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Ⅳ 기법과 매체

Ⅳ 기법과 매체 · 51 / 100

색채의 온도

따뜻함이 곧 안온함은 아니다

The Temperature of Colour

열대의 태양 / The Tropical Sun · 1983
〈열대의 태양〉 · 1983FŪDO 008
가을 애련정 / Aeryeonjeong Pavilion in Autumn · 1965. 가을빛 나무와 정자, 아래로 비치는 연못. / A pavilion among autumn trees above a reflecting pond.
〈가을 애련정〉 · 1965FŪDO 036
조랑말 / Jeju Ponies · 1975. 바위 해안 가까이에 서로 다른 자세로 선 두 마리의 말. / Two ponies standing in different postures near a rocky shore.
〈조랑말〉 · 1975FŪDO 053

볕이 있는 곳에도 그늘은 남는다

〈열대의 태양〉을 보면 먼저 볕을 느낀다. 화면 위쪽에는 해가 있고, 그 둘레로 밝은 붓질이 번져 있다. 아래쪽의 말과 집은 짙은 나무 사이에 놓인다. 화면을 감싼 빛과 그 안의 작은 몸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처음의 밝음이 가라앉은 뒤에야 말의 다리가 보인다.

이 그림을 따뜻하다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볕을 받는다는 것과 쉬고 있다는 것은 다르다. 빛은 등을 덥힐 수도 있고 몸을 더 지치게 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 그림이 모두 설명해주지 않기에, 우리는 색을 본 뒤 다시 자세를 보게 된다.

변시지의 색채를 읽는 일은 이 두 번째 시선에서 깊어진다. 노란 계열의 색을 곧바로 위로로 번역하지 않는 것이다. 그 색 안에 누가 있고, 몸 둘레에 얼마나 자리가 남아 있으며, 어디에 어둠이 모이는가. 따뜻함은 색 이름 하나가 아니라 이 관계 속에서 생긴다.

온도계 없이 말하는 온도

여기서 온도는 감상의 말이다. 물감 표면의 온도나 광원의 색온도를 측정한 값이 아니다. 화면을 덥게 느낀다는 말과 그 앞에서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도 같지 않다. 이 차이를 남겨두어야 색채의 감각을 숫자처럼 단정하지 않을 수 있다.

칸딘스키는 색의 따뜻함과 차가움을 황색과 청색의 방향으로 설명하고, 색에 가까워짐과 멀어짐의 운동을 부여했다. 그의 논의는 색과 정신의 관계를 탐구하는 한 화가의 이론이다. 모든 관객에게 같은 반응을 요구하는 법칙으로 쓰기보다, 화면의 힘을 묻는 비교 언어로 읽을 수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서는 빛깔만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밝은 바탕에 작은 검은 형상이 놓이면서 시선이 멈추고, 다시 그 사이를 건넌다. 어떤 곳에서는 색이 넓게 펼쳐지고 다른 곳에서는 선이 길을 좁힌다. 감각의 온도는 이 오가는 움직임과 떨어져 있지 않다.

푸른 화면 안의 가을

〈가을 애련정〉에는 청록빛이 넓게 흐른다. 그러나 나뭇잎에는 노랗고 붉은 기운이 있고, 물에는 건물과 단풍의 빛이 내려와 있다. 푸르다는 이유만으로 차갑게 멀어지는 그림은 아니다. 정자의 기둥과 그 아래 반영 사이에 눈을 두면, 서로 다른 색이 같은 자리를 오래 붙들고 있다.

1975년의 〈조랑말〉에도 푸른빛과 분홍빛이 남아 있다. 두 말의 몸과 바위, 바다 가까운 공간이 그 빛을 나누어 가진다. 제주에 돌아온 해에 곧바로 모든 청색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장소를 옮긴 일과 색의 언어를 바꾼 일은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여정을 차가움에서 따뜻함으로 가는 한 줄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달라진 것은 색의 목록만이 아니다. 색을 나누어 쓰는 방식, 형상을 돋보이게 하는 정도, 서로 다른 존재를 같은 대기 안에 두는 방식이 함께 변했다. 온도라는 말도 이 변화들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

색을 알아보는 몸

마른 풀잎색이라는 이름에는 한때 푸르렀던 것이 남아 있다. 햇볕과 바람을 거친 표면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이 말을 쓴다고 화면의 모든 색을 같은 값으로 묶는 것은 아니다. 밝고 탁한 정도, 붉거나 회색으로 기우는 정도가 달라질 자리를 남긴다.

어떤 관객은 그 빛에서 오래된 방바닥을 떠올릴 수 있다. 다른 관객은 햇볕에 마른 언덕이나 바닷가의 오후를 생각할 수 있다. 같은 그림이 같은 기억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색과 몸의 만남은 국적 하나로 정해지지 않으며, 함께 자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를 수 있다.

