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Ⅳ 기법과 매체

Ⅳ 기법과 매체 · 42 / 100

황갈색의 발견

마른 풀잎색이 회화의 언어가 되기까지

The Discovery of Yellow-Brown

조랑말 / Jeju Ponies · 1975. 바위 해안 가까이에 서로 다른 자세로 선 두 마리의 말. / Two ponies standing in different postures near a rocky shore.
〈조랑말〉 · 1975FŪDO 053
빈 집 / Empty House · 1987. 왼쪽의 작은 집과 기울어진 나무, 오른쪽 먼 배와 태양. / A small house and leaning tree at left, with a distant boat and sun to the right.
〈빈 집〉 · 1987FŪDO 062

색은 한순간에 모두 바뀌지 않았다

〈조랑말〉(1975)의 바다는 푸른 기운을 넓게 머금고 있다. 바위와 말의 몸에는 분홍빛과 청록빛이 섞인다. 두 말의 자세도 서로 다르다. 이 화면을 먼저 보면, 제주에 돌아온 순간 모든 색이 하나로 줄었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한 장소에 도착한 일과 그 장소를 그리는 언어가 달라진 일 사이에는 시간이 있다.

〈빈 집〉(1987)에 이르면 넓게 이어지는 황갈색 계열의 바탕과 짙은 선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 두 작품만으로 변화의 모든 단계를 정할 수는 없다. 비교가 보여주는 것은 한 번의 계시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색의 관계를 실제로 구성한 화면들이다. 변화는 연보의 한 줄보다 그림 사이에서 더 구체적으로 보인다.

발견이라는 말에는 뜻밖에 알아본 순간이 들어 있다. 그러나 알아본 것을 다음 그림에서도 쓸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한 번 본 빛이 곧 화풍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색을 남기고 어떤 대비를 줄일지, 그 바탕에서 집과 말이 어떻게 보일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장은 그 순간을 기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순간 이후의 일을 살핀다.

구술이 남긴 해변의 장면

제7차 구술채록에서 변시지는 처음 제주에 내려가서도 비원 시절의 방식으로 그렸다고 말한다. 소재는 제주인데 그곳의 생활과 풍토가 충분히 들어오지 않는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색의 변화는 단순히 새로운 풍경에 감탄한 결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던 방식과 살고 있는 장소 사이의 어긋남이 먼저 있었다.

그는 해변에서 고민하던 중 강한 햇빛 아래 흰 것이 누렇게 달라 보이는 현상을 보았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제주를 색으로 상징한다면 누런 색조가 아닐까 생각하고, 그것을 실제 그림으로 옮겨보려 했다고 설명한다. 구술의 흐름에는 보는 일, 생각하는 일, 시도하는 일이 차례로 있다. 의식이 사라진 틈에 색이 저절로 완성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 기록에는 당시 밤에 술을 마셨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술을 마셨다는 사실과 다음 날 캔버스에서 자신의 색을 발견했다는 사건은 같지 않다. 이번에 확인한 대목은 해변에서의 관찰을 말한다. 공항의 섬광이나 숙취의 아침을 여기에 이어 붙여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지 않을 때, 화가가 직접 설명한 관찰과 선택의 과정이 더 또렷해진다.

본 빛과 칠한 색 사이

흰 것이 누렇게 보였다는 회고는 화가가 겪은 지각의 기록이다. 제주에 있는 모든 흰 물체가 언제나 같은 색으로 변한다는 측정 결과는 아니다. 이 구별은 발견의 가치를 줄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이 본 현상을 어떻게 화면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였는지 묻게 한다. 자연의 빛과 그림의 색은 연결되지만 동일하지 않다.

〈조랑말〉에서는 바다와 바위, 두 몸의 색들이 서로 번갈아 시선을 부른다. 〈빈 집〉에서는 넓은 바탕의 연속성이 먼저 느껴지고 집과 나무의 짙은 형상이 그 위에 놓인다. 앞의 그림은 차이를 더 많이 분배하고, 뒤의 그림은 적은 차이에 더 많은 역할을 맡긴다고 읽을 수 있다. 이것은 감각을 버린 변화가 아니라 감각을 조직하는 방법의 변화다.

그러므로 마른 풀잎색을 자연의 정답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림이 택한 관계를 읽는 이름이다. 햇볕과 바람에 바랜 풀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안료가 풀이나 흙에서 나왔다는 뜻은 아니다. 이 이름은 재료표를 대신하지 않는다. 색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질감을 말하는 비평의 언어로 남는다.

우연을 알아보는 일

우연과 판단을 반대편에 놓으면 발견의 과정이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생각하지 못한 색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남길지 결정하고, 다른 형상과 함께 놓아보고, 다음 작업에서 다시 시험하는 일은 이어진다. 놀람은 선택의 시작일 수 있지만 선택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발견에는 받아들이는 눈만큼 구별하는 눈도 필요하다.

폴록의 〈One: Number 31, 1950〉을 설명하는 뉴욕현대미술관은 중력과 물감의 움직임을 활용한 과정 안에서 짜인 질서도 함께 살핀다. 우연이 들어온다고 화가의 조절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비교는 변시지의 방식을 폴록과 같게 만들기보다, 두 작가를 각각 통제와 무통제의 한쪽에만 놓지 않게 한다.

