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Ⅲ 동물과 생명

Ⅲ 동물과 생명 · 39 / 100

조랑말의 눈

다른 시선 앞에 선다는 것

The Eyes of the Jeju Pony

난무 / Wild Dance · 1997. 하늘의 새떼, 돌담 위에 앉은 새들, 집과 그 안의 작은 인물, 왼쪽의 말. / Birds in the sky and on a stone wall, a house with a small figure within, and a horse on the left.
〈난무〉 · 1997FŪDO 097
조랑말 / Jeju Ponies · 1975. 바위 해안 가까이에 서로 다른 자세로 선 두 마리의 말. / Two ponies standing in different postures near a rocky shore.
〈조랑말〉 · 1975FŪDO 053
열대의 태양 / The Tropical Sun · 1983
〈열대의 태양〉 · 1983FŪDO 008

눈보다 먼저 보이는 방향

〈난무〉(1997)의 말은 목을 굽혀 머리를 위쪽으로 향하고 있다. 시선이 하늘의 새들에게 닿는 듯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먼저 확인되는 것은 몸과 머리의 방향이다. 그림은 말이 방금 고개를 들었다는 앞뒤의 사건이나, 어느 새를 보고 있는지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차이를 남겨두면 시선은 더 흥미로워진다. 눈동자를 정밀하게 읽지 못해도 머리와 귀, 목의 굴곡, 몸의 방향이 어떤 주의를 느끼게 한다. 시선은 눈이라는 작은 부위에만 갇혀 있지 않다. 몸 전체와 그 몸 앞에 열린 공간이 함께 시선을 만든다.

그래서 조랑말의 눈을 읽는 일은 마음을 맞히는 일과 다르다. 슬픈지 기쁜지부터 정하기보다, 무엇을 향할 수 있는 몸으로 그려졌는지 본다. 사람이 보고 있는 쪽과 같은지 다른지, 앞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가려져 있는지 살핀다. 내면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도 눈앞에는 읽을 관계가 많이 남아 있다.

동물을 보는 사람도 보일 수 있다

데리다의 『동물,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자신을 바라보는 고양이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다시 묻는다. 논의의 출발점은 동물 일반이라는 추상보다 실제의 한 고양이다. 동물은 인간이 바라보는 대상이기만 한가. 인간 자신도 다른 생명의 시선 앞에 놓일 수 있다는 질문이 열린다.

이 생각을 그림에 가져오더라도 말이 실제로 관객을 보고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난무〉의 말은 화면 안의 다른 방향을 향한다. 오히려 우리를 향하지 않는 그 방향 때문에, 이 몸에게는 관객의 관심과 별개인 자리가 있는 듯 느껴진다. 모든 존재가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놓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동물의 시선을 존중한다는 말도 그 눈에 깊은 철학을 대신 써넣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존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가 다 안다는 선언은 시선을 다시 빼앗을 수 있다. 한 걸음 물러서는 편이 좋다. 저 몸은 내 해석을 넘어서는 무엇을 향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남기는 것이다.

두 말은 다른 높이를 향한다

〈조랑말〉(1975)에는 두 마리가 있다. 앞쪽 말은 머리를 낮추고 있고, 뒤쪽 말은 목을 세워 다른 높이를 향한다. 푸른 기운이 두 몸과 주위를 잇지만 자세는 같지 않다. 함께 있음은 같은 행동의 반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차이가 있어도 한 장소를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고개를 낮춘 말에게 겸손을, 고개를 세운 말에게 자유를 곧바로 배당하면 두 자세가 도덕의 도표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려간 머리와 세워진 목이 서로 다른 선과 면을 만든다. 그 조형적 차이가 먼저다. 무엇을 느끼는가는 그다음에 열리는 물음이지 자세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답이 아니다.

이 두 말과 1997년의 한 마리를 나란히 보면, 조랑말의 눈이라는 주제가 하나의 도상 공식으로 끝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눈을 얼마나 그렸는가뿐 아니라 몸의 수, 크기, 간격과 주위의 형상이 달라진다. 같은 동물을 그려도 주의가 놓일 수 있는 세계는 매번 다시 구성된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묻는 자리

『장자』 「추수」에서 장주와 혜시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두고 말을 주고받는다. 혜시는 물고기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아는지 묻고, 장주는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 되묻는다. 다른 생명의 마음뿐 아니라 서로의 앎을 판단하는 자리가 함께 문제가 된다.

이 대화를 말의 눈 앞에 놓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결론도 모든 것을 공감할 수 있다는 결론도 서두르기 어렵다. 우리는 몸의 방향과 주변을 보고 어떤 상태를 짐작한다. 그 짐작은 관찰에서 시작되지만 관찰을 넘어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의 거리를 스스로 아는 것이다.

