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기법과 매체 · 48 / 100
안개의 존재론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
The Ontology of Fog
흐린 곳에도 세계는 있다
〈일몰〉(1975)에서는 둥근 해보다 넓게 퍼진 빛이 먼저 보인다. 옅은 분홍과 푸른 기운이 수평으로 겹치고, 왼쪽 벼랑 아래 작은 어둠들이 물가를 붙잡는다. 멀리 갈수록 큰 덩어리보다 짧은 자국이 남는다. 이 화면은 모든 사물을 똑같이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바다를 연다.
이를 안개라고 부르고 싶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옅게 보이는 원인은 그림만으로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 빛의 표현일 수도 있고, 색이 가까워진 결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을 먼저 붙이는 일이 아니다. 덜 분명한 곳에서도 우리는 무엇인가 계속 놓여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안개가 던지는 물음은 그 지점과 만난다. 내가 보지 못하면 그것도 없어진 것인가. 보이는 범위가 줄어들 때 세계까지 작아지는가. 그림 앞에서는 물음이 조금 바뀐다. 화가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그 설명 너머의 공간을 느끼게 하는가.
기상 현상과 회화의 효과
기상학에서 안개는 지표 부근 공기 중에 떠 있는 작은 물방울과 관련된 현상이다. 시야를 줄일 수 있지만 물체를 없애지는 않는다. 이 구별은 회화에도 도움이 된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 생략되어 그려지지 않은 것, 비슷한 색 때문에 잘 구분되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른 경우다.
〈흔들리는 수평선〉(2005)의 밝은 획들은 어두운 곶을 둘러싸며 비스듬히 움직인다. 우리는 그 흐름에서 파도와 물보라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을 전부 안개로 바꾸면 바다가 밀려오는 방향과 바위의 무게가 희미해진다. 부분적으로 보인다는 공통점이 서로 다른 자연 현상을 같은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화가의 마른 풀잎색도 하나의 기상 현상 이름으로 바꿀 수 없다. 그 색은 해와 바다를 함께 품을 수 있지만, 어느 한쪽에만 속하지 않는다. 기상 용어가 설명하는 것은 공기의 상태이고, 회화의 색이 만드는 것은 그 상태를 포함할 수 있는 화면의 관계다. 둘은 만날 수 있으나 겹쳐지지는 않는다.
드러나는 선과 물러나는 면
〈흔들리는 수평선〉의 오른쪽 곶 위에는 사람과 말의 작은 검은 형상이 있다. 주변의 물결은 넓고 흐르지만 그 몸들은 짙게 남는다. 화면 전체가 흐릿하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분명함과 흐림이 서로 맞물려, 작은 몸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한다.
멀리 놓인 배는 몇 획으로 보인다. 세부는 적지만 주변과의 차이 때문에 눈에 들어온다. 반대로 훨씬 큰 수면은 옅고 짙은 띠가 이어져 한 번에 붙잡히지 않는다. 작은 것이 또렷하고 큰 것이 펼쳐진다. 보이는 정도의 차이가 실제 크기와는 다른 주의의 질서를 만든다.
가려짐의 미학은 더 흐리게 그릴수록 더 깊어진다는 원리가 아니다. 어디를 분명히 남길지 정하는 일과 함께 있다. 모든 경계가 사라지면 가까움과 멂을 느낄 단서도 사라질 수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서는 사라진 경계만큼이나 끝내 남은 검은 획이 중요하다.
풍경 밖의 눈이 아니라, 풍경 앞의 몸
메를로-퐁티의 지각 철학은 세계를 아는 일을 세계와 관계 맺는 일에서 떼어놓지 않는 관점을 제공한다. 이 관점으로 안개를 생각하면, 보는 범위의 변화는 단순히 정보가 줄어드는 일이 아니다. 몸을 어디에 두고, 얼마나 다가가며, 무엇을 다시 확인할지 달라지는 일이 된다.
그림 앞에서도 눈은 고정된 창이 아니다. 가까이 가면 붓자국이 분리되고, 물러서면 바다가 모인다.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인물이 눈에 들어오고, 다시 멀리 보면 배가 작아진다. 그림은 움직이지 않지만, 그 앞의 몸이 이동하며 보는 관계를 바꾼다.
