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기법과 매체 · 49 / 100
질감의 언어
캔버스 위의 촉각
The Language of Texture
눈이 잠시 걸리는 곳
〈풍랑〉(1983)의 집 둘레에는 밝은 자국이 비스듬히 지나간다. 넓게 옅어진 곳 옆에 짧고 짙은 획이 놓이고, 그 사이로 바탕이 드러나 보인다. 눈은 한 번에 미끄러지지 않는다. 밝은 것에 걸렸다가 짙은 곳으로 옮겨간다. 질감은 이런 시선의 작은 멈춤에서도 시작된다.
거칠어 보이는 자리를 보며 손끝의 감각을 떠올릴 수 있다. 마른 풀을 쥐었을 때의 바스락거림이나 돌의 오돌토돌한 면 같은 것들이다. 실제 그림을 만진 것은 아니다. 보이는 자국이 이전의 촉감을 불러온 것이다. 눈과 손은 같은 감각이 아니지만, 한쪽이 다른 쪽의 기억을 깨울 수 있다.
이때 그림이 거칠다는 말에는 두 층위가 있다. 표면에 실제 요철이 있다는 뜻과, 눈에 거친 인상을 준다는 뜻이다. 둘은 겹칠 수 있지만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진으로 글을 쓸 때에는 우선 두 번째 층위에서 출발한다. 보이는 것을 섬세하게 적는 일과 재료를 판정하는 일은 다르다.
정교함 속에도 붓질은 있다
〈가을 애련정〉(1965)의 지붕과 기둥은 비교적 또렷하다. 그러나 나뭇잎과 물에 비친 모습은 작은 색의 차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 그림을 매끈한 기록이라고만 부르면, 정교한 구조 사이에서 움직이는 붓자국을 놓친다. 세밀함은 붓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붓질이 다른 방식으로 모인 상태일 수 있다.
〈풍랑〉에서는 그 자국들이 건물의 세부보다 크게 눈에 들어온다. 집 주변의 밝은 흐름과 짧은 어두운 획이 한꺼번에 대기를 흔든다. 비교의 핵심은 앞선 그림은 가짜로 매끈하고 뒤의 그림은 진실해서 거칠다는 데 있지 않다. 자국이 화면의 질서를 맡는 비중과 방식이 달라졌다는 데 있다.
이 변화는 재료의 단순한 교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같은 유화에서도 어느 자리를 조밀하게 모으고 어느 자리를 성기게 남길지는 달라질 수 있다. 화가의 손은 물감을 다루면서 시선의 속도도 다룬다. 그 속도가 달라지면 같은 크기의 화면도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마른 붓이라는 말의 범위
일반적인 기법 설명에서 드라이브러시는 적은 물감을 묻힌 마른 붓으로 성기거나 깃털 같은 자국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 말은 우선 붓과 도포의 상태를 설명한다. 유화의 기름 성분이 모두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보이는 갈필 효과를 물감의 화학적 조성과 바로 같게 놓지 않아야 한다.
〈풍랑〉의 부분 도판에서는 밝은 자국 안으로 가느다란 바탕의 결이 보이고, 옆에는 비교적 고른 색면이 있다. 서로 다른 밀도가 맞닿는다. 이 차이를 말하는 데 반드시 흙이나 모래가 섞였다는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눈앞의 표면은 이미 물감이 닿는 방식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선이 끊겨 보인다고 화가의 손이 그곳에서 멈췄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붓의 움직임이 이어져도 자국은 성길 수 있다. 반대로 하나로 보이는 선이 여러 번 손본 결과일 수도 있다. 질감을 읽는 눈은 행위의 흔적을 따라가되, 보이는 결과와 재구성한 제작 과정을 구별한다.
기다림도 표면을 만든다
구술에서 변시지는 유화가 어느 정도 마른 뒤 다시 손을 대는 일을 설명한다. 밑바탕과 구도를 마련하고 기다렸다가, 생각이 달라지면 다른 구도를 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완성된 자국이 거침없이 보인다고 제작이 단숨에 끝났던 것은 아니다. 표면에는 손이 움직인 시간과 움직이지 않은 시간이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는 칠하고 기다리고 다시 다루며, 잘 되지 않아 깎아내는 과정도 회고한다. 이 기록이 특정 작품의 모든 자국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질감을 힘차게 긋는 순간의 흔적으로만 보는 시선을 바꿔준다. 물감을 남기는 일만큼 이전에 놓인 것을 줄이는 일도 작업에 속해 있었다.
