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기법과 매체 · 54 / 100
반복과 차이
같은 이름의 것들이 다른 자리에 놓일 때
Repetition and Difference
목록은 같아도 그림은 다르다
집. 나무. 해. 배. 〈빈 집〉과 〈정오〉에서 같은 이름들을 적을 수 있다. 그러나 두 그림은 쉽게 겹쳐지지 않는다. 〈빈 집〉에는 넓고 환한 간격이 있고, 〈정오〉에는 짧은 획들이 겹겹이 움직인다. 같은 소재를 알아보는 일은 비교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반복을 자기복제라고 부르는 일은 너무 빠를 수 있다. 반대로 반복이라는 이유만으로 매번 새로운 세계가 생긴다고 칭찬하는 일도 빠르다. 어느 쪽이든 실제 작품 사이의 차이를 건너뛴다. 그림을 옆에 놓고 선의 방향과 몸의 위치, 비어 있는 면적부터 살펴야 한다.
이 장의 질문은 같은 것을 왜 또 그렸는가에만 있지 않다. 다시 그릴 때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 달라짐이 무엇을 가능하게 했는가를 함께 묻는다. 반복의 가치는 반복했다는 사실 밖에서, 각 화면의 관계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집의 자리와 획의 밀도
〈빈 집〉에서 집과 나무는 왼쪽에 모인다. 배와 해는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넓은 밝음이 남는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집은 더욱 또렷하게 눈에 남는다. 무엇이 빠졌는지를 단정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간격이 얼마나 긴지를 보게 된다.
〈정오〉에서는 바탕 곳곳의 획이 눈을 움직인다. 집과 나무 주변을 지나던 시선은 아래쪽의 작은 사람에게 닿는다. 빈 곳을 오래 건너는 대신, 많은 자국 사이에서 한 몸을 다시 찾아내는 셈이다. 소재가 반복되면서도 관객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달라진다.
1987년의 화면보다 2007년의 화면이 더 촘촘하다는 이 비교는, 말년으로 갈수록 언제나 비워졌다는 설명을 흔든다. 비움과 밀도는 한 방향의 계단이 아니다. 변시지는 적게 남긴 화면과 많은 획을 가진 화면을 통해 서로 다른 관계를 만들었다.
모네의 반복에도 화실의 시간이 있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은 빛과 대기의 변화를 살피는 중요한 비교 대상이다. 그러나 그를 자연의 시간표를 받아 적는 수동적인 관찰자로만 볼 수는 없다. 미국 국립미술관은 그가 현장에서 여러 캔버스를 오가며 작업한 뒤 지베르니 화실에서 그림들을 마무리했다고 설명한다.
현장에서 본 것과 화실에서 다시 판단한 것이 한 화면에 만난다. 이 점은 변시지의 구술과도 비교할 수 있다. 변시지 역시 밖에서 보고 익힌 뒤 집에서 자기 스타일로 옮기는 일을 강조했다. 한 사람은 바깥만, 다른 사람은 내면만 그렸다고 가를 수 없는 이유다.
차이는 그 왕복이 화면에서 어떤 형태를 얻었는지에 있다. 변시지의 집과 나무는 같은 장소를 그대로 측정한 표본이기보다, 기억과 관찰이 다시 배치되는 관계로 읽힌다. 모네와의 비교는 그를 앞서거나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 판단이 하는 일을 더 분명하게 해준다.
세잔의 산은 아무 산이 아니다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구조 실험에 쓰인 대체 가능한 대상으로만 설명하면 장소의 기억을 놓친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작품 해설은 그 풍경이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곳이며, 해당 그림의 시점이 누이의 집 부근과 연결된다고 밝힌다. 구조의 탐구와 장소의 친밀함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변시지의 제주도 사적인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곳은 아니다. 실제로 보고 익힌 집과 길, 달라지는 풍경을 다시 구성한 곳이다. 두 화가에게 장소는 관찰의 대상이면서 오래 돌아보게 하는 자리였다고 비교할 수 있다. 그 공통점 위에서 각자의 선과 색, 거리의 차이를 살핀다.
