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Ⅳ 기법과 매체

Ⅳ 기법과 매체 · 44 / 100

단색조의 심연

적은 색의 차이를 오래 보는 일

The Depths of Near-Monochrome

빈 집 / Empty House · 1987. 왼쪽의 작은 집과 기울어진 나무, 오른쪽 먼 배와 태양. / A small house and leaning tree at left, with a distant boat and sun to the right.
〈빈 집〉 · 1987FŪDO 062
정오 / Noon · 2007. 촘촘한 짧은 획, 작은 집과 굽은 사람 사이의 짙은 나무. / Dense short marks surround a dark tree between a small house and a bent figure.
〈정오〉 · 2007FŪDO 012

하나처럼 보이는 색

〈빈 집〉(1987)을 멀리서 보면 누런 계열의 넓은 화면이 먼저 온다. 가까이 보면 집의 벽과 나무 주변, 하늘의 밝음이 모두 같지는 않다. 검은 형상도 한 가지 무게로 놓이지 않는다. 단색조라는 말은 이 그림에 색이 하나뿐이라는 뜻보다, 가까운 색들이 화면의 기조를 이룬다는 뜻에 가깝다.

〈정오〉(2007) 역시 비슷한 색의 세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굽은 획들이 화면 곳곳을 채우고, 밝은 바탕과 어두운 면이 촘촘하게 맞물린다. 〈빈 집〉의 넓은 간격과는 다른 밀도다. 단색조라는 같은 이름 아래에서도 눈이 머무는 방식은 달라진다.

이 차이에서 출발하면 색을 줄였으니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곧바로 말할 수 없다. 적은 색으로도 화면은 분주할 수 있고, 많은 색으로도 질서가 생길 수 있다. 색의 수는 감정의 깊이나 작품의 성숙도를 재는 자가 아니다. 무엇이 줄었고 무엇이 더 민감해졌는지 따로 살펴야 한다.

두 화면의 다른 호흡

〈빈 집〉에서는 집과 나무가 왼편에 모이고, 오른편으로 넓은 바탕이 열린다. 작은 배와 태양이 그 열린 자리를 모두 채우지는 않는다. 눈은 가까운 형상에서 멀리 옮겨가며 오래 건너야 할 거리를 느낀다. 이 거리의 감각은 바탕색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데서도 생긴다.

〈정오〉에서는 굽은 획들이 그 거리를 여러 번 나눈다. 나무의 짙은 윗부분과 집의 윤곽, 아래쪽 인물 사이에도 획들이 이어진다. 시선은 멀리 한 번에 나아가기보다 이웃한 밝고 어두운 자리로 옮겨간다. 같은 색조가 어떤 그림에서는 공간을 열고, 다른 그림에서는 공간을 결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기라는 이름만으로 비움의 방향을 미리 정하지 않는다. 2007년 그림에도 촘촘한 움직임이 남아 있다. 적게 그리는 일과 조용해지는 일, 나이가 드는 일은 서로 연결해볼 수 있지만 같은 사건은 아니다. 두 화면을 나란히 보면 한 화가가 줄곧 하나의 감정으로 향했다는 설명보다 더 많은 변화가 보인다.

줄이는 일은 옮겨 맡기는 일이기도 하다

사물마다 다른 색을 쓰지 않으면 그 사물을 구별하는 일이 다른 요소로 옮겨간다. 집의 형태는 지붕의 곡선과 벽의 짧은 선으로, 배의 거리는 크기와 위치로 읽히게 된다. 색을 줄였다는 것은 구별을 없앴다는 뜻이 아니다. 구별을 어디에 맡길지 바꾸었다는 뜻일 수 있다.

이때 선 하나를 굵게 하거나 바탕의 한 부분을 조금 밝게 두는 선택이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비슷한 것들 사이에서는 작은 차이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차이가 너무 적으면 형상이 묻히고, 너무 크면 함께 이어지던 바탕이 갈라질 수 있다. 절제에는 조절이 따른다.

응축이라는 말도 이 구체적인 조절을 가리킬 때 유용하다. 모든 색이 실제로 하나의 안료 안에 들어갔다는 뜻은 아니다. 적은 차이에 여러 역할을 맡기고, 그 역할들이 서로 방해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다. 응축은 보이지 않는 깊이를 선언하는 말보다, 화면에서 더 많은 관계를 찾아보게 하는 질문이 된다.

라인하트의 검정을 곁에 놓으면

스미스소니언 미국미술관은 애드 라인하트의 〈Abstract Painting no. 4〉(1961)를 설명하며, 처음 검게 보이는 표면 안에서 푸른색과 자줏빛 계열의 미세한 구획이 드러나는 점을 짚는다. 보는 시간이 색의 차이를 알아보는 데 관여한다. 이 사례는 서양의 모노크롬이 언제나 물질과 감각을 떠난 관념뿐이라는 구분을 흔든다.

