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기법과 매체 · 46 / 100
형태의 단순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
The Simplification of Form
두 마리의 말에서 시작한다
〈조랑말〉(1975)에는 두 마리가 있다. 앞쪽 말은 고개를 낮추고, 뒤쪽 말은 목을 세운다. 푸른 기운이 도는 몸 둘레에 붉고 옅은 붓자국이 놓여 있다. 같은 종류의 동물인데도 자세가 다르다. 화가는 말을 알아볼 수 있게 그리면서, 두 몸이 서로 같아지지 않게 두었다.
〈마지막 작품〉(2013)에서는 말이 몇 개의 짙은 획으로 남는다. 그러나 말만 남은 것은 아니다. 해안선이 꺾이고, 위에는 해와 작은 배가 있다. 두 그림의 차이는 세부의 수만으로 셀 수 없다. 말의 몸에 있던 정보 일부를 이제는 몸 주위의 넓은 간격이 맡고 있다.
이때 단순화는 작게 요약하는 일이 아니다. 어디에 무게를 둘지 바꾸는 일이다. 털을 자세히 그리지 않아도, 발이 닿는 땅과 머리가 향하는 쪽은 남길 수 있다. 적게 그린다는 말보다 더 중요한 물음은 이것이다. 무엇을 덜어냈을 때에도 그 몸이 여전히 살아 있는가.
형태는 윤곽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말의 형상을 오려내어 흰 바탕에 놓는다고 생각해보자. 같은 선이라도 인상이 달라질 것이다. 몸의 크기를 받아주던 바다와, 머리 위에 놓인 해와, 멀리 떨어진 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형태는 윤곽 안의 모습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떨어져 있는 방식까지 포함한다.
다리가 길거나 등이 굽어 보일 때, 곧바로 실제 몸의 상태를 진단할 수는 없다. 화폭의 비례와 선의 방향이 몸의 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몸의 굽음에서 견딤을 느낄 수는 있다. 다만 그것을 모든 인물에게 붙는 병명이나 하나의 감정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다.
변형을 읽는 일은 정확한 몸과 틀린 몸을 가르는 일이 아니다. 어떤 선이 다른 선과 만나는지, 그 만남이 몸을 어디로 기울이는지 보는 일이다. 한쪽을 길게 하면 다른 쪽이 짧아 보인다. 작은 몸도 주변을 넓게 두면 더 무겁게 남는다. 형태의 힘은 이 관계 속에서 생긴다.
세잔에게도 그곳의 산이 있었다
세잔을 장소와 감정을 지운 기하학의 화가로만 놓으면 비교가 좁아진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생트빅투아르 산과 아르크 강 계곡의 고가교〉 해설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알던 풍경을 다뤘음을 짚는다. 누이의 집 부근에서 본 산이다. 구조의 탐구는 오래 알고 지낸 장소와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잔의 차가움과 변시지의 따뜻함을 겨루게 할 필요가 없다. 물을 것은 각자가 되풀이해 본 장소를 어떤 관계로 세웠는가다. 산과 길의 방향을 맞추는 일도, 말과 먼 배 사이의 거리를 남기는 일도,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판단이다. 한쪽만 삶이고 다른 쪽은 기하학이라고 나눌 수 없다.
변시지의 차이는 그의 화면에서 찾을 수 있다. 〈마지막 작품〉의 말은 넓은 물빛을 작게 가로막는다. 가느다란 해안선은 그 몸이 딛는 쪽과 배가 놓인 쪽을 나눈다. 단순한 선인데도 두 자리가 같아지지 않는다. 적은 형상이 서로의 처지를 드러내는 것. 여기서 그의 단순화는 고유한 힘을 얻는다.
기억은 관찰을 없애지 않는다
변시지는 구술에서 현장을 많이 보고 익힌 뒤 집에서 그리는 과정을 설명했다. 눈으로 익힌 것은 그대로 복사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타일로 옮겨진다고 했다. 기억으로 그린다는 사실이 관찰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가부터 이미 보는 훈련과 이어져 있다.
이 말을 따라가면 초기의 묘사와 후기의 생략 사이에 다른 길이 보인다. 처음에는 외형만 배웠고 나중에야 내면을 얻었다는 길이 아니다. 보아온 것 중 무엇이 오래 남는지, 그 남은 것을 어느 크기와 방향으로 옮길지 다시 판단하는 길이다. 솜씨는 사라지는 대신 역할을 바꿀 수 있다.
