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기법과 매체 · 43 / 100
검은 선의 힘
윤곽과 간격, 붓질이 함께 만드는 힘
The Power of the Black Line
검은 것은 모두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
〈돌담 위 까마귀〉(1983)의 아래쪽에는 돌과 새의 짙은 형상이 이어진다. 돌의 선은 둥근 단위를 만들고, 새의 선은 짧게 뻗거나 꺾인다. 멀리 수평선은 가늘게 지나간다. 모두 어둡게 보이지만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하나는 받치고, 하나는 몸의 방향을 만들며, 하나는 거리를 연다.
새를 이루는 작은 획 하나를 돌의 윤곽으로 옮기면 같은 새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선의 의미는 모양 자체에만 있지 않다. 어디에 놓였고 무엇에 닿으며 주위에 어떤 밝음이 남았는지가 함께 작용한다. 검은 선의 힘은 그 검정의 강도뿐 아니라 주변과 맺는 관계에서 생긴다.
그림을 선과 바탕의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첫걸음일 뿐이다. 선이 모든 것을 말하고 바탕은 조용히 받쳐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짙은 형상들이 아래에 모여 있기 때문에 그 위의 넓은 공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 반대로 그 넓음이 있어야 아래의 짧은 획들이 밀도와 무게를 얻는다.
선이 몸의 자세가 되는 자리
〈빈 집〉(1987)에서 나무의 줄기는 곧게 솟지 않는다. 작은 집 위쪽에서 몸을 굽혀 짙은 가지의 덩어리를 받친다. 그 곁의 두 새는 다른 각도로 날개를 편다. 휘어진 줄기와 펼친 날개를 따라가면서 눈은 서로 다른 방향을 잇는다. 바람이라는 별도의 형상을 찾기보다, 방향들이 만드는 긴장을 느끼게 된다.
이 선을 힘이 지나간 자리라고 읽을 수 있다. 다만 실제 바람의 경로가 그대로 기록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화가는 굽은 형상과 열린 공간을 조절해 그 힘을 느낄 조건을 만든다. 선은 사물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시선이 움직이는 길이다. 형체를 알아보는 일과 움직임을 느끼는 일이 같은 획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윤곽과 표현을 서로 배척할 필요는 없다. 말의 목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기에 그 낮아진 각도가 몸의 무게로 다가온다. 나무의 줄기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기에 굽어 있는 부분에서 긴장이 생긴다. 무엇인지 알게 하는 선이, 어떻게 있는지 느끼게 하는 선이 되기도 한다.
먹필의 기억을 선택한 검정
변시지는 누런 바탕에서 검정으로 그리기 시작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먹필로 글을 쓰던 습관을 떠올린다. 한국의 생활 속에 익숙한 검정이 새로운 회화의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구술은 검은 선을 개인의 취향으로만 보지 않게 한다. 손에 익고 눈에 익은 문화의 기억이 색의 선택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익숙한 문화와 생물학적 본성은 구별된다. 검은 머리나 눈을 가졌다고 같은 선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화가의 회고 속 연상을 존중하되, 그것을 한국인 전체의 필연적인 미감으로 확대하지 않아야 한다. 먹필의 경험은 배우고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실천이지, 태어날 때 완성된 운명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전통은 돌아가야 할 고정된 원형보다 사용할 수 있는 경험이 된다. 편지의 획과 그림의 나뭇가지는 같은 뜻을 갖지 않지만, 붓을 움직이고 멈추는 감각을 나눌 수 있다. 변시지의 선택은 오래된 경험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바탕과 다른 장면에서 다시 작용하게 하는 일로 읽힌다.
먹처럼 보이는 것과 먹인 것
복제 이미지에서 획이 메마르고 거칠게 보일 때 먹의 갈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닮아 보인다는 사실은 같은 재료라는 증거가 아니다. 검은 선의 안료와 결합재, 바탕층은 작품 기록이나 재료 조사로 확인해야 한다. 여기서 갈필이라는 말은 먼저 끊기고 스치며 바탕을 남기는 시각적 효과를 가리킨다.
구술에서 변시지는 유화를 칠한 뒤 어느 정도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손대는 과정을 설명한다. 작업이 한 번의 붓놀림으로 끝난다는 이야기와 다르다. 건조와 재작업, 덧칠과 때로는 긁어내기가 그의 설명에 함께 나온다. 화면에 빠르게 지나간 듯한 선이 있어도 그 그림의 시간 전체가 빠르다고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기름기를 완전히 없애 유화를 먹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은 이번 자료만으로 확정하지 않는다. 물감의 성분을 바꾼 과정과 붓에 묻힌 양을 달리한 과정은 같지 않다. 우리가 지금 읽을 수 있는 것은 획의 두께와 끊김, 겹침이 만드는 화면의 차이다. 기술의 이름은 보이는 것을 더 정밀하게 하기 위해 쓰여야 한다.
