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Ⅳ 기법과 매체

Ⅳ 기법과 매체 · 47 / 100

여백의 말

바람이 사는 곳

What Empty Space Says

선착장 / The Landing · 1979. 뭍의 사람과 작은 배 사이에 넓게 남겨진 수면. / A stretch of water separates a figure on shore from a small boat.
〈선착장〉 · 1979FŪDO 078
정오 / Noon · 2007. 촘촘한 짧은 획, 작은 집과 굽은 사람 사이의 짙은 나무. / Dense short marks surround a dark tree between a small house and a bent figure.
〈정오〉 · 2007FŪDO 012

배와 선착장 사이

〈선착장〉(1979)의 검은 선은 화면을 길게 가른다. 그 아래에 배가 있고, 왼쪽에는 작은 인물이 있다. 먼저 보이는 것은 짙은 것들이다. 조금 더 보면 배와 선착장 사이에 남은 밝은 폭이 눈에 들어온다. 그 간격 때문에 배는 뭍과 하나가 되지 않는다. 가까움 속에 아직 건너야 할 자리가 남는다.

이 좁은 폭을 단순한 나머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배와 선착장을 붙여놓으면 장면의 긴장은 달라질 것이다. 배를 크게 하면 가까워지고, 작게 하면 더 멀어질 것이다. 아무것도 더 그리지 않은 곳이 그려진 것들의 관계를 바꾸고 있다. 여백은 이처럼 형상 사이에서 일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먼저 슬픔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가감일 수도 있고 기다림일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배와 뭍이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남는다. 감정은 그 거리 위에 뒤늦게 생긴다. 변시지의 여백을 읽는 일은 빈 곳의 의미를 채우기보다, 그곳이 어떤 거리를 만들고 있는지 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비어 있어도 칠해져 있다

이 그림의 넓은 바다는 손대지 않은 캔버스가 아니다. 누런 기조 안에 옅은 빛과 거친 자국이 놓인다. 형상이 적다는 말과 물감이 없다는 말은 다르다. 변시지의 여백은 종종 무엇을 더 그려 넣지 않은 자리이지만, 이미 색과 붓질이 충분히 일하고 있는 자리다.

여백이라는 말의 흰빛에 너무 묶일 필요는 없다. 흰 종이도 물질이고, 물감으로 덮인 곳도 여백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흰가 누런가가 아니라, 그 자리가 무엇을 떨어뜨리고 무엇을 이어주는가다. 바탕의 색이 이어지는 동안 검은 선은 장소를 나누고, 나뉜 장소들은 같은 대기 안에 남는다.

그래서 여백을 무의 공간으로만 읽으면 화면의 촉감이 빠진다. 눈은 물감의 옅고 짙음과 결을 따라 움직인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물로 채워지지 않은 바다를 본다. 비움은 물질의 소멸이 아니라, 물질이 다른 방식으로 주의를 얻는 일일 수 있다.

먹빛의 움직임과 종이의 고요함

제공된 육필원고 판독본의 「묵화」 부분에는 먹빛의 움직임과 종이의 흰빛이 이루는 고요함, 그리고 둘 사이의 리듬이 적혀 있다. 이 대목은 여백을 먹이 남긴 잔여로 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성질이 만날 때 충실한 조형 공간이 생긴다는 쪽으로 논의가 이어진다.

이 생각을 유화에 옮겨 읽을 때에도 둘의 차이는 남겨야 한다. 종이에 스미는 먹과 캔버스 위의 물감은 같지 않다. 그러나 한쪽만으로 그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물음은 이어질 수 있다. 선의 움직임을 느끼려면 그 움직임을 받아주는 자리가 필요하다. 고요함도 그저 멈춰 있는 것만은 아니다.

〈선착장〉의 긴 검은 띠 아래에서 밝은 수면을 다시 보면, 띠의 무게가 그 밝음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밝은 쪽도 검은 띠 덕분에 더 넓어 보인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먼저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둘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배가 놓일 거리가 열린다.

넓은 공백만이 여백은 아니다

〈정오〉(2007)는 획이 많다. 휘어진 짧은 붓자국들이 집과 나무와 인물의 주변을 채운다. 형상이 줄고 화면이 비어야만 후기 회화가 된다는 설명으로는 이 밀도를 놓친다. 이곳의 여백은 한 덩어리의 빈 면보다, 획과 획 사이를 지나가는 작은 밝은 틈에서 살아난다.

