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동물과 생명 · 38 / 100
하늘의 새떼
여럿이 되면서도 하나씩 남는 것
A Flock of Birds in the Sky
먼저 무리가 보인다
〈난무〉(1997)를 멀리서 보면 검은 새들이 넓은 하늘을 채운다. 가까이 가면 새마다 펼친 날개의 각도가 다르고, 몸의 기울기도 다르다. 한 덩어리로 보이던 무리는 여러 형상으로 풀린다. 이 그림의 새떼는 개체가 사라진 집단이 아니다. 여러 마리를 함께 보면서도 한 마리를 다시 찾아볼 수 있는 배열이다.
새의 숫자만으로 분위기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같은 수라도 가까이 모였는지 멀리 흩어졌는지에 따라 화면은 다르게 느껴진다. 숫자는 세는 눈을 요구하고 간격은 머무는 눈을 요구한다. 변시지의 새떼를 읽으려면 두 눈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몇 마리인가라는 물음 뒤에 서로 어떻게 놓였는가라는 물음이 온다.
한 마리는 고독이고 여러 마리는 자유라는 식의 대응은 이 차이를 지나쳐버린다. 홀로 떨어진 새가 반드시 버려진 것도 아니고, 무리가 반드시 평화로운 것도 아니다. 한 화면의 의미는 수량에 붙어 있는 정답보다, 그 수량이 만드는 밀도와 방향과 틈에서 생긴다.
새 사이의 하늘
〈난무〉에는 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와 새 사이로 마른 풀잎색의 바탕이 이어진다. 어떤 간격은 좁고 어떤 간격은 넓다. 이 빈 면들을 따라가면 검은 형상을 따라갈 때와 다른 길이 생긴다. 새가 하늘을 채우는 동시에, 하늘이 새들을 떨어뜨려 놓는다.
여백을 아무것도 없는 자리라고만 보면 이 일을 놓친다. 두 날개 사이의 간격은 충돌처럼 느껴지는 가까움과 서로 지나갈 수 있을 듯한 열림을 가른다. 물론 그림 속 새가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멈춘 형상들 사이에서 눈이 이동하며 가능한 움직임을 읽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새떼의 리듬은 검은 획만의 성질이 아니다. 획과 획 사이에 남긴 밝음도 리듬을 만든다. 큰 날개 옆의 작은 틈, 듬성한 무리 뒤의 넓은 면. 그림을 보며 느끼는 속도는 무엇을 그렸는가와 무엇을 사이에 두었는가가 함께 정한다.
날아 있는 새와 앉아 있는 새
이 그림의 새들이 모두 공중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래쪽 돌담 위에도 여러 새가 놓여 있다. 높이 흩어진 날개와 돌에 가까운 작은 몸들이 한 화면에 함께 있다. 하늘과 땅, 운동과 정지를 서로 다른 종의 몫으로 완전히 나누기 어렵다. 같은 새의 형상이 서로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돌담 위 까마귀〉(1983)에서는 담의 긴 방향이 더 두드러진다. 새들은 한 줄로 이어지지만 서로 같은 자세를 복제하지 않는다. 돌의 높낮이와 작은 몸의 방향이 함께 변한다. 1997년의 넓은 군무와 비교하면, 새떼를 만드는 일이 하늘을 채우는 일에만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낮은 경계를 따라 이어지는 무리도 있다.
앉은 새를 날지 못하는 새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정지를 가능성의 소멸로 읽을 필요도 없다. 화면은 출발과 도착 중 어느 순간인지 확정하지 않는다. 잠시 모여 있는 자리 자체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무는 몸들을 먼저 본 뒤에, 움직임을 상상할 수 있다.
새떼의 과학과 그림의 질서
실제 새떼를 연구하는 일은 화면의 리듬을 읽는 일과 다르다. 발레리니와 동료들의 2008년 찌르레기 현장 연구는 삼차원 위치를 재구성해, 각 새가 평균 여섯에서 일곱 이웃과 상호작용한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특정 종과 관찰 조건에 관한 연구이며 모든 새의 보편 법칙으로 옮길 수는 없다.
〈난무〉의 까마귀들에게 그 숫자를 그대로 적용할 근거는 없다. 그림은 위치를 그려놓았지만 실제 시간에 따른 반응을 측정한 자료는 아니다. 과학이 밝힌 관계는 그림을 새롭게 질문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이 그 연구를 먼저 증명했다고 말하면 회화와 실험의 서로 다른 일을 혼동하게 된다.