그렇다면 표면의 저항은 물리적인 마찰만이 아니다. 더 손대고 싶은 마음을 멈추게 하는 저항도 있다. 좋은 효과를 더 좋게 만들려다 잃어버릴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이 판단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질감에는 그린 흔적뿐 아니라, 더 그리지 않기로 한 자리도 함께 남는다.
흙을 닮은 것과 흙이 들어간 것
마른 풀잎색의 성긴 표면을 보며 마른 땅을 떠올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땅을 닮았다는 말에서 곧바로 흙을 섞었다는 결론으로 갈 수는 없다. 앞의 말은 감상의 비유이고, 뒤의 말은 재료에 관한 진술이다. 서로 다른 종류의 문장이므로 서로 다른 근거가 필요하다.
이번에 확인한 자료만으로 흙과 모래의 첨가를 사실로 적지는 않는다. 재료 기록이나 원화 조사 없이 그런 설명을 붙이면, 화가가 붓과 물감으로 만들어낸 효과를 실제 토양의 효과로 바꾸어버릴 수 있다. 물질에 가까이 가려는 글일수록 이 구별을 조심스럽게 지켜야 한다.
그 구별을 지켜도 풍토의 감각은 약해지지 않는다. 바람에 마른 것들의 성긴 결을 물감으로 느끼게 했다면, 그것도 충분히 중요한 성취다. 제주의 물질을 직접 옮겨야만 제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재료로 그곳의 감각을 다시 만드는 과정에 회화의 일이 있다.
손끝에서 돌아오는 기억
마른 풀잎색이라는 말에는 색뿐 아니라 촉감이 들어 있다. 부스러지는 듯한 가벼움과 바랜 표면, 손을 놓으면 흩어질 것 같은 성김이 함께 떠오른다. 이 비유는 색표의 한 칸을 지정하지 않는다. 빛과 마름과 시간이 한 표면에 남는 방식을 느끼게 한다.
장판지나 누룽지를 떠올리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억이 없는 독자에게 같은 연상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거친 천이나 햇볕에 바랜 나무를 떠올릴 수도 있다. 비유는 감각을 연결하는 다리이지, 반드시 가져야 할 고향의 기억을 검사하는 문턱이 아니다.
이렇게 들어온 기억도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기억 속의 마른 흙과 화면의 자국은 같지 않다. 〈풍랑〉의 밝은 면에는 비교적 고른 자리도 있고, 거친 자국 사이에 얇고 조용한 색도 있다. 질감은 한 가지 촉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촉감이 가까이 놓이는 방식에서 깊어진다.
복제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과 남겨두는 것
게티의 보존 담당자들은 낮은 각도에서 비추는 빛으로 회화 표면의 요철을 더 잘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빛을 달리하면 같은 표면도 다르게 드러난다. 일반적인 도판 한 장이 실제 두께와 광택을 모두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질감의 기록에는 촬영의 조건도 함께 필요하다.
여기 실은 부분 도판은 위치와 자국의 밀도를 살피기 위한 것이다. 확대해서 보이는 격자나 작은 얼룩을 곧바로 캔버스의 구조, 균열, 안료의 입자로 판정하지 않는다. 그런 판단에는 원본 해상도와 촬영 정보, 필요하다면 실제 표면의 확인이 따른다. 더 크게 보는 것과 더 많이 아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이 한계는 도판의 쓸모를 없애지 않는다. 전체와 부분을 오가며 눈이 어디에서 멈추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 멈춤을 재료의 확정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다. 작품의 표면을 존중하는 가장 가까운 태도는, 손을 대는 대신 충분히 보고 필요한 근거를 더 찾는 일일 수 있다.
거침은 진실의 보증이 아니다
거친 그림은 진실하고 매끈한 그림은 거짓이라는 기준은 필요하지 않다. 정교한 표면에도 오래 본 시간이 있을 수 있고, 거친 표면도 익숙한 효과의 반복에 머물 수 있다. 질감의 가치는 촉감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 표면이 그림의 거리와 무게, 빛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달려 있다.
변시지의 질감은 그가 만든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읽을 때 힘을 얻는다. 집 옆의 밝은 자국이 몸 가까이 흐르고, 짙은 선이 그 흐름을 붙잡는다. 바다는 보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눈이 지나야 할 표면이 된다. 우리는 풍경을 한 번 보고 끝내지 못하고, 그 풍경이 만들어진 자리를 다시 보게 된다.
밝은 자국 하나가 옅어지는 끝에서 바탕이 보인다. 그 옆에는 짙은 획이 남아 있다. 눈이 잠시 그 사이에 머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