나무의 검은 덩어리 주위에서 붓자국의 흐름이 달라진다. 작은 인물의 굽은 몸 옆에는 밝은 자리가 붙어 있다. 그 밝음이 몸을 보이게 하고, 몸이 밝은 자리의 크기를 느끼게 한다. 여백은 화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이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차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작품을 자를 때는 인물과 나무만 보존한다고 충분하지 않다. 둘 사이의 밝은 틈을 좁히면 몸의 숨이 달라진다. 원래 있던 가장자리를 잘라내면 작은 배가 멀리 있는 방식도 달라진다. 여백을 존중한다는 것은 아름답게 빈 화면을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작품이 정한 간격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도하쿠의 안개와 나란히 보기

하세가와 도하쿠의 〈송림도〉를 설명하며 도쿄국립박물관은 먹의 농담으로 나타나는 소나무와 안개를 짚는다. 나무가 또렷한 부분과 엷어지는 부분 사이에서 공간이 열린다. 이 사례는 여백이 단지 남겨진 흰 면이 아니라, 보이는 정도의 차이와 함께 작동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변시지의 바다를 그 안개와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선착장〉의 짙은 띠는 비교적 분명하고, 배도 검은 형상을 유지한다. 이 화면의 간격은 형상이 사라지기 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형상을 분명히 남겨놓고도 그 사이를 쉽게 건널 수 없게 하는 데서 생긴다.

비교는 누가 더 많이 비웠는지를 정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는 옅어짐을 통해, 다른 하나는 짙은 것들의 떨어짐을 통해 공간을 열 수 있다. 도하쿠의 작품을 직접적인 영향의 증거로 놓지 않아도, 이 차이를 통해 변시지의 여백은 더 구체적으로 보인다. 닮은 말보다 다른 작동을 찾는 편이 도움이 된다.

잴 수 없어도 거리는 있다

선착장과 배 사이가 몇 미터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배의 크기와 겹침, 선의 높이, 밝은 수면의 폭이 가까움과 멂을 만든다. 지도처럼 측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공간이 무한이 되는 것도 아니다. 화면은 구체적인 단서로 우리 눈의 움직임을 이끈다.

원근법이 있으면 닫힌 공간이고 없으면 열린 공간이라는 구분도 충분하지 않다. 어떤 그림에서는 정확한 원근이 먼 곳을 그리워하게 하고, 어떤 그림에서는 평평한 면이 길을 막는다. 변시지의 여백 역시 열림과 막힘을 함께 지닐 수 있다. 다가갈 듯하다가도 끝내 건너지 못한 자리가 된다.

이때 보는 사람의 몸은 그림 밖에 있지만, 눈은 거리의 크기를 더듬는다. 배까지 가는 길을 마음속에서 헤아려본다. 화면 속으로 실제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에 서 있는 내 몸의 작음과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잠시 새롭게 느껴진다. 여백은 이런 몸의 상상을 불러올 수 있다.

채우지 않고 머무는 시간

넓은 면 앞에서 눈이 반드시 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고요함을 느끼고, 다른 이는 막막함을 느낀다. 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도, 잠깐 멈춘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여백은 하나의 정서를 보장하지 않는다. 다만 감정이 생길 시간을 서둘러 설명으로 닫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해석이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배와 뭍 사이의 간격을 무시한 읽기와, 그 간격에서 출발한 읽기는 다르다. 여백은 무엇이든 넣을 수 있는 백지가 아니다. 이미 그려진 것들이 빈 곳의 방향을 정하고 있다. 자유롭게 보되, 그림이 놓아둔 거리로 돌아오는 일이 필요하다.

화가도 빈 곳 앞에서 기다렸을 수 있다. 구술에는 밑바탕과 구도를 잡은 뒤, 마르기를 기다리고 다시 보는 작업이 나온다. 이 기록을 어느 한 작품의 제작 순서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비워 보이는 면에도 선택과 기다림의 시간이 있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말을 덜어낸 자리에

선은 무엇이 놓였는지 보여준다. 여백은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놓였는지 느끼게 한다. 형태를 덜어낸 다음 남은 공간이 아니라, 형태를 정할 때부터 함께 정해지는 공간이다. 이 둘을 따로 셀 수 있어도 감상에서는 떼어낼 수 없다. 작은 배가 먼 것은 배 혼자 만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백의 말은 침묵이 모든 언어보다 높다는 선언이 아니다. 말이 너무 일찍 도착하면 놓치게 되는 관계를 잠시 돌보는 일이다. 고독이라는 말 전에 떨어진 배를 본다. 바람이라는 말 전에 나무와 인물 옆의 밝은 틈을 본다. 이름은 그다음에 와도 늦지 않다.

배는 선착장 아래에 있다. 둘 사이에 밝은 물이 남아 있다. 눈은 그 좁은 곳을 한 번 더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