이것을 화가가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그렸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비교가 열어주는 것은 영향의 계보가 아니라 질문이다. 나는 그림의 모든 것을 한 번에 소유할 수 있는가. 보이는 부분을 따라 움직일 때에도, 보지 않은 부분이 계속 나의 시야를 둘러싸고 있지 않은가.
기억은 안개와 같기만 한 것이 아니다
먼 기억은 흐리고 가까운 기억은 분명하다는 비유는 익숙하다. 하지만 오래된 장면의 일부가 유난히 선명하게 남는 일도 있다. 회화의 생략을 기억의 쇠약으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다. 무엇은 사라지고 무엇은 돌아오는가. 그 선택적인 남음이 기억과 그림을 함께 생각할 실마리가 된다.
변시지는 구술에서 변해버린 풍경 속에 남은 고목을 보면 예전의 모습들이 연상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마음의 풍경은 아무 근거 없이 피어나는 안개가 아니다. 지금 눈앞의 사물이 기억을 여는 계기가 된다. 남아 있는 나무 하나가 없어진 주변까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화가는 현재와 과거를 그대로 겹쳐 찍는 것이 아니다. 본 것과 기억한 것을 자기 화면으로 옮긴다. 그림의 흐림도 선명함도 그 옮김의 결과로 살펴야 한다. 어떤 흔적이 희미하다는 이유만으로 먼 유년의 기억이라고 부르는 대신, 지금 화면에서 그 흔적이 맡은 일을 먼저 볼 수 있다.
모르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
작은 형상의 세부를 알 수 없어도, 그 형상이 큰 바다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 정확한 사연이 없어서 감상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다만 감동을 얻기 위해 사연을 만들어 사실처럼 붙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일몰〉의 작은 배들을 보며 돌아오는 길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화면이 그 배들의 출발지와 도착지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서 해설의 문체가 정해진다. 귀환이라고 단정하는 문장보다,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쓰는 문장이 그림의 열린 자리를 더 잘 보존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느낌을 늘 물러나게 할 필요는 없다. 분홍빛 수면이 오래 남고, 작은 배가 눈을 붙잡는 경험은 실제 감상의 일부다. 불확실한 것은 그림 앞에서 생긴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을 화가의 확정된 의도로 바꾸는 순간이다. 안개의 비유는 그 둘 사이에 거리를 남겨준다.
보는 조건을 함께 읽는다
복제 이미지로 볼 때에는 또 하나의 안개가 생길 수 있다. 작은 화면과 압축된 이미지, 밝기 설정이 세부를 흐리게 한다. 이것은 화가가 그린 흐림과 다르다. 어디가 안 보이는지 말할 때에는 작품의 성질과 우리가 보는 환경의 한계를 구별해야 한다.
〈흔들리는 수평선〉의 가느다란 배를 크게 볼수록 새로운 정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미 기록된 획이 넓어질 뿐일 수도 있다. 확대는 위치를 살피는 데 도움을 주지만, 없는 눈동자나 표정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더 가까이 본다는 것은 때로, 더는 말하지 않을 경계를 아는 일이기도 하다.
그 경계는 해석의 실패가 아니다. 보이는 것에 더 정확히 머물기 위한 자리다. 안개가 낀 길에서 보이는 만큼씩 발을 옮기듯, 그림 앞에서도 확인된 선에서 다음 선으로 간다. 멀리 있는 것을 모두 알지 못해도, 지금 눈앞에 있는 작은 형상은 더 또렷하게 만날 수 있다.
다시 나타나는 작은 배
안개를 통해 회화를 읽는다는 것은 모든 윤곽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보이는 것과 덜 보이는 것이 어떻게 함께 세계를 만드는지 살피는 일이다. 흐림을 신비의 증거로 삼지 않고, 선명함을 사물의 전부라고 믿지 않는 것. 그 사이에서 감상은 조금 더 느려진다.
〈일몰〉과 〈흔들리는 수평선〉은 같은 대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는 옅은 가로의 빛을 펼치고, 다른 하나는 짙은 곶 주위로 물결을 몰아간다. 이 차이를 보존할 때 안개라는 비교도 쓸모를 얻는다. 하나의 이름에 두 그림을 넣는 대신, 각각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남겨두는지 다시 묻게 한다.
옅은 수면을 따라 눈이 멀어졌다가 돌아온다. 작은 검은 획이 다시 배로 보인다. 그 너머의 물은 끝까지 펼쳐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