이렇게 비교하면 보편적인 서양과 특수한 동양이라는 구분을 서둘러 만들 필요가 없다. 한 장소를 깊이 보면서도 넓은 조형의 문제를 물을 수 있다. 변시지의 고유함은 제주의 이름을 고집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얻은 감각을 다른 것으로 쉽게 바꿀 수 없는 화면의 관계로 만든 데 있다.
차이는 칭찬이 아니라 질문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반복을 동일성의 확인으로만 읽지 않게 하는 철학적 참조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 회화의 차이가 입증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그 문제의식을 빌려, 익숙한 형상이 다시 놓일 때 무엇이 새로 드러나는지 묻는다.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선 하나의 기울기가 바뀌어도 관계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미세한 차이가 중요한 차이는 아니다. 그 변화가 시선을 어디로 옮기는지, 몸을 어떻게 보이게 하는지 살펴야 한다. 반복을 옹호하기 위해 모든 작품을 같은 높이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
〈빈 집〉과 〈정오〉의 차이는 단순히 연도가 다르다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이 있거나 없는 것, 넓은 바탕이 남거나 획으로 촘촘해지는 것, 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 차이를 만든다. 시간의 의미는 이런 구체적인 선택을 통해 화면에서 읽힌다.
마지막을 향한 한 줄이 아닌 것
〈마지막 작품〉의 넓은 간격을 알고 나면 앞선 그림들을 모두 그곳으로 가는 준비처럼 읽기 쉽다. 그러나 〈정오〉의 촘촘한 획은 그것만의 화면을 만든다. 후기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었다고 설명하면 이 풍부한 차이를 지우게 된다. 마지막 그림은 앞선 그림들의 정답지가 아니다.
몸을 작게 남기는 방법도 하나가 아니다. 넓은 바탕 가운데 작게 놓을 수도 있고, 많은 획 사이에서 작게 드러나게 할 수도 있다. 전자는 먼 거리에서 몸을 보고, 후자는 움직이는 면 속에서 몸을 찾아보게 한다. 둘의 감정은 분량의 많고 적음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반복은 이런 여러 가능성을 오래 시험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같은 소재가 익숙해질수록 작은 차이가 더 잘 보이지만, 익숙함 때문에 차이를 놓칠 수도 있다. 화가에게도 관객에게도 다시 본다는 일이 필요한 이유다. 아는 그림이라고 생각한 순간에도 눈은 새로 움직여야 한다.
다시 보는 일의 책임
여러 작품을 나란히 놓는 아카이브도 반복의 감각을 만든다. 같은 크기의 칸에 억지로 맞추고 일부를 잘라내면, 원래 달랐던 비례가 같아 보일 수 있다. 제목과 연도를 잘못 붙이면 변화의 순서도 달라진다. 반복을 읽기 위해서는 차이가 남을 수 있는 제시 방식이 필요하다.
비교할 때는 전체를 먼저 보고 필요한 부분을 가까이 본다. 부분만으로 전체의 성격을 결정하지 않는다. 화면의 밝기가 복제 과정에서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유념한다. 이런 확인은 감상을 방해하는 절차가 아니라, 같은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을 다시 다르게 만나는 조건이다.
반복을 존중한다는 것은 모든 반복을 칭찬한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작품에서 익숙한 관계가 다시 살아나는지, 어떤 작품에서는 관습적인 배치가 앞서는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질문을 허락할 때 변시지의 회화도 기념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계속 보는 작품으로 남는다.
처음의 그림으로 돌아가다
몇 점을 보고 나서 처음의 그림으로 돌아오면 눈의 순서가 달라진다. 먼저 지나쳤던 집의 크기가 보이고, 멀리 있던 배가 조금 더 오래 남는다. 그림이 바뀐 것은 아니다. 옆의 작품들을 본 시간이 감상 안에 들어온 것이다. 관객도 반복 속에서 달라진다.
이 달라짐이 화가의 제작 과정을 그대로 되살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가 보았던 모든 것을 보지 못한다. 다만 남은 작품 사이에서 하나의 선택이 다른 선택을 비추는 장면을 만난다. 동일한 소재가 이어주는 것은 같은 대답이 아니라, 다시 물어볼 수 있는 관계다.
다시 〈빈 집〉 앞이다. 나무는 집 위에 있고 배는 멀리 있다. 조금 전까지 눈을 채웠던 〈정오〉의 많은 획이 물러난다. 집 옆의 밝은 면이 천천히 넓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