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동물과 생명 · 40 / 100
풀 한 포기의 존재론
작은 형상과, 그 형상을 받치는 세계
The Ontology of a Tuft of Grass
발밑으로 내려온 시선
〈난무〉(1997)에서 새들을 오래 본 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마당처럼 넓어진 땅에 짧은 획들이 이어진다. 큰 새나 집처럼 한눈에 이름 붙이기 쉬운 형상은 아니다. 지면의 결로도, 풀 같은 낮은 흔적으로도 다가온다. 이 장은 그 흔적을 특정 식물로 확정하기보다, 발밑의 면이 어떻게 살아 있는 자리로 읽히는지 묻는다.
풀 한 포기는 풀잎 한 장과 같지 않다. 잎 하나를 넘어 한 자리에 모여 자라는 작은 몸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질문도 색 하나에서 그 색을 지닌 존재의 자리로 옮겨간다. 무엇이 보이는가뿐 아니라, 어디에 기대어 있는가를 묻게 된다.
그러나 작은 획마다 반드시 풀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화가는 바닥의 감각을 개별 식물의 목록 없이도 만들 수 있다. 이름을 얻기 전의 짧은 흔적들이 넓은 면을 달라지게 한다. 그 면을 단순한 빈 바탕으로 넘기지 않는 데서 작은 것에 대한 읽기가 시작된다.
한 포기를 받치는 것들
풀을 생각하면 눈은 보이는 잎 아래로도 향한다. 땅과 물과 빛, 주변의 다른 생명을 떠올리게 된다. 이때 한 포기가 우주 전체를 물리적으로 담고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존재도 여러 조건과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정도의 생각으로 충분하다.
그림에서도 형상 하나는 홀로 읽히지 않는다. 옆의 어두운 돌 때문에 가느다란 획이 더 밝게 느껴지기도 하고, 넓은 빈 면 때문에 작은 흔적이 더 또렷해지기도 한다. 하나의 뜻이 내부에 완성되어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곁에 놓인 것들과의 차이가 형상의 읽힘에 참여한다.
풍토를 이런 관계의 조건으로 읽으면, 풀은 지역색을 장식하는 소품에 머물지 않는다. 바다와 집과 동물 사이에서 땅의 감각을 바꾸는 형상이 된다. 크기는 작지만 역할까지 작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역할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그림에 풀이 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풀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휘트먼의 「나 자신의 노래」 제6절에서 한 아이가 풀이 무엇인지 묻는다. 화자는 곧장 하나의 답을 주지 않고 여러 짐작을 이어간다. 제31절에서는 풀잎을 별들의 일에 못지않게 바라본다. 작은 것이 큰 것의 설명을 기다리는 대신, 그 자체로 시선의 무게를 얻는다.
이 시와 변시지의 화면을 나란히 놓을 때, 둘을 같은 철학의 증거로 묶을 필요는 없다. 더 유용한 공통점은 쉽게 아는 것처럼 지나쳤던 대상 앞에서 질문이 다시 시작된다는 점이다. 풀이라는 이름을 안다고 그 풀을 다 본 것은 아니다. 작은 획도 한 번 알아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러 짐작을 허용하는 것과 아무 해석이나 같은 값으로 두는 것은 다르다. 시의 언어와 그림의 형식은 각각 읽기의 근거를 준다. 풀을 희망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른 빛과 끊긴 선을 오래 보면 그 희망에 피로와 시간이 함께 들어올 수도 있다. 이름 하나가 다른 느낌들을 막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마른 풀잎색과 살아 있는 풀
마른 풀잎색은 이 아카이브에서 변시지의 색을 읽는 중요한 말이다. 하지만 화면이 그 색이라고 해서 그 안의 모든 풀이 실제로 말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색의 비유와 식물의 생리 상태는 다른 것이다. 색은 화면 전체의 관계를 만들고, 생명의 상태를 단정하는 일에는 다른 근거가 필요하다.
〈조랑말〉(1975)의 지면에는 푸른 기운과 붉고 밝은 흔적들이 함께 있다. 이 초기의 화면을 보면 풍토를 오직 한 가지 색으로만 생각하기 어렵다. 말의 몸과 주변을 잇는 색은 다르지만, 몸이 땅 위에 놓이는 관계는 계속된다. 풍토의 읽기는 색 이름 하나보다 넓어야 한다.
바랜 색에서 시간을 느끼는 것은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어두운 색은 절망이고 밝은 색은 회복이라는 순서로 화가의 마음을 배열할 수는 없다. 같은 색도 획과 간격에 따라 무겁거나 가볍게 다가온다. 풀잎의 비유가 좋은 것은 정답을 고정해서가 아니라, 색 안에서 견딘 시간의 감각을 조용히 열어주기 때문이다.