여기에서 유용한 것은 지휘자 없는 세계라는 찬양보다 가까운 관계를 보는 습관이다. 한 새를 볼 때 옆의 새와의 간격을 함께 본다. 전체의 흐름을 볼 때 그 흐름에 순순히 맞지 않는 방향도 찾는다. 무질서와 질서라는 두 이름 사이에는 구체적으로 살펴야 할 차이가 많이 남아 있다.
반복되는 획, 반복되지 않는 몸
새의 형상은 몇 개의 어두운 획으로 줄어 있지만 모두 같은 표시는 아니다. 길게 벌어진 날개, 짧게 접힌 듯한 날개, 기울어진 몸이 다르게 놓인다. 가까이서 보면 한 획처럼 보이던 자리에도 두꺼워지거나 끊기는 변화가 있다. 간결한 형태와 반복 가능한 기호는 같은 말이 아니다.
붓이 빠르게 움직인 듯한 인상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완성된 화면만으로 모든 새가 한 번의 붓질에 그려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감상에서 중요한 것은 제작 동작을 재연하는 주장보다, 눈앞의 흔적들이 어떤 속도와 무게를 느끼게 하는가이다. 획의 결과와 획을 만든 실제 순서는 구별된다.
서예에 빗댄 읽기도 이런 수준에서 가능하다. 검은 획과 밝은 간격이 번갈아 이어지고, 비슷한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며 흐름을 만든다. 그렇다고 새들이 실제 글자이거나 하나의 문장으로 해독되는 것은 아니다. 읽을 듯하면서도 끝내 그림으로 남는 것. 그 사이에서 새는 획이 되고 획은 다시 새가 된다.
집 안의 사람, 집 밖의 말
〈난무〉의 오른쪽에는 집이 있고, 열린 공간에 사람이 앉아 있다. 말은 집 바깥의 왼쪽 아래에 있다. 하늘의 새들만 보면 이 서로 다른 머묾을 놓치기 쉽다. 집, 사람, 말, 돌담 위의 새를 따라가면 화면의 아래쪽에도 여러 관계가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은 하나이고 새는 여럿이라는 대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의 옆에는 건물이 있고, 앞쪽에는 마당이 있으며, 말과의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집 안에 있다는 사실은 완전한 고립을 뜻하지 않고, 새들이 여럿이라는 사실도 완전한 합일을 뜻하지 않는다. 몸이 놓인 자리를 함께 읽어야 대조가 구체적이 된다.
이 서로 다른 위치를 대위법에 비길 수 있다. 다만 음악의 기법을 회화가 그대로 수행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의 리듬이 다른 리듬을 지우지 않고 함께 느껴진다는 비유다. 앉아 있는 몸을 본 뒤 하늘로 눈을 올리면 새의 움직임이 달라지고, 새를 본 뒤 집으로 돌아오면 사람의 자리가 달라진다.
함께 있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
무리를 하나의 이상적인 공동체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새들의 정치나 감정은 이 화면에서 확인할 수 없다. 강요도 갈등도 없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관객의 소망에 가깝다. 그림이 실제로 제공하는 것은 여러 몸이 구별된 채 한 공간에 놓인 형식이다.
그 형식만으로도 생각할 거리는 충분하다. 여러 마리가 있다고 해서 한 마리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체가 있다고 해서 부분이 언제나 그 전체에 복종하는 것도 아니다. 한 새의 다른 방향이 전체의 흐름을 잠시 끊고, 그 끊김이 무리를 더 살아 있게 느끼게 할 수 있다.
이 읽기는 인간에게도 곧장 교훈을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 있는 것을 볼 때 차이를 얼마나 남겨두는가 묻는다. 조화라는 이름으로 지워버린 작은 어긋남은 없는가. 변시지의 새떼 앞에서 우리는 하나와 여럿을 고르는 대신, 두 크기 사이를 오가는 시선을 연습할 수 있다.
다시 한 마리를 본다
처음에는 하늘 전체가 움직이는 듯했다. 이제 그 안에서 한 새를 골라본다. 옆의 새와 날개의 방향이 다르고, 아래에는 밝은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따라가면 다시 다른 새가 나온다. 전체를 보는 일은 한 마리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한 마리에서 다른 마리로 관계를 이어가는 일이 된다.
〈난무〉라는 제목에는 어지러움과 춤이 함께 있다. 눈은 흩어짐을 느끼다가 흐름을 보고, 흐름을 따라가다가 다시 어긋남을 발견한다. 이 왕복이 끝나지 않기에 그림은 한 번의 감탄으로 소진되지 않는다. 멈춘 새들이 우리가 보는 시간 안에서 자꾸 다른 배열로 다가온다.
돌담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 위에는 날개를 편 새가 있다. 두 새 사이로 밝은 하늘이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