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Ⅳ 기법과 매체

Ⅳ 기법과 매체 · 53 / 100

미완의 미학

멈춘 화면과 끝나지 않는 감상

The Aesthetics of the Unfinished

마지막 작품 / The Last Work · 2013. 아래쪽 왼편 작은 말과 땅의 윤곽, 위쪽의 태양과 먼 배, 넓게 남은 바탕. / A small horse and the outline of ground at lower left, a sun and distant boat above, and a broad open field.
〈마지막 작품〉 · 2013FŪDO 100
정오 / Noon · 2007. 촘촘한 짧은 획, 작은 집과 굽은 사람 사이의 짙은 나무. / Dense short marks surround a dark tree between a small house and a bent figure.
〈정오〉 · 2007FŪDO 012
풍랑 — 표면 부분 / Stormy Seas — Surface Detail · 1983
〈풍랑 — 표면 부분〉 · 1983FŪDO 067

거칠게 보이는 것과 끝내지 않은 것

〈마지막 작품〉에는 작은 말과 해, 먼 배와 해안의 선이 있다. 형상이 적고 둘레가 넓다고 해서 곧 미완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무엇이 더 있어야 하는지부터 묻기 전에, 이미 놓인 것들이 서로 어떤 간격을 만드는지 볼 필요가 있다. 적음은 부족함과 같은 말이 아니다.

반대로 적게 남겼다는 이유만으로 의도적인 완성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제작이 실제로 중단된 일과, 마무리된 작품이 열린 인상을 주는 일은 다르다. 제목과 화면의 느낌만으로 그 둘을 판정할 수 없다. 미완의 미학은 이 구별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더 세심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이 장에서는 세 가지를 나누어 본다. 제작이 끝났는가라는 기록의 문제, 표면이 얼마나 다듬어져 보이는가라는 형식의 문제, 감상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라는 경험의 문제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답을 대신하지 않을 때, 거친 획을 더 오래 바라볼 수 있다.

미완이라는 이름 아래의 다른 사정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Unfinished: Thoughts Left Visible》은 실제로 제작이 끝나지 않은 작품과, 작가가 열어둔 형식으로 남긴 작품을 구별했다. 죽음이나 다른 사정에 따른 중단과 의도적인 논피니토를 하나로 묶지 않은 것이다. 미완이라는 이름 아래에는 서로 다른 작업의 시간이 있다.

그 차이는 작품의 가치를 미리 정하지 않는다. 중단된 작품도 깊은 감상을 낳을 수 있다. 의도적으로 거칠게 마무리한 작품도 충분한 긴장을 만들지 못할 수 있다. 미완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으로 평가를 끝내지 말고, 그 상태에서 무엇이 실제로 보이는지 물어야 한다.

변시지의 후기 화면도 같은 태도로 볼 수 있다. 작은 형상과 넓은 바탕, 겹쳐진 획과 끊겨 보이는 선을 먼저 살핀다. 그것들이 하나의 화면으로 작동하는가. 어느 지점에서 더 그려야 한다는 기대가 생기고, 어느 지점에서 그 기대가 조용해지는가. 완성의 문제는 거기서 구체성을 얻는다.

돌에 남은 중단을 모두 의도라 부르지 않기

미켈란젤로의 미완 조각을 모두 완성 거부의 선언으로 설명하면 작업의 사정이 사라진다. 왕립미술원의 〈타데이 톤도〉 해설은 그가 다른 작업을 위해 로마로 떠나면서 작품을 남겼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거장이 끝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끝내지 않는 것을 원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중단된 표면에서 형상이 드러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이 그 상태를 좋아하는 일과 작가가 그 상태를 선택한 일은 구별해야 한다. 감상은 제작 의도의 빈칸을 채워 넣는 증언이 아니다. 오히려 두 시간이 다르게 남아 있음을 받아들일 때 비교가 더 깊어진다.

변시지와 나란히 놓을 때도 조각의 돌과 유화의 바탕을 같은 물질로 취급하지 않는다. 다만 형상이 둘레에서 어떻게 모습을 얻는지라는 질문을 함께 던질 수 있다. 한쪽의 답을 다른 쪽에 옮기는 대신, 같은 질문 앞에서 다른 재료가 만드는 차이를 보는 것이다.

완성을 바라던 화가

변시지의 구술에는 완성을 향한 말이 남아 있다. 그는 신중하게 진행하던 작업이 하나의 마무리와 완성 단계가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그의 거친 화면을 설명하며 완성 자체를 거부한 화가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가 물은 것은 완성을 버릴 것인가보다, 어떤 상태를 완성이라 할 것인가에 가까웠다.

그는 우연히 좋은 효과가 나왔어도 더 좋게 만들려다 그것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손댄 뒤에는 앞선 상태로 돌아가기도 어렵다고 했다. 이 경험에서 멈춤은 게으름도 무조건적인 용기도 아니다. 무엇이 살아 있는지 알아보고, 더하는 일이 그것을 해치는지 판단하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미완처럼 보이는 화면의 곁에는 계속 바라본 시간이 있을 수 있다. 덜 그린 양이 아니라, 더하지 않기로 한 판단을 읽는 것이다. 그 판단이 모든 작품에서 같았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한 작품에서는 다시 붓을 들고, 다른 작품에서는 남은 자리를 그대로 두었을 수 있다.