온돌의 온기를 비유로 불러올 때에도 그렇다. 그것은 이 그림을 읽는 한 사람의 기억이지, 작품이 가진 일정한 온도가 아니다. 비유는 문을 열어주지만 모든 관객을 그 방에 살게 하지는 않는다. 말이 그림을 돕는 만큼, 그림이 그 말보다 넓게 남아 있어야 한다.

고흐의 노란색을 다시 보다

고흐의 노란색을 열병으로만 부르면 그의 색채가 좁아진다. 그는 〈침실〉을 설명한 편지에서 색의 구성을 통해 휴식과 잠을 느끼게 하고 싶다고 썼다. 노란 가구도 그 구성 안에 있었다. 강한 색이 언제나 격정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작가 자신의 구체적인 설명이다.

변시지와의 비교도 병든 열기와 건강한 온기의 대립일 필요가 없다. 한쪽에서는 방의 벽과 가구가 색을 나누고, 다른 쪽에서는 나무와 집, 말이 넓은 빛 속에 놓인다. 비교할 것은 사람의 건강이나 영혼의 우열이 아니라, 색이 몸의 자리를 어떻게 만드는가이다.

〈열대의 태양〉에는 누울 침대가 없다. 볕 아래 작은 집과 말이 있다. 그 차이 때문에 이 그림의 따뜻함은 실내의 안식과 같지 않다. 몸을 감싸는 빛과 몸을 드러내는 빛이 함께 있다. 우리는 그 밝음을 좋아하면서도, 그 안에 오래 서 있는 일을 생각하게 된다.

가까이 보는 색, 멀리 남는 형상

로스코의 색면을 규모로 관객을 압도하는 장치로만 설명할 수도 없다. 필립스 컬렉션의 로스코 룸은 친밀한 감상의 공간으로 마련되었고, 작가는 조명을 낮추고 벤치를 두는 문제에도 의견을 냈다. 색을 만나는 거리는 작품 크기뿐 아니라 머무는 자리와 빛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변시지를 가까이 보면 밝은 면 안의 짧은 획과 농담이 나타난다. 조금 물러나면 나무와 말의 관계가 다시 잡힌다. 이 왕복이 중요하다. 가까이에서 느낀 표면이 멀리서 보는 풍경 속으로 돌아가고, 작은 몸이 눈에 남으면 넓은 색도 달리 느껴진다.

화면이 작으면 언제나 더 친밀하고, 크면 언제나 더 위압적이라는 법은 없다. 작은 그림도 먼 거리를 품을 수 있다. 큰 그림도 한 몸 곁에 앉는 듯한 시간을 줄 수 있다. 색의 온도를 말하려면, 관객이 실제로 어느 자리에서 얼마나 오래 보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폭풍의 색을 위로로만 읽지 않기

〈풍랑〉에서는 사람과 말이 가까이 있다. 그 위의 집과 둘레의 사선은 화면을 불안하게 움직인다. 바탕이 따뜻한 계열이라는 이유로 이 몸들이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환한 면 때문에 작은 접촉이 더 또렷해지고, 그 가까움이 얼마나 좁은 자리인지 보인다.

이때 온기는 색 자체보다 곁에 있는 몸에서 올 수 있다. 그러나 그 곁이 폭풍을 끝내주지는 않는다. 위로와 위험이 함께 남아 있는 것이다. 변시지의 색을 감상적인 안식으로만 읽지 않을 때, 그 안의 작은 동행도 쉽게 주어진 행복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관계가 된다.

구술에서 변시지는 그리는 대상에 따라 같은 누런 톤도 조금씩 달라진다고 말했다. 이 설명은 색을 일정한 감정으로 고정하지 않게 한다. 볕이 강한 그림과 거친 바람을 느끼게 하는 그림에서 같은 계열의 색이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색은 같은 대답을 뜻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남는 온도

누군가 이 그림에서 온기를 느끼고, 다른 누군가는 볕에 마른 시간을 느낄 수 있다. 그 차이를 곧바로 맞고 틀림으로 가를 필요는 없다. 다만 무엇을 보고 그렇게 느꼈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색 옆의 선, 몸의 자세, 멀리 남은 배가 감상의 근거가 된다.

색채의 온도는 화가의 삶을 숫자로 바꾸는 일이 아니다. 그림과 몸 사이에 생기는 가까움과 거리의 이름이다. 그 가까움에는 그리움이 있을 수 있고, 거리에는 잠시 숨을 돌릴 자리가 있을 수 있다. 따뜻한 색도 우리를 멈춰 세우고, 푸른색도 오래 곁에 남을 수 있다.

다시 〈열대의 태양〉의 아래쪽을 본다. 말의 다리는 검은 선으로 땅에 닿아 있다. 그 옆에 밝은 자리가 조금 남아 있다. 위에서 내려온 볕이 거기까지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