존 케이지의 〈Music of Changes〉에서는 주역에 따른 우연 절차가 소리와 침묵, 길이와 강약을 정하는 작업에 사용된다. 악보 출판사의 설명은 그 결과가 세밀하게 기보되었음도 보여준다. 우연을 위한 절차와 우연히 무언가를 알아보는 경험은 구별된다. 변시지의 색에 대해서는 그가 회고한 관찰과 실험을 먼저 놓는 편이 정확하다.

갈중이의 색과 그림의 색

변시지는 구술에서 갈중이 옷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자신의 색이 그 옷에서 그대로 비롯되었다는 설명에는 선을 긋는다. 같은 누런 계열이라도 무엇을 그리는가에 따라 그림마다 달라진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지역의 사물과 그림을 단순히 일치시키지 않으려는 태도가 있다. 닮은 색을 찾았다는 것으로 회화의 설명이 끝나지 않는다.

같은 장소의 물건을 떠올리는 것은 유익하다. 다만 한 가지 물건으로 그 색의 모든 역할을 정하면, 그림 안의 밝고 어두운 차이나 선과의 대비가 밀려난다. 〈빈 집〉의 바탕은 집 바깥을 넓히고 작은 배를 멀게 한다. 그 공간적 역할은 어떤 옷의 색과 비슷한가라는 질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마른 풀잎색이라는 말도 같은 검토를 받아야 한다. 이 이름이 그림을 다시 보게 한다면 도움이 된다. 반대로 모든 화면이 똑같은 누런색이라고 믿게 한다면 방해가 된다. 좋은 이름은 관찰을 대신하지 않는다. 이름을 알고 난 뒤에도, 우리는 그 그림에서 유난히 밝은 곳과 오래 어두운 곳을 따로 보아야 한다.

한 계열 안에서 다시 고르기

화가가 그림마다 색이 다르다고 한 대목은 작지만 중요하다. 한 가지 색을 평생 반복했다는 문장 속에 가려지기 쉬운 선택을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누런 바탕을 쓴다는 공통점이 있어도 이번 그림의 밝기와 탁함, 짙은 형상의 무게는 다시 조정된다. 화풍의 지속은 선택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색을 덜 쓰면 작은 차이가 맡는 일이 커질 수 있다. 배를 둘레보다 조금 짙게 할 것인지, 집의 벽을 바탕과 얼마나 가깝게 할 것인지에 따라 거리와 무게가 달라진다. 색의 수만 세면 이러한 일을 놓친다. 중요한 것은 몇 가지를 썼는가만이 아니라, 남은 차이들이 화면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작용하는가다.

이때 반복은 같은 결론을 복제하는 일이 아니다. 비슷한 조건을 다시 만나 이전과 다른 답을 시험하는 일에 가깝다. 넓은 바탕을 더 밝게 두면 작은 형상이 외따로 보일 수 있고, 획이 많아지면 그 사이의 공간이 흔들리는 듯할 수 있다. 익숙한 색 안에서도 화면은 매번 새로 조직된다.

흙이 물감이 되었다는 비유의 한계

제주의 흙이 물감이 되었다는 문장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비유를 재료의 사실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어떤 안료와 결합재가 쓰였는지는 작품 기록과 보존과학적 조사가 답할 문제다. 복제 이미지가 흙의 촉감을 떠올리게 한다는 관찰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성분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감각의 설명과 재료의 확인은 서로 다른 일을 한다.

색의 발견을 초월적인 사건으로만 쓰면 화가의 손이 사라진다. 저절로 찾아온 색을 그대로 받아 적은 사람이 될 뿐이다. 구술은 다른 모습을 남긴다. 그는 이전 방식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본 빛에서 생각을 얻고, 그 생각을 그림으로 시험했다. 풍토는 그에게 조건을 주었지만, 그 조건이 한 장의 그림을 대신 완성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읽으면 발견은 덜 신비로워지지만 더 가까워진다. 화가는 세계의 빛을 전부 소유하지 않는다. 본 것을 놓치기도 하고, 뒤늦게 알아보기도 하며, 다음 그림에서 다시 고른다. 발견의 깊이는 단 한 번의 확신보다, 그 확신을 화면에서 계속 검토하는 일에 있을 수 있다.

발견 다음의 그림

황갈색의 발견은 한 색을 찾아낸 사건인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그려야 한다는 문제를 받아들인 일이었다. 색만 바꾸면 같은 구도가 다른 세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의 역할과 사물의 크기, 그 사이의 여백도 함께 달라져야 한다. 색에서 시작된 질문은 곧 회화 전체의 질문으로 넓어진다.

그렇다고 푸른 화면을 실패한 이전 단계로 남겨두지는 않는다. 〈조랑말〉의 두 몸과 바위, 바다의 밝은 결은 그 그림 안에서 이미 관계를 이루고 있다. 뒤의 양식을 알더라도 앞의 작품을 끝나지 않은 예고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 변화는 과거의 그림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다른 가능성을 더한다.

푸른 바다 앞에 두 말이 서 있다. 다른 화면에는 작은 집과 먼 배가 있다. 두 그림 사이를 눈이 오간다. 같은 화가의 색은 아직 한 이름으로 고정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