한 호흡처럼 보이는 선의 시간

〈풍랑〉의 부분을 보면 밝은 획과 짙은 자국이 고르게 채워지지 않은 채 겹친다. 그 틈에서 바탕이 드러나고 방향이 바뀐다. 이 효과를 갈필의 감각과 연결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복제 이미지의 거침만으로 물감의 배합이나 붓질의 횟수를 알아낼 수는 없다.

구술에서 그는 유화가 어느 정도 마르기를 기다린 뒤 다시 손대는 과정을 설명했다. 화면이 한 호흡처럼 이어져 보이는 것과, 실제로 중단 없이 단번에 제작된 것은 다르다. 이어짐은 오랜 조정 끝에 생길 수도 있다. 끊기지 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작업은 여러 번 멈추었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멈춤과 수정은 생동감의 적이 아니다. 언제 손을 대고 어느 흔적을 남길지에 따라 화면의 호흡이 달라진다. 거친 획을 진실, 매끄러운 획을 거짓으로 나눌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표면의 성격이 그 작품의 관계와 얼마나 긴밀하게 맞물리는가이다.

마지막이라는 제목 앞에서

〈마지막 작품〉이라는 제목은 보는 사람에게 특별한 기대를 만든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한 생애가 조용히 끝나는 장면을 찾게 한다. 그러나 그림에는 해와 배와 말, 해안의 선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 제목의 무게가 이 작은 차이들을 덮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이라는 사실은 제작 순서에 관한 말이다. 그것만으로 완결된 유언이나 의도적인 미완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서명의 유무도 단독으로 완성 상태를 판정해주지 않는다. 남은 자료와 실제 작품의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할 문제다. 감동은 이 확인을 대신할 수 없다.

그 구별을 지켜도 그림의 울림은 줄지 않는다. 작은 말이 놓인 땅과 먼 배 사이에 넓은 빛이 남는다. 무엇을 더 그리려 했는지 알 수 없더라도, 지금 남아 있는 간격을 볼 수 있다.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과 그림 앞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은 함께 성립한다.

관객이 이어가는 것

그림이 열려 있다는 말은 관객이 마음대로 고쳐 그려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어지는 것은 물감이 아니라 감상이다. 어떤 날에는 말의 작은 몸이 먼저 보이고, 다른 날에는 그 몸보다 먼 배가 눈에 들어올 수 있다. 같은 화면 안에서 주의의 순서가 바뀐다.

여백도 무엇이든 넣을 수 있는 빈칸과는 다르다. 옆에 있는 형상과 화면의 끝이 그 공간에 모양을 준다. 관객의 상상은 그 모양을 만나며 움직인다. 작품의 근거를 지우지 않고도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열려 있음은 아무런 제약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때 완성된 작품도 끝나지 않는 감상을 낳을 수 있다. 제작의 끝이 의미의 끝일 필요는 없다. 화가의 손이 물러난 뒤에도 관객의 눈은 다시 돌아온다. 미완의 미학을 작품의 결함으로만 이해하지 않게 하는 것은 이 두 종류의 끝을 구별하는 일이다.

서툶을 칭찬하기 전에

졸박하다는 말로 후기 작품을 읽을 때에도 확인할 것이 있다. 단순한 형상이 무슨 관계를 남기는가. 그 거침이 시선을 붙들어놓는가, 아니면 익숙한 효과에 그치는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생략이 깊어지지는 않는다. 한 작품의 힘은 그 화면에서 다시 확인해야 한다.

초기의 〈조랑말〉과 마지막 화면은 서로 다른 밀도를 가진다. 앞의 작품에는 두 몸과 여러 색이 있고, 뒤의 작품에는 작은 말과 넓은 간격이 있다. 한쪽을 미숙한 준비, 다른 쪽을 완전한 답으로 만들지 않고도 비교할 수 있다. 다른 시기에 다른 방식으로 몸의 자리를 만든 그림들이다.

고통과 쇠약을 예술의 필수 조건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작품이 깊다면 그것은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남은 재료와 형식이 실제로 관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껴야 할 것은 화가의 상처를 꾸민 신화가 아니라, 그가 남긴 화면의 구체적인 판단들이다.

덧붙이지 않은 뒤에도

미완은 언제나 완성보다 낫지 않고, 완성도 언제나 닫힌 상태는 아니다. 이 단순한 구별을 지키면 변시지의 화면을 더 자유롭게 볼 수 있다. 거친 획을 만나도 부족한 곳부터 찾지 않는다. 작은 형상을 보아도 모든 생애의 결론을 맡기지 않는다.

구술 속의 화가는 더 좋은 것을 바라면서도 이미 생긴 좋은 것을 잃지 않으려 했다. 계속하는 일과 그만두는 일 사이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 망설임은 작품을 약하게 만들기보다, 완성을 하나의 살아 있는 판단으로 되돌린다.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마지막 화면의 배는 아주 작다. 그 아래로 밝은 면이 내려오고, 낮은 곳에 말이 있다. 둘 사이에는 새 선이 놓이지 않는다. 눈만 한 번 더 건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