그림을 보는 말도 그만큼 조심스러워질 수 있다. 말은 새를 부러워한다보다, 머리가 새들이 있는 쪽을 향한다는 묘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 거리에서 동경을 느낀다고 덧붙일 수 있다. 몸의 방향은 그림에 남고, 동경이라는 해석은 관객의 책임 아래 놓인다.

선이 보인다고 고삐는 아니다

말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묶여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움직임을 그리지 않은 것과 이동을 막는 줄을 그린 것은 다르다. 〈난무〉에서 말 곁의 긴 선들을 볼 때에도 선의 끝과 연결을 살펴야 한다. 지면이나 다른 사물의 선을 확인 없이 고삐로 바꾸면, 그림에 없던 구속의 이야기가 생길 수 있다.

반대로 고삐가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말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다. 그림은 소유 관계를 모두 기록하는 문서가 아니다. 보이는 구속과 실제의 사육 조건, 해석으로 느끼는 자유는 서로 다른 층위다. 그 층위를 구별하면 말에게 붙이는 이야기의 무게도 줄어든다.

그림이 허락하는 가까운 관계부터 볼 수 있다. 말은 집 밖에 있고 사람은 집의 열린 부분에 있다. 둘의 머리는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는다. 이 간격은 곧 소유도 절대적 평등도 아니다. 그러나 두 몸을 서로 다른 중심으로 보게 하는 충분한 거리다.

단순한 눈과 사라지지 않는 얼굴

작게 그린 말의 눈은 복제 이미지에서 점이나 짧은 획으로 보일 수 있다. 어떤 부분은 인쇄의 해상도로 구별하기 어렵다. 보이지 않는다고 곧바로 화가가 의도적으로 지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부의 생략, 작은 크기, 복제의 한계를 차례로 구별해야 한다.

〈열대의 태양〉(1983)에서는 말의 머리와 목, 다리의 방향이 집과 나무의 큰 덩어리 곁에서 읽힌다. 눈의 작은 흔적을 따로 떼어 확대하는 것만으로 이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 얼굴은 한 점의 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를 받치는 몸과 주변의 간격 속에서 나타난다.

적게 그렸다고 감정의 가능성이 무한해지는 것도 아니다. 머리의 방향과 몸의 균형은 여전히 어떤 읽기는 돕고 다른 읽기는 어렵게 한다. 여백은 아무 말이나 넣을 허락이 아니다. 적은 단서를 오래 살피게 하는 여지다. 이 여지에서 눈은 작지만 시선의 문제는 작지 않다.

분신을 넘어 동반자로

말에게서 화가를 떠올리는 읽기는 정서적으로 깊을 수 있다. 하지만 화가의 분신이라는 이름이 말 자신의 차이를 덮을 때, 동행은 혼자 말하는 일이 된다. 둘이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둘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닮지 않은 채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점도 보아야 한다.

같은 바람을 맞는다는 표현도 그래서 단순한 동일화가 아니다. 사람과 말은 다른 몸으로 그 바람을 겪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누군가의 슬픔을 없애지 못해도 곁에 있는 것처럼, 다른 존재의 감각을 모두 알지 못해도 관계는 가능하다. 다 안다는 말보다 무엇이 필요한지 더 살피려는 태도가 동행에 가까울 수 있다.

이것은 그림 속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말을 돌보았는지에 대한 증언은 아니다. 그림이 관객에게 열어주는 윤리적 질문이다. 다른 몸을 바라보면서 내 위안만 얻고 끝나는가. 아니면 그 몸이 내 이야기 밖에서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는가. 시선의 변화는 그 질문을 남길 수 있다.

보는 자리 하나를 더 남긴다

조랑말의 눈을 오래 본 뒤에 얻는 것은 그 마음에 대한 완전한 번역이 아니다. 인간의 눈만으로 화면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감각이다. 말의 머리가 향하는 쪽에는 또 다른 간격이 열려 있다. 그 간격을 따라가면 내가 중요하게 보던 대상이 잠시 주변으로 물러날 수 있다.

그 변화는 크지 않다. 그림 속 모든 존재를 평등하다고 선언하는 대신, 서로 다른 방향을 조금 더 보게 된다. 같은 장소가 누구에게나 같은 풍경일 필요는 없다. 말에게 남겨진 시선의 자리를 인정할 때, 사람의 자리도 더 정확해진다. 나는 모든 것을 보는 자가 아니라 그 곁에서 보는 자가 된다.

말의 머리는 위쪽을 향한다. 사람은 집 안에 앉아 있다. 새들 사이에는 아직 넓은 하늘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