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기법과 매체 · 52 / 100
구도의 윤리학
누구에게 어떤 자리를 내어주는가
The Ethics of Composition
가운데 선 작은 사람
〈해촌〉에서 사람은 길 가운데에 있다. 왼쪽에는 고개를 낮춘 말, 오른쪽에는 머리를 든 소가 있다. 뒤로는 돌담과 집들이 이어진다. 가운데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작은 몸을 지나간 눈은 갈라지는 길과 돌담을 따라 다시 양쪽으로 움직인다.
이 장면에서 구도는 대상을 보기 좋게 정리하는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몸들 사이에 거리를 주고, 지나갈 곳과 머무는 곳을 나눈다. 관객이 먼저 누구를 보고 다음에는 어디로 눈을 옮길지도 바꾼다. 구도를 읽는다는 것은 화면 안에서 주의가 어떻게 배분되는지 살피는 일이다.
그 배분에서 윤리적 질문이 시작될 수 있다. 작은 존재는 단지 큰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가. 다른 몸의 자리는 남아 있는가. 그러나 아름다운 구도 하나가 곧 화가의 인격이나 사회 전체의 정의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 글이 묻는 윤리는 화면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관계의 방식에 가깝다.
높이는 서열이 아니다
〈돌담 위 까마귀〉에서 새들은 화면 아래쪽의 돌담을 따라 놓여 있다. 넓은 바다와 하늘이 그 위에 남는다. 이 작품만 보아도 까마귀가 언제나 화면 상단에 있다는 설명은 맞지 않는다. 높이 날 수 있는 새도 낮은 자리에 놓인다. 몸의 능력과 화면 속 위치는 같은 것이 아니다.
높이 있는 형상은 멀리 있어서 작아 보일 수 있고, 아래쪽의 형상은 가까이 있어서 먼저 눈에 들어올 수 있다. 높음과 낮음, 큼과 작음은 서로 다른 관계를 만든다. 그것을 곧바로 자유와 속박, 귀함과 천함의 표로 바꾸면 그림이 실제로 하고 있는 배치를 놓치게 된다.
돌담 위의 새 한 마리를 따라가면 시선은 곧 다른 새에게 닿는다. 그 사이에는 빈 돌이 있고, 다시 작은 검은 몸이 있다. 새들이 아래에 놓여 있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낮은 띠 하나가 넓은 화면을 바라보는 속도를 붙들고 있다.
수평선과 돌담이 하는 다른 일
수평선은 하늘과 먼 바다를 나눈다. 돌담은 가까운 땅의 구획을 만든다. 〈해촌〉에서는 이 서로 다른 선들이 한 화면 안에 있다. 수평선 아래를 모두 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다. 먼 배가 있는 물과 사람이 서 있는 길 사이에는 또 다른 거리가 놓인다.
돌담은 사람이 갈 길을 좁히면서 동물의 자리를 구분한다. 멀리 있는 수평선은 그런 세부를 정하지 않는다. 둘을 함께 보면 사는 곳의 질서와 그 바깥의 넓이가 겹쳐진다. 사람은 아무 제약 없는 빈 공간에 선 것이 아니라, 이미 나뉜 땅과 이어진 길 속에 있다.
구도의 윤리는 이 조건들을 지우지 않는 데에도 있다. 여백이 넓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열린 땅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림에 보이는 길과 담을 먼저 보고, 그 안에서 가까움과 떨어져 있음이 어떤 모양을 갖는지 묻는다. 공간은 빈 면적이기 전에 관계의 자리다.
붙어 있음과 떨어져 있음
〈풍랑〉의 사람과 말은 매우 가깝다. 서로의 윤곽이 가까이 놓여 작은 묶음을 이룬다. 반면 〈해촌〉의 사람과 동물들 사이에는 길과 돌담이 있다. 어느 쪽만이 동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까움은 접촉을 만들고, 거리는 각자의 몸이 있는 자리를 더 분명하게 한다.
