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Ⅲ 동물과 생명

Ⅲ 동물과 생명 · 41 / 100

동물과 인간의 동행

같은 장소에서 서로를 지탱하는 일

Companionship between Animals and Humans

풍랑 / Stormy Seas · 1983. 비스듬한 밝은 획들 아래 가까이 선 사람과 말, 뒤쪽의 작은 집. / A person and pony close together beneath diagonal light strokes, with a small house behind.
〈풍랑〉 · 1983FŪDO 067
해촌 / Seaside Village · 2002
〈해촌〉 · 2002FŪDO 047

집 앞의 두 몸

〈풍랑〉(1983)의 아래쪽에 사람과 말이 가까이 서 있다. 사람의 팔과 말의 목이 만나는 부근에서는 검은 획들이 겹친다. 그 뒤에는 낮은 집이 있고, 밝은 사선들이 집과 지면을 가로지른다. 서로의 정확한 동작을 한마디로 정하기보다, 먼저 두 몸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짧은지 보게 된다. 넓고 거친 화면에서 그 가까움은 작지만 분명하다.

사람이 말을 지키는 것일까. 사람이 말에 기대는 것일까. 어느 한쪽만을 보호자로 정하면 화면의 긴장이 줄어든다. 사람의 굽은 몸과 말의 서 있는 몸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리를 차지한다. 그 차이가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동행은 두 존재가 같은 모습이 되는 일이 아니라, 다른 몸으로 가까이 있는 일이다.

집이 뒤에 있다고 두 몸이 이미 안전한 것은 아니다. 집까지의 짧은 거리에도 건너야 할 땅이 있다. 그림은 안전한 실내와 위험한 바깥을 명료한 두 칸으로 나누지 않는다. 집과 몸 모두 같은 화면의 사선들에 둘러싸여 있다. 서로의 곁에 있는 일은 풍랑을 없애지 않지만, 풍랑 속에서 몸을 둘 자리를 조금 달라지게 한다.

모두를 한 장면에 모으지 않기

변시지의 동물들을 읽을 때 여러 그림을 하나의 가상 풍경으로 합치기 쉽다. 사람, 말, 소, 까마귀, 게와 풀이 늘 함께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풍랑〉에서 본 관계는 〈해촌〉(2002)의 관계와 다르다. 한 작품의 가까운 접촉과 다른 작품의 떨어진 배치를 구별해야 동행의 여러 형식이 보인다.

〈해촌〉에서는 돌담이 길을 나눈다. 사람은 가운데 길에 있고, 왼쪽에는 고개를 낮춘 말이, 오른쪽에는 머리를 든 소가 있다. 셋은 한 덩어리로 모이지 않는다. 길과 담이 그들 사이에 놓인다. 이 화면에서 함께 있음은 접촉보다 배치의 문제다. 가까이 붙어 있지 않아도 서로의 자리가 같은 장소를 이루는 데 참여한다.

이 차이는 관계를 상징 하나로 고정하지 않게 한다. 말은 언제나 위로이고 소는 언제나 인내라는 식으로 읽으면, 고개를 든 몸과 낮춘 몸이 실제로 무엇을 다르게 하는지 놓친다. 도상의 이름을 안 다음에도 다시 그림을 보아야 한다. 동물의 의미는 종의 이름에만 있지 않고, 이번 화면에서 차지한 자리에 있다.

같은 색이 지우지 않는 차이

〈해촌〉의 집과 길, 동물의 몸에는 비슷한 색조가 이어진다. 그러나 검은 윤곽과 밝은 면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말은 말로, 소는 소로 보인다. 같은 색은 존재들을 하나로 녹여 없애기보다, 서로 다른 형상이 같은 빛 안에 놓였다는 인상을 만든다. 공통된 바탕과 각자의 윤곽이 함께 있어야 이 관계가 성립한다.

색이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 현실의 평등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림에 고삐가 보이지 않는다고 소유와 노동의 관계가 모두 사라졌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이 화면에서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라는 질문만으로 관계가 소진되지 않는다. 몸의 크기와 위치, 길의 방향은 다른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누가 어느 자리를 내어주고, 무엇을 함께 지나고 있는가.

풍토를 공통 기반으로 읽는다는 것은 차이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사는 집과 말이 서 있는 땅은 이어져 있지만 같은 쓰임을 갖지 않는다. 같은 날씨도 몸마다 다른 부담이 될 수 있다. 화면의 한 색조는 그 차이를 잠시 가까이 놓는다. 가까움은 같음보다 조심스러운 말이며, 동행을 읽는 데에는 오히려 더 유용하다.