변시지와 라인하트를 같다고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멀리서 하나처럼 보이는 색이 오래 볼수록 나뉜다는 질문을 함께 놓을 수 있다. 변시지의 경우 그 차이는 집과 배, 사람과 나무를 알아보는 일과도 연결된다. 색의 미세한 차이를 보는 일과 풍경 속 거리를 읽는 일이 겹친다.

비교의 의미는 누가 더 깊은가를 정하는 데 있지 않다. 무엇이 눈을 멈추게 하고, 시간이 지난 뒤 무엇이 새로 보이는지 살피는 데 있다. 두 작품은 서로를 설명하는 열쇠가 아니라, 각자의 차이를 더 잘 보게 하는 곁의 화면이 된다. 닮은 문제를 다루면서 다른 형식을 택할 수 있다.

단색화를 하나의 내면으로 묶지 않기

국립현대미술관의 윤형근 전시 해설은 청색과 암갈색, 하늘과 땅의 관계를 소개하면서 그의 삶과 역사적 경험도 함께 다룬다. 검게 보이는 화면을 내면의 명상만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례를 보면 단색화는 수행이고 변시지는 풍토이므로 방향이 정반대라는 대비를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다.

수행과 풍토, 반복과 기억은 서로 배타적인 범주가 아니다. 반복하는 손에도 장소와 역사가 들어올 수 있고, 장소를 그리는 작업에도 오랜 반복이 필요할 수 있다. 차이는 두 편으로 나누는 말보다 작품마다 어떤 행위와 표면, 형상과 공간이 결합하는지에서 찾아야 한다.

변시지의 단색조를 읽을 때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알아볼 수 있는 형상들이 계속 남는다는 점이다. 집과 몸, 수평선이 색의 장 안에서 관계를 만든다. 이것만으로 그를 어느 운동의 안이나 밖에 확정할 수는 없지만, 비교의 구체적인 기준은 된다. 미술사적 분류와 한 화면의 관찰은 서로를 도와야 한다.

같은 색이 평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비슷한 색이 사람과 동물, 집과 땅을 이어준다고 해서 모든 차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오〉에서 나무의 큰 짙은 면은 작은 사람보다 강하게 눈에 들어온다. 〈빈 집〉의 가까운 집과 먼 배도 같은 크기로 보이지 않는다. 화면은 색을 묶으면서 규모와 위치의 차이를 계속 사용한다.

시각적 차이는 곧 가치의 차이가 아니다. 크게 그려졌다고 더 귀하고 작게 그려졌다고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성립한다. 같은 색으로 그려졌다는 사실만으로 윤리적 평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그림에서 평등을 읽으려면 색뿐 아니라 몸들이 서로 어떤 관계로 놓였는지도 보아야 한다.

단색조의 힘을 평등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부르면 다채로운 그림이 함께 사는 세계를 만들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변시지의 푸른 초기 제주화도 그런 배제 밖에 두어야 한다. 하나의 기법이 모든 윤리를 독점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서 적은 색이 어떤 관계를 더 잘 보게 하는가다.

복제의 색 앞에서 남겨두는 거리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작품의 복제 이미지다. 화면 장치와 촬영, 인쇄를 거친 색은 원화의 모든 차이를 그대로 전하지 않는다. 어떤 부분이 더 밝고 어떤 형상이 더 짙게 놓였는지는 살필 수 있지만, 미세한 색차와 광택, 물감의 층을 완전히 확인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작은 차이를 말할수록 이 조건이 중요해진다.

마른 풀잎색을 정확한 하나의 색값으로 고정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화가 자신이 그림마다 누런 톤이 달라진다고 했다. 작품의 차이를 하나의 표준색으로 맞춰버리면, 아카이브가 보여주어야 할 변화가 사라진다. 색을 보존한다는 것은 대표색 하나를 반복하는 일보다 각 작품의 차이를 잃지 않는 일에 가깝다.

이 장에서 심연이라는 말은 실제 표면 아래에 숨은 비밀 물질을 뜻하지 않는다. 오래 볼수록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한 관계가 생기는 경험을 가리킨다. 가까운 선의 두께, 먼 배의 작은 크기, 밝은 바탕의 간격. 깊이는 때로 새로운 것을 덧붙이는 데서가 아니라 이미 있는 차이를 늦게 보는 데서 생긴다.

색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눈

단색조 앞에서 눈이 갈 곳을 잃는다는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정오〉의 작은 곡선들은 눈을 여러 방향으로 보낸다. 〈빈 집〉의 넓은 바탕도 집에서 배로, 나무에서 태양으로 길을 연다. 색의 수가 적다고 시선의 길까지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변시지의 단색조는 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게 하는 선택으로 읽을 수 있다. 사물마다 붙어 있는 색의 이름에서, 화면 전체의 밝기와 방향, 간격으로 눈을 옮기는 선택이다. 그렇다고 사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색을 보고 돌아오면 집은 여전히 집이고 사람은 여전히 작은 몸으로 남아 있다.

가까이서 보면 밝은 틈들이 있다. 한 걸음 물러서면 그 틈 사이로 집이 다시 보인다. 배는 여전히 멀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