는 일이다.
화가의 기억을 읽고 나서 다시 말을 본다. 그 등은 더 이상 말이라는 이름만으로 지나칠 수 없는 자리다. 누군가를 실었을 몸, 자기 무게도 견뎌야 하는 몸이다. 그렇다고 그림 속 말에게 우리가 읽은 이야기를 모두 짊어지게 하지는 않는다.
구술의 작은 광에는 꿀단지가 있었다. 그 안에서 한 숟가락이 나왔다. 그림을 보고 책장을 덮은 뒤에도, 그 작은 분량은 마음 한편에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