선과 색을 대륙으로 나누지 않기
선을 동양의 정신, 색을 서양의 물질이라고 나누면 두 전통 모두 좁아진다. 변시지의 선은 유화의 표면에서 보이고, 그 바탕의 색은 선의 무게를 바꾼다. 어느 쪽도 홀로 작동하지 않는다. 선을 되찾았다는 이유로 색의 경험을 버린 화가로 만들면, 그가 작품마다 색을 달리했다는 설명과도 어긋난다.
마티스의 모노타이프를 다룬 뉴욕현대미술관의 글은 적은 윤곽과 세부로 몸을 세우는 방식을 살핀다. 검은 바탕과 흰 선의 관계, 선의 간결함이 중요한 작업이다. 이 사례만 보아도 근대 서양 회화에서 선이 색에 패배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충분하지 않다. 변시지의 고유함은 다른 작가에게 선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비교의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누구의 선이 더 높은가가 아니라, 각 선이 어떤 바탕에서 무엇을 하게 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변시지의 나무와 새는 넓은 마른 풀잎빛 공간과 함께 읽힌다. 그 공간에서 줄기의 굽음과 새 사이의 틈이 서로의 힘을 달리한다. 고유함은 그 구체적인 결합에 있다.
이어져 보이는 선과 한 번에 그은 선
나무의 뿌리에서 가지로 눈이 끊기지 않고 올라갈 수 있다고 해서, 실제 붓이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완성된 화면의 연속성과 제작 동작의 연속성은 구별된다. 여러 획이 이어져 하나의 흐름을 만들 수 있고, 한 번의 획도 중간에서 시선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돌담 위 까마귀〉에서는 몸통, 부리와 날개의 짧은 방향들이 맞물린다. 그 연결은 새를 알아보게 하면서도 각 부분을 같은 모양으로 만들지 않는다. 아래 돌담의 되풀이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작은 단위들이 있지만 크기와 기울기는 다르다. 반복 속의 차이가 눈을 따라가게 하고 때로 멈추게 한다.
이 리듬을 화가의 호흡에 비길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순간의 감정이나 실제 호흡 수를 획에서 역산할 수는 없다. 비유의 힘은 몸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하는 데 있지, 보이지 않는 내면을 확정하는 데 있지 않다. 한 선 앞에 오래 머문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단정하는 일이 아니라, 보이는 차이를 더 세밀하게 느끼는 일이다.
선 사이에도 힘이 있다
〈빈 집〉에서 집과 먼 배를 잇는 굵은 선은 없다. 그런데도 눈은 그 사이를 건넌다. 가까운 집의 크기와 멀리 놓인 배의 작음, 그 위로 이어지는 수평선이 길을 만든다. 그리지 않은 연결이 그려진 선들과 함께 작용한다. 선의 힘을 보려면 선이 없는 자리도 보아야 한다.
작은 새 하나와 다음 새 사이의 틈도 마찬가지다. 틈이 좁으면 몸들이 모여 보이고, 넓으면 각자의 방향이 따로 살아난다. 빈 곳은 선의 의미를 바깥에서 덧붙이는 배경이 아니다. 선이 어느만큼 독립하고 어느만큼 이어질지를 정하는 조건이다. 관계는 접촉하는 곳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짙게 그릴수록 반드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주위가 이미 어두우면 한 획은 묻힐 수 있다. 넓은 밝음 옆의 가는 선이 더 멀리 눈을 이끌 수도 있다. 변시지의 검은 선은 거침과 굵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때로는 그 선을 둘러싼 조용한 바탕이 힘의 더 큰 몫을 맡는다.
물감의 획에서 다시 새로
가까이서는 한 획이 물감의 가장자리로 보인다. 조금 물러서면 그 획이 날개가 된다. 더 멀리에서는 여러 새가 만든 리듬의 일부로 바뀐다. 이 세 거리는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를 버려야 하는 선택지가 아니다. 같은 그림 앞에서 눈이 오가며 함께 경험하는 층위다.
검은 선의 힘은 형상을 없앤 뒤에야 생기는 것이 아니다. 형상을 알아보면서 획도 느끼고, 획을 보면서 그 주변의 거리를 다시 읽는 데 있다. 선은 새를 가두는 경계만도 아니고 새와 무관한 자유로운 몸짓만도 아니다. 그 사이를 오가는 동안 작은 형상은 오래 시선을 붙든다.
돌담 위에 새들이 있다. 한 마리의 짙은 몸 옆으로 밝은 틈이 남는다. 그 틈을 건너면 다음 새의 부리가 다른 쪽을 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