적은 획이 만드는 땅
〈난무〉의 아래쪽을 부분으로 보면 짧은 획들이 비슷한 길이와 방향으로 반복되면서도 완전히 같지는 않다. 일부는 어둡고 일부는 바탕에 스민다. 이를 모두 풀의 잎으로 세기보다, 바닥이 매끈한 빈 면이 되지 않도록 하는 조형적 작용을 볼 수 있다. 작은 흔적들이 넓은 땅의 밀도를 만든다.
그 흔적의 방향만으로 붓을 아래에서 위로 올렸다고 확정하지는 않는다. 완성된 선은 제작의 순서를 언제나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읽는 것은 획의 시작을 재현하는 증언이 아니라, 획들이 함께 만드는 지면의 느낌이다. 움직임의 흔적과 실제 손의 동작을 구별할 때 분석은 더 가까워진다.
적게 그린다는 말도 생략한 양만을 뜻하지 않는다. 어디에서 획을 멈추고 무엇과 가까이 놓는가가 중요하다. 한 획이 돌 옆에서는 풀처럼 읽히고 넓은 면에서는 지면의 굴곡처럼 읽힐 수 있다. 간결함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아니라, 적은 단서가 서로를 도와 형태를 만드는 상태다.
바람을 재는 대신 느끼게 한다
한쪽으로 이어지는 짧은 획은 주변 나무와 새의 방향에 호응할 수 있다. 그 호응 속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림의 풀은 풍속계가 아니다. 선의 기울기에서 실제 바람의 세기나 정확한 방향을 계산할 수는 없다. 자연의 측정과 회화적 감각은 연결되면서도 다른 일이다.
바람이 느껴지는 방식은 한 가지가 아니다. 거친 하늘의 넓은 획은 큰 움직임을 만들고, 발밑의 짧은 흔적은 가까운 면을 건드린다. 큰 것과 작은 것의 반응을 같이 볼 때 화면의 공기가 여러 층으로 느껴진다. 이는 식물의 민감성을 순위 매기는 일이 아니라 조형의 크기가 감각을 달리하는 일이다.
관객의 눈도 그 층위를 오간다. 수평선을 따라 멀어졌다가 마당으로 돌아오고, 새의 날개에서 땅의 흔적으로 내려온다. 바람은 어느 한 기호의 뜻이 아니라 그 이동을 통해 느껴지는 관계가 된다. 작은 풀 같은 획이 중요한 것은 큰 폭풍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가까운 바람의 자리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다시 자란다는 말의 조심스러움
풀의 시간을 한 계절의 죽음과 다음 봄의 부활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풀에는 한해살이와 여러해살이가 있고, 다시 자라는 방식도 다르다. 오리건주립대학교의 풀 생애주기 자료는 씨앗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살아 있는 조직에서 계속 자라는 과정을 구별한다. 같은 초록이 돌아온 듯 보여도 시간의 구조는 같지 않을 수 있다.
이 차이는 그림의 반복을 생각할 때에도 도움이 된다. 비슷한 모티프가 돌아왔다고 같은 그림이 다시 생긴 것은 아니다. 어떤 선은 이어지고 어떤 관계는 달라진다. 이전 그림을 바탕으로 더하는 일과 같은 대상을 새롭게 시작하는 일도 같지 않다. 반복이라는 한 이름 아래 서로 다른 시간이 놓인다.
다시 자란다는 말에는 조건도 남아 있어야 한다. 모든 생명이 언제나 회복된다는 약속으로 바꾸면, 돌아오지 못한 것들의 자리는 사라진다. 풀이 주는 작은 위안은 불멸의 증명이 아니다. 여기에 아직 자랄 자리가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을 보려면 이미 있는 땅과 흔적부터 살펴야 한다.
작은 것을 위한 시선의 자리
풀 한 포기의 존재론은 작은 것이 큰 것보다 우월하다는 선언이 아니다. 크기로 정해놓은 관심의 순서를 조금 바꾸는 일이다. 산과 하늘을 본 뒤, 그 아래 몸들이 서 있는 면을 본다. 그 면이 배경으로만 남지 않을 때 그림의 세계는 다른 깊이를 얻는다.
이 깊이는 더 많은 이야기를 덧붙이는 데서만 오지 않는다. 무엇인지 확정하기 어려운 짧은 흔적을 그대로 두고, 그 곁에 어떤 밝음이 있는지 볼 수 있다. 모두 설명하지 않아도 관계는 느껴진다. 마른 풀잎색의 넓은 땅은 그 작은 차이들을 지우지 않은 채 이어진다.
하늘에는 새들이 흩어져 있다. 눈은 다시 발밑으로 내려온다. 짧은 획 하나 옆에 밝은 자리가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