〈조랑말〉의 두 몸과 마지막 화면의 작은 말을 나란히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앞선 그림을 뒤의 그림을 위한 연습으로 낮추지 않기 위해서다. 두 그림은 저마다 다른 일을 한다. 하나에서는 두 자세의 차이가 가까이 보이고, 다른 하나에서는 한 몸과 먼 세계의 간격이 오래 남는다.
알아볼 수 있음과 다 알 수 있음
단순해진 말은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려는지, 누구를 기다리는지까지 알 수는 없다. 식별과 설명은 다른 일이다. 말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상이 끝난다면, 그 몸이 놓인 풍경은 읽히지 않는다. 이름을 안 뒤에도 보아야 할 것이 남는 형상. 그것이 도상을 도식과 갈라놓는다.
얼굴의 세부가 줄었다고 개별적인 삶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으로 숙였는지, 다른 몸과 얼마나 가까운지, 발 앞에 무엇이 놓였는지에 따라 그 인상은 달라진다. 보편적인 인간상을 말할 때에도 이 작은 차이들을 지우지 않아야 한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형상과 아무 차이도 없는 형상은 다르다.
반대로, 생략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더 깊은 그림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접점까지 없어지면 몸은 뜨고, 간격의 차이까지 지워지면 세계는 밋밋해질 수 있다. 단순화의 성취는 얼마나 적게 그렸는가로 정해지지 않는다. 적어진 것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에 달려 있다.
되풀이되는 것은 사전이 아니다
말, 집, 배, 나무가 되풀이되면 관객은 화가의 어휘를 익힌다. 그러나 말은 위로, 배는 이별, 집은 귀환이라는 식의 대응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같은 배도 집에 가까울 때와 먼 수평선 아래에 놓일 때 다르게 느껴진다. 반복되는 것은 단어일 수 있지만, 그림마다 문장은 달라진다.
〈조랑말〉에서는 사람 없이 두 말이 서로 가까이 있다. 〈마지막 작품〉에서는 작은 말과 배 사이에 넓은 색면이 놓인다. 이 차이를 지우고 둘 다 화가의 고독이라고만 부르면, 그림이 실제로 달리 마련한 관계를 놓친다. 해석은 반복을 알아보되 변화를 더 오래 보아야 한다.
풍토 역시 고정된 표지가 아니다. 초가집이 있으면 제주이고 없으면 제주가 아닌 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낮은 몸과 넓은 수면, 서로 비껴 놓인 것들이 만드는 거리 속에서도 장소의 감각이 생긴다. 소재를 알아보는 일에서 그 소재들이 함께 살아갈 자리를 보는 일로 눈이 옮겨간다.
마지막 화면을 끝의 공식으로 만들지 않는다
마지막이라는 제목은 우리의 눈을 서두르게 한다. 모든 것이 사라져 점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화면에는 분명 말과 배와 해, 해안선이 있다. 끝의 의미를 얻으려고 남아 있는 것들을 다시 지울 수는 없다. 적은 것과 아무것도 없는 것은 다르다.
작은 말의 등과 해안의 꺾임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이다. 하나는 몸을 묶고 다른 하나는 자리를 나눈다. 그 위의 작은 배는 또 다른 거리의 척도가 된다. 형상은 적지만 해야 할 일이 나뉘어 있다. 생략은 모든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남은 차이를 더 크게 느끼게 한다.
따라서 마지막 작품을 완벽한 단순화의 유일한 정답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그 앞에 있는 많은 그림은 각자의 밀도와 복잡함을 지닌 채 남는다. 마지막 그림은 그 세계를 폐기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간격으로 다시 놓는다. 끝에 이르러서도 세계는 한 가지 모양으로 닫히지 않는다.
지워서는 안 되는 것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무엇을 잃을 수 없는가라는 물음이 따라온다. 장식은 덜어낼 수 있어도 몸의 처지를 만드는 관계까지 덜어낼 수는 없다. 변시지의 단순화에서 읽을 것은 추상에 도달하지 못한 잔여가 아니다. 적은 형태로도 서로의 거리가 살아 있게 한 선택이다.
그 선택 앞에서 관객도 덜어낼 것이 있다. 고독, 위안, 달관이라는 말을 서둘러 붙이는 습관이다. 말을 잠시 늦추면 선의 두께와 몸의 방향이 돌아온다. 보편적인 뜻으로 옮기기 전에, 이 그림에서만 생기는 작은 어긋남을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래에는 작은 말이 있다. 위에는 배 한 척이 있다. 그 사이를 무엇으로도 채우지 않은 채, 눈은 해안선의 꺾인 곳으로 돌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