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기법과 매체 · 50 / 100
빛의 사상
빛을 보고, 옮기고, 다시 만나는 일
Thinking through Light
해의 모양과 화면의 밝음
〈열대의 태양〉(1983)의 해는 왼쪽 위에 있다. 그 둘레에서 짧고 긴 자국들이 밖으로 뻗는다. 아래에는 짙은 나무와 집, 말 한 마리가 있다. 해를 알아보는 일과 화면이 밝다고 느끼는 일은 동시에 일어나지만 같지는 않다. 밝음은 작은 원에만 머물지 않고 주변의 색과 검은 가지 사이로 퍼진다.
〈정오〉(2007)의 해는 짙은 테두리로 나타난다. 그 원 자체가 화면에서 가장 환한 자리는 아니다. 밝은 바탕과 짧은 어두운 획들이 어울려 한낮의 인상을 만든다. 해의 형태가 빛을 설명하는 한 요소라면, 빛의 감각은 화면 전체가 함께 만드는 일이다.
여기서 세 가지를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화가가 밖에서 마주한 빛, 물감과 선으로 구성한 화면의 밝음, 보는 사람에게 생기는 빛의 느낌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지 않는다. 이 셋이 만나는 과정을 따라가면, 빛을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너무 빨리 갈라놓지 않게 된다.
해변에서 본 빛이 그림의 질문이 될 때
변시지는 구술에서 해변의 강한 햇빛 아래 흰 것이 누렇게 달라 보이는 현상을 보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주를 어떤 색으로 상징할지 생각하고, 누런 색조로 그림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관찰에서 착안으로, 착안에서 작업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빛은 단번에 작품이 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누런 톤이 조금씩 달라진다고 말했다. 이 진술은 그의 빛을 언제나 같은 황금빛으로 고정하는 설명과 거리를 둔다. 하나의 기조를 오래 붙잡았다는 것과 매번 같은 색으로 칠했다는 것은 다르다. 지속은 변화의 반대가 아니라 변화가 일어나는 범위가 될 수 있다.
빛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화풍을 설명할 수는 없다. 같은 빛 앞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본다. 화가는 본 것을 화면의 크기와 자국의 밀도, 밝고 어두운 부분의 관계로 옮겨야 한다. 풍토는 그 작업의 조건이지만 자동으로 완성된 양식을 내어주는 원인은 아니다.
검은 것들이 밝음을 지탱한다
〈열대의 태양〉에서 나무의 짙은 가지들을 잠시 가린다고 생각해보자. 넓은 누런 면은 남겠지만, 그 빛이 갈라지고 머무는 방식은 달라질 것이다. 검은 선은 밝음을 막는 적이 아니다. 가지의 틈과 몸의 윤곽을 따라 밝음이 구체적인 자리를 얻도록 한다.
〈정오〉에서도 나무의 검은 덩어리와 옅은 바탕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작은 인물의 몸은 주변보다 짙기 때문에 보이고, 그 몸 옆의 밝은 폭은 인물 때문에 좁고 가까운 자리로 느껴진다. 모든 것이 같은 강도로 빛나는 것이 아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밝음이 움직인다.
따라서 빛을 말하면서 명암을 없앨 필요는 없다. 색채가 제한되어도 밝고 어두운 관계는 남는다. 변시지의 화면이 하나의 대기로 느껴지는 것은 차이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차이들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읽을 수 있다. 통일은 균일함과 다르다.
모네의 빛도 화실을 통과했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을 순간의 빛을 그대로 붙잡은 기록으로만 보면 중요한 과정이 빠진다. 미국 국립미술관은 그가 1892~1893년 대성당을 그린 뒤 1894년 지베르니의 화실에서 화면들을 마무리했다고 설명한다. 변화하는 빛의 관찰과 작업실의 재구성이 함께 있었다.
이 사실은 모네와 변시지의 차이를 없애지 않는다. 다만 한쪽은 바깥빛을 베꼈고 다른 쪽은 내면의 빛을 만들었다는 대립을 멈추게 한다. 변시지 역시 현장에서 보고 익힌 뒤 자기 스타일로 옮기는 일을 강조했다. 두 화가를 나란히 놓는 출발점은 바깥과 안의 승부가 아니라, 본 것을 다시 만드는 방식이다.
그 출발점에서 변시지의 작은 태양을 다시 본다. 해가 있는 곳만이 아니라 집과 말 주위에도 누런 기조가 이어진다. 빛의 인상은 특정 순간의 광선 경로를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작은 것들이 같은 화면에서 서로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조건으로 넓어진다.