한 화면에서는 거센 사선들이 작은 몸들을 에워싼다. 다른 화면에서는 돌담의 굽은 선들이 몸들 사이를 지난다. 사람과 말이라는 같은 소재를 쓰더라도 둘레의 선이 달라지면 관계가 달라진다. 구도는 등장인물의 수보다, 그들 사이에 무엇을 지나가게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동물을 사람의 위로로만 읽으면 중요한 것이 빠진다. 말과 소도 저마다 다른 방향을 가진다. 사람이 가운데에 있어도 그들의 고개가 모두 사람에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과 다른 존재의 관심까지 소유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형상만이 아니라 사이를 배치하기
마티스는 「화가의 노트」에서 표현을 얼굴의 격정이나 격렬한 동작에 한정하지 않았다. 인물의 자리, 그 둘레의 빈 공간, 비례를 포함한 전체 배치가 표현에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이 관점은 구도를 장식적인 정리와 구별하게 한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간격도 화면의 말에 속한다.
변시지의 그림에서도 작은 몸만 떼어 보면 놓치는 것이 있다. 말은 집에 얼마나 가까운가. 사람의 앞은 막혔는가, 열려 있는가. 화면 가장자리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인가. 이 질문들은 도상에 붙인 상징 이름보다 느리지만, 한 작품이 다른 작품과 달라지는 곳에 더 가까이 간다.
이 비교는 서양에는 채움만 있고 동양에는 비움만 있다는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화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형상과 간격을 다뤘다고 볼 수 있다. 변시지의 고유함은 그 질문을 제주의 낮은 집과 돌담, 작은 몸 사이에서 다시 구성한 데서 찾아야 한다.
보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해촌〉의 길은 화면 아래쪽에서 안으로 이어진다. 눈은 그 길을 따라 사람에게 가고, 그 뒤의 마을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관객이 그 세계를 모두 안다는 뜻은 아니다. 집 안은 보이지 않고, 담 뒤의 삶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림은 통로를 주면서도 알 수 없는 자리를 남긴다.
〈빈 집〉에서는 집이 있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 부재를 하나의 사연으로 채우기 전에 문과 나무, 먼 배를 볼 수 있다. 누가 떠났는지 모른다는 사실은 감상의 실패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자리가 집주인의 자리도,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자리도 아님을 알려준다.
구도가 관객을 안으로 이끈다고 해서 인물의 내면을 소유할 권리까지 주는 것은 아니다. 가까이 볼 수 있으나 다 알지는 못한다. 이 거리를 견디는 감상이 있다. 그림의 윤리는 무엇을 보여주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우리 마음대로 채우지 않게 하는가에서도 생길 수 있다.
되풀이되는 소재, 달라지는 비중
〈빈 집〉과 〈정오〉에는 집과 나무, 해와 배가 되풀이된다. 그러나 앞의 그림에서는 넓은 밝음이 남고, 뒤의 그림에서는 짧은 획들이 화면을 촘촘히 움직인다. 〈정오〉에는 작은 사람도 있다. 같은 소재의 목록만으로 두 작품의 구도를 설명할 수 없다.
관객에게 주어지는 일도 달라진다. 한쪽에서는 떨어진 형상 사이를 건너고, 다른 쪽에서는 많은 획 가운데 작은 몸을 찾아낸다. 단순히 더 비운 그림이 더 깊은 것이 아니다. 여백이 넓을 때와 좁을 때 각각 어떤 주의를 요구하는지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반복의 윤리는 같은 배치를 지킨 횟수로 입증되지 않는다. 익숙한 소재를 다시 놓으면서 관계를 얼마나 새롭게 살폈는가에 달려 있다. 작은 사람을 작은 채로 두되 지워버리지 않는 일. 나무를 크게 두되 그것만 보게 하지 않는 일. 화면마다 그 판단을 다시 해야 한다.
자리를 내어주는 그림
변시지의 구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차이가 사라진 평등의 풍경만이 아니다. 다르게 서고, 다르게 움직이고, 다른 거리를 가진 존재들이 함께 놓인다. 그 차이를 서열로 고정하지 않고 관계로 살펴보는 것. 구도의 윤리학은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림 한 점이 우리에게 올바른 삶의 규칙을 모두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다만 먼저 보던 것 옆에서 다른 존재를 보게 할 수 있다. 시선의 중심이 조금 옮겨지고, 비어 있다고 생각한 자리에 길이 드러난다. 배치가 바뀌면 주의가 바뀐다. 그 작은 이동을 가볍게 볼 필요는 없다.
〈해촌〉의 길 가운데에 사람이 있다. 왼쪽의 말은 고개를 낮추고, 오른쪽의 소는 머리를 들고 있다. 길은 그들을 한 줄로 세우지 않는다. 돌담을 따라 안쪽으로 굽어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