견딤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 관계

〈풍랑〉의 두 몸을 오래 보면 누가 더 강한가를 묻는 일이 덜 중요해진다. 사람의 몸이 낮아져 있고 말의 다리가 땅에 닿아 있다는 사실이 먼저 남는다. 우리는 여기서 도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림 속에 없는 말을 덧붙여, 말이 사람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한다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동행이 위로가 되려면 다른 존재를 위로의 도구로만 두지 않아야 한다. 내 곁에 남아 있다는 이유로 그 몸의 피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관계의 따뜻함과 관계가 요구하는 부담은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서로 기대는 장면이 감동적인 것은 아무 대가도 없어서가 아니라, 기대는 일에도 조심스러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으면 견딤은 시험이 되지 않는다. 끝까지 서 있는 몸만 가치 있고, 쉬거나 쓰러진 몸은 관계 밖으로 밀려나는 식의 이야기를 피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강인함의 증명보다 몸을 둘 자리다. 작은 집과 가까운 말이 화면에 있는 까닭을, 승리의 표지보다 의지할 곳의 가능성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동반종이라는 비교의 창

도나 해러웨이의 『When Species Meet』는 동물과 인간의 만남을 추상적인 친화감에만 맡기지 않는다. 함께 훈련하고 생활하는 구체적인 관계를 통해, 서로를 대하는 존중과 지식이 어떻게 생기는지 묻는다. 출판사 소개 역시 이런 만남에 행복한 결말이 미리 보장되어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관계는 선언보다 실제로 함께 하는 일에서 시험된다.

이 비교가 변시지에게 도움이 되는 지점은 그림 속 침묵을 완전한 이해라고 부르지 않게 한다는 데 있다. 말을 하지 않는 두 존재가 서로를 모두 알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대신 어떤 거리가 허용되고, 어떤 접촉이 보이며, 어느 몸의 방향이 다른지를 볼 수 있다. 이해의 완성 대신 관계의 구체성이 남는다.

다만 이 그림을 해러웨이 이론의 삽화로 만들지는 않는다. 화가가 그 이론을 따랐다는 주장이 아니라, 오늘의 독자가 회화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화면은 이론보다 적게 말하고 더 오래 남는다. 우리는 사람 곁의 말을 보다가, 그 말에게도 사람과 다른 하루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한다.

길과 담이 함께 만드는 생활

〈해촌〉의 돌담은 풍경의 장식만이 아니다. 화면에서 길을 굽게 하고 몸들을 서로 다른 구역에 놓는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보려면 그들 사이의 구조물도 보아야 한다. 집과 담이 있다는 사실은 이곳을 손대지 않은 자연이라고 부르기 어렵게 한다. 누군가 오가고 살아가는 장소의 모양이 이미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는 말이 인간의 책임을 줄이는 쪽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담을 만들 수 있는 존재에게는 담이 다른 몸에 무엇을 하는지 살필 몫도 생긴다. 그림은 실제 사육 방식을 보고하지 않지만, 길을 나누는 형식을 통해 함께 산다는 말에 구체적인 질문을 돌려준다. 누구에게 열려 있고 누구에게 막혀 있는가.

이 질문을 남기면 동물은 낙원의 장식도 불행의 증거도 되지 않는다. 먹고 쉬고 이동할 자리를 필요로 하는 몸으로 남는다. 사람 역시 세계를 내려다보는 유일한 눈이 아니라 그 길을 이용하는 한 몸이 된다. 풍경의 평화는 아무 관계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관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물음 가까이에 놓인다.

풍토는 배경에서 관계로 옮겨간다

변시지는 구술에서 제주를 소재로 그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곳의 역사와 사람들의 생활, 살아가려는 의지가 작품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보았다. 이 말은 풍토를 기후의 작용만으로 읽지 않게 한다. 바람에 몸이 굽는 현상뿐 아니라, 그 바람 속에서 길을 내고 서로 의지하는 생활도 풍토에 속한다.

바람이 모든 존재를 같은 세기로 친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집의 뒤와 열린 땅, 작은 몸과 큰 몸은 화면에서도 다르게 놓인다. 공통의 조건은 같은 경험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균등을 볼 때, 왜 어떤 몸은 다른 몸 가까이로 가는지 생각하게 된다. 동행은 차이가 사라진 결과가 아니라 차이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다.

이 관계를 위해 회화는 거대한 상징을 더하지 않는다. 가까운 목, 굽은 팔, 길을 나누는 낮은 선이면 충분할 수 있다. 작은 형식이 풍토를 배경에서 생활의 문제로 바꾼다. 제주라는 이름을 아는 것에서, 이 몸들이 어떻게 이곳에 함께 놓였는지 보는 것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동행 뒤에 남는 거리

앞선 글들이 새와 말, 소와 풀을 따로 살폈다면, 이 장은 그 사이를 본다. 개체를 나누어 보는 눈과 관계를 함께 보는 눈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한쪽만 남으면 동물은 고립된 기호가 되거나, 구별 없는 분위기 속으로 사라진다. 변시지의 작은 형상들은 같은 그림 안에서도 각자의 윤곽을 놓지 않는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함께 있는 모양을 세밀하게 보는 일은 우리의 질문을 바꾼다. 누가 더 큰가에서 누가 어디에 있는가로. 누가 이기는가에서 누가 기대고 있는가로. 이 변화는 인간의 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다른 생명 옆에 다시 놓는 일이다.

〈풍랑〉의 집은 여전히 뒤에 있다. 사람과 말의 검은 선은 가까이 닿아 있다. 그 발밑으로 밝은 획들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