렘브란트의 얼굴에서 화면 전체로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렘브란트의 〈63세의 자화상〉에서 얼굴의 두터운 물감과 얇게 칠한 어두운 배경의 차이를 설명한다. 밝음은 명암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물감의 층과 질감으로도 만들어진다. 이런 구체적인 제작을 보면, 그의 빛을 모두 죄와 구원의 비유로 묶는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변시지에게 돌아오면 빛의 무게중심이 다르게 놓인다. 〈정오〉의 작은 얼굴보다 훨씬 넓은 부분에서 밝고 어두운 자국이 서로 움직인다. 인물의 내부를 환하게 밝혀 모든 뜻을 모으기보다, 인물 주변의 집과 나무와 바다를 함께 보게 한다. 이것은 위대한 얼굴의 빛을 넘어섰다는 말이 아니라, 주의가 분배되는 방식의 차이다.
한쪽의 그림에는 인간만 있고 다른 쪽에는 자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비교가 보여주는 것은 어느 자리에서 감상이 시작되고 어디로 옮겨가는가다. 얼굴에서 시작한 눈도 물감의 표면으로 갈 수 있다. 바다에서 시작한 눈도 작은 사람의 굽은 몸으로 돌아올 수 있다. 길이 다르다고 만남의 깊이를 서열로 만들 수는 없다.
안에서 빛난다는 말
그림이 안에서 빛나는 듯하다는 말은 감상의 경험을 잘 전할 때가 있다. 그러나 물감이 스스로 빛을 낸다는 뜻으로 옮길 수는 없다. 여기서 내광은 재료의 성분명이 아니라, 넓게 이어진 색과 밝고 어두운 자국이 보는 사람에게 만드는 인상을 가리키는 비유다.
그 비유를 살리려면 바깥빛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해변에서 본 강한 빛은 기억과 선택을 지나 화면으로 옮겨졌고, 그 화면은 다시 관객의 눈앞에서 빛의 느낌을 일으킨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안에서 다시 바깥으로 건너간다. 어느 한 방향만으로 이 왕복을 설명할 수 없다.
풍토의 빛은 이 왕복 속에서 회화의 빛이 된다. 태양의 세기만으로도, 화가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누런 기조를 어디까지 잇고, 검은 획을 어디에 놓고, 어느 밝은 틈을 남길 것인가. 이 작은 판단들이 쌓여 한 화면의 기후를 만든다.
같은 빛, 서로 다른 자리
〈열대의 태양〉의 말과 집과 나무는 가까운 색조 안에 있지만, 같은 밝기의 물체는 아니다. 검은 가지와 옅은 지면, 말의 등과 집의 어두운 입구는 다르게 보인다. 이 차이가 각자의 자리를 만든다. 함께 있다는 것은 각각의 모습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그림에서 평등을 읽고 싶다면, 모든 존재가 같은 세기로 빛난다는 증명보다 주의의 문제로 옮겨보는 편이 낫다. 작은 말도 오래 볼 수 있는가. 이름 없는 사람에게도 눈이 돌아오는가. 가장 어두운 형상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밝기는 가치의 순서를 대신하지 않는다.
이것은 작품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하나의 윤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앞에서 연습할 수 있는 태도다. 환한 곳만 쫓던 눈이 짙은 나뭇가지와 작은 몸을 함께 보게 되는 것. 빛을 얻는 일이 어둠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어둠 속의 형태까지 놓치지 않는 일이 되는 것.
빛을 설명한 뒤에도 그림이 남는다
형태를 줄이고 여백을 남기고 표면에 자국을 놓는 일은 빛과 따로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빛이라는 한 말로 대신할 수도 없다. 형태는 몸의 처지를 만들고, 간격은 거리를 만들며, 질감은 눈의 속도를 바꾼다. 빛은 이 서로 다른 일들이 함께 보이도록 하는 관계 속에서 느껴진다.
변시지의 빛을 오래 남는다고 느끼는 까닭도 영원한 성분을 발견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화면을 떠난 뒤에도 검은 가지 곁의 밝음과 작은 몸 주위의 누런 면이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실제 햇볕은 지나간다. 그림은 그 볕을 겪은 사람이 마련한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다시 건넨다.
해는 화면의 왼쪽 위에 있다. 아래에는 짙은 나무가 있다. 눈은 해를 보다가, 가지 사이에 남은 밝은 곳으로 내려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