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기법과 매체 · 45 / 100
선을 배우라
보는 눈과 고치는 손 사이
Learn the Line
손보다 먼저 살펴야 할 것
〈가을 애련정〉(1965)의 기둥과 난간은 작은 차이로 구별된다. 지붕 아래의 어두움과 기둥의 밝음, 물에 비친 형상의 흔들림이 함께 있다. 여기서 선을 배운다는 것은 윤곽을 정확하게 따라가는 일에만 머물지 않는다. 어느 선이 구조를 세우고 어느 색의 경계가 선처럼 보이는지 살피는 일도 포함한다.
〈정오〉(2007)의 굽은 획들은 다른 일을 한다. 작은 집과 나무, 사람의 둘레를 지나며 화면의 여러 곳을 움직이는 듯한 결로 잇는다. 두 그림의 선을 정밀함과 거침으로만 나누면 그 사이의 배움을 놓친다. 바뀐 것은 손의 능력만이 아니라, 선에게 맡긴 일이다.
그러므로 선을 배운다는 말에는 질문이 먼저 있다. 이번 선은 무엇을 알아보게 하고, 눈을 어디로 보내며, 어느 밝은 자리를 남기는가. 답을 모른 채 거친 획을 흉내 내면 거침만 남을 수 있다. 표면의 닮음보다 선이 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다른 그림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연다.
기억으로 그린다는 것은 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변시지는 구술에서 현장에서 많이 보고 익히는 훈련을 강조한다. 비원에서 기와와 난간을 세어가며 그렸고, 뒤에는 보지 않고도 옮길 만큼 머릿속에 담았다고 설명한다. 기억은 관찰을 생략하는 지름길이 아니었다. 관찰한 것을 다시 불러올 수 있게 하는 오랜 연습의 결과였다.
제주의 폭풍 그림에 대해서도 그는 실제 장면을 보고 익힌 다음 집에서 그렸다고 말한다. 현장에서 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현실 경험과의 단절을 뜻하지는 않는다. 보는 장소와 그리는 장소 사이에 기억과 판단의 시간이 들어온다. 그림은 그 간격에서 현장의 복사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그는 본 것을 자기 스타일로 옮긴다고 설명한다. 눈앞의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만이 훈련의 목적은 아니었던 셈이다. 기억에 남은 구조를 꺼내면서 비례와 색, 선의 역할을 다시 정한다. 보는 눈과 상상하는 눈을 따로 가두지 않을 때, 관찰은 표현의 반대말이 아니라 표현을 지탱하는 일이 된다.
앵그르와 드가를 다시 읽는 이유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드가가 1855년 앵그르를 만나 자연과 기억을 통해 선을 그리라는 조언을 받은 일을 소개한다. 이 비교에서 중요한 것은 정밀한 데생만을 배우라는 명령이 아니라 관찰과 기억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이다. 변시지의 구술 역시 두 활동을 갈라놓지 않는다. 직접적인 영향의 경로를 확정하기 전에, 서로 닮은 배움의 질문을 볼 수 있다.
같은 미술관의 드가 무용수 그림 해설은 작업실에서 관찰과 기억을 결합하고 여러 구성을 되풀이해 시험한 과정을 설명한다. 움직임을 그렸다고 모두 현장에서 한순간에 붙잡은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변시지의 바람에도 질문을 돌려준다. 격렬하게 보이는 화면이 반드시 격렬한 한순간에 제작되었을 필요는 없다.
이 비교는 앵그르는 정지, 드가는 운동, 변시지는 힘이라는 세 칸으로 닫히지 않는다. 각 작가의 선에는 구조와 움직임, 선택과 수정이 함께 있을 수 있다. 변시지의 고유한 문제는 그 요소들이 제주라는 생활과 만나 어떤 관계로 바뀌었는가다. 계보를 만든다는 것은 차이를 지우는 일도, 앞선 화가를 넘어섰다고 선언하는 일도 아니다.
붓이 닿는 동안 달라지는 생각
마음에 있는 것을 손이 그대로 옮기기만 한다고 보면 재료의 몫이 사라진다. 같은 움직임을 해도 붓에 묻은 양과 표면의 상태에 따라 다른 자국이 생길 수 있다. 뜻한 것과 생긴 것 사이의 작은 차이를 보며 다음 움직임을 고른다. 그리는 일은 먼저 정한 명령을 끝까지 실행하는 것만은 아니다.
〈정오〉의 획들은 굵기와 길이, 밝은 틈을 남기는 방식이 다르다. 같은 곡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복사한 무늬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차이를 보면서 우리는 손과 표면 사이에 조절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다만 완성된 복제 이미지에서 붓의 정확한 속도나 압력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손이 마음을 따른다는 말은 이렇게 넓어질 수 있다. 손이 남긴 것을 눈이 다시 보고 마음도 판단을 바꾸는 것이다. 일방적인 전달보다 되돌아오는 관계다. 뜻을 세우는 능력과 생긴 차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함께 필요하다. 자기 선은 어느 하나를 끝까지 고집하는 데서만 나오지 않는다.
멈춤도 선을 배우는 시간이다
선이 살아 있으려면 한 번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설명은 구술과 맞지 않는다. 변시지는 바탕을 칠해놓고 다음에 다시 손대는 일, 생각이 달라져 구도를 새로 잡는 일을 말한다. 완성된 그림에는 그 기다림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시간도 제작의 일부다.
멈춘다는 것은 이미 그어진 선을 다시 보겠다는 뜻일 수 있다. 가까이서는 힘 있게 보이던 획이 조금 떨어져 보면 집의 크기를 흐트러뜨릴 수 있다. 반대로 약해 보이던 선이 넓은 바탕에서는 충분히 작용할 수 있다. 눈의 거리를 바꾸는 작은 중단이 다음 붓질의 이유를 바꾼다.
이때 느림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변시지도 오래 그렸다고 좋은 작품이고 빨리 그렸다고 나쁜 작품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필요한 시간은 그림마다 다를 수 있다. 훈련은 빨리 끝내는 능력만도 오래 버티는 능력만도 아니라,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는 능력을 포함한다.
고치는 손과 더하지 않는 손
구술에는 우연히 좋은 것이 나왔는데 더 잘하려고 손대다 그것을 잃을 수 있다는 설명이 있다. 이것은 모든 수정을 금하라는 말과 다르다. 이미 생긴 장점을 알아보지 못한 채 계속 덧대는 일을 경계하는 말이다. 무엇을 고칠지 아는 눈과 무엇을 건드리지 않을지 아는 눈은 같은 그림 앞에서 함께 필요하다.
수정이 가능하다고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손대기 전으로 돌리고 싶어도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말한다. 유화가 다시 칠할 수 있는 재료라는 사실과, 지나간 효과를 똑같이 회복하기 어렵다는 경험이 함께 있다. 가능성과 되돌릴 수 없음이 한 작업 안에 공존한다.
선을 배우는 일에는 덜 그리는 판단도 들어간다. 그러나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 것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어떤 선은 관계를 세우기 위해 필요하고, 어떤 선은 이미 있는 관계를 가린다. 멈추거나 잇는 이유가 화면에서 생겨야 한다. 적게 그렸다는 사실만으로 절제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따라 그리기에서 다르게 보기로
여기서 독자를 위한 연습 하나를 제안할 수 있다. 한 나무를 보고 한 번 그린 뒤, 그림을 가리고 기억으로 다시 그려보는 것이다. 두 번째가 첫 번째보다 낫다고 미리 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잊었고 무엇이 남았는지 비교한다. 이것은 화가의 수업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그의 관찰과 기억에 관한 말을 바탕으로 제안하는 오늘의 연습이다.
다음에는 같은 선을 더 짙게 만드는 대신 그 옆의 빈 곳을 살펴볼 수 있다. 줄기와 가지 사이가 너무 좁은지, 나무와 집 사이에 눈이 지나갈 곳이 있는지 보는 것이다. 선의 연습이 선 바깥의 관찰로 이어진다. 잘 그은 획 하나보다 그 획이 놓인 자리가 그림을 더 크게 바꿀 수 있다.
이런 연습이 변시지와 같은 화풍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배울 수 있는 것은 특정한 거침을 복제하는 공식보다, 보고 기억하고 비교하며 고치는 태도다. 각자의 몸과 도구, 살아가는 장소가 다르므로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 전승은 같은 선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 다른 선이 제 역할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배움이 남긴 다음 자리
선을 기술이 아니라 삶이라고만 말하면 기술의 오랜 시간이 지워진다. 반대로 기술만이라고 하면 그 기술을 어디에 쓸지 고르는 생활이 빠진다. 변시지의 구술에는 보는 훈련과 장소의 경험, 마르는 물감과 다시 고치는 판단이 함께 있다. 삶과 기술을 갈라놓지 않을 때 선은 추상적인 덕목보다 실제 행위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행위가 만든 형상은 다시 여백과 관계를 맺는다. 선을 배우는 문제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리지 않은 곳을 어떻게 둘 것인가라는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손이 쉬는 자리까지 그림에 들어온다. 배움은 모든 획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순간보다, 이미 놓인 것을 다시 볼 수 있는 여유에서 계속될 수 있다.
〈가을 애련정〉의 기둥 아래에 물빛이 남아 있다. 〈정오〉의 짙은 나무 곁에는 밝은 획들이 있다. 눈은 한 선을 따라가다 그 옆에서 잠시 멈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