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동물과 생명 · 37 / 100
나비의 꿈
물화와, 지워지지 않는 차이
The Butterfly Dream
꿈에서 깬 뒤에도 남는 물음
『장자』 「제물론」의 끝에서 장주는 꿈속의 나비가 된다. 깨어난 뒤에는 자신이 나비를 꿈꾸었는지, 나비가 자신을 꿈꾸고 있는지 묻는다. 그러나 글은 둘 사이에 분별이 있다는 말도 남긴다. 변화는 물화라고 불리지만 차이의 자취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모든 것은 하나라는 결론으로 너무 빨리 닫지 않는 편이 좋다. 나비였을 때의 자리와 깨어난 사람의 자리가 다르기에 물음이 생긴다. 지금 확실하다고 여기는 나의 위치도 다른 경험 앞에서 흔들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구별을 없애는 명령보다, 구별하는 자신을 다시 보는 일이다.
그림을 볼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산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뒤에는 그 산을 바라보는 작은 사람에게 눈이 간다. 다시 보면 산의 굴곡이 몸의 굴곡처럼 다가온다. 산이 실제 몸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화면을 바라보는 나의 자리가 달라진 것이다.
산은 몸을 닮지만 몸은 아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992)의 산에는 깊은 골과 길게 이어지는 능선이 있다. 오른쪽 아래 사람은 다리를 앞으로 두고 상체를 낮추고 있으며, 말은 그 곁에서 머리를 내린다. 큰 산의 굴곡과 작은 몸의 굽힘을 함께 볼 때 둘 사이에 닮음이 생긴다. 그것은 실제 크기의 동일함이 아니라 시선이 만드는 형태의 관계다.
닮음은 어느 한쪽을 지워야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산을 사람이라고 확정하면 바위의 거침과 지형의 무게가 줄어든다. 사람을 자연의 일부라고만 하면 그 몸이 점유한 작은 자리의 긴장이 약해진다. 둘은 서로를 비추면서도 다른 것으로 남을 수 있다. 그림은 바로 그 사이를 오래 보게 한다.
이 관계를 몸이 된 풍토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산의 숨은 해부도를 완성했다는 선언이 아니다. 자연을 바깥의 풍경으로만 보던 눈에 몸의 감각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반대로 자기 몸만 보던 눈에는 그것을 둘러싼 땅의 크기가 들어온다. 닮음은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하나의 색 안에 남는 구별
이 작품에서 산과 하늘과 바다는 가까운 색조를 나누어 가진다. 그렇다고 서로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암벽의 어두운 획과 하늘의 비스듬한 붓질, 수면의 넓은 밝음이 다른 면을 만든다. 색의 친연성과 형태의 차이가 동시에 작동한다. 공통된 색이 거리를 없애기보다 거리를 다른 방식으로 느끼게 한다.
마른 풀잎색이라는 말은 이 가까움을 읽는 하나의 언어다. 햇볕과 바람에 바랜 시간을 연상시키지만, 모든 사물이 같은 재료라는 뜻은 아니다. 같은 바탕 위에서도 돌은 무겁게, 물은 넓게, 말은 가느다란 다리로 구별된다. 이 작은 차이들이 없다면 함께 있다는 관계 자체도 알아보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색채의 절제를 만물의 동일함으로 곧장 번역할 필요는 없다. 차이를 크게 벌리지 않으면서도 사라지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서로 닮은 세계 안에서 각자의 윤곽을 남기는 것. 물화의 질문을 회화로 가져온다면, 이런 공존의 형식부터 살피는 편이 더 섬세하다.
꿈의 색이라고 부르기 전에
낯선 색의 풍경을 몽환적이라고 느끼는 일은 가능하다. 우리가 익숙하게 기억하는 하늘과 바다의 색에서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상의 몽환성과 화가가 실제 꿈에서 얻은 이미지는 다르다. 하나는 화면 앞의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에 관한 진술이다. 둘을 잇기 위해서는 별도의 기록이 필요하다.
이 작품의 낯섦은 눈앞의 형식만으로도 살필 수 있다. 산과 물의 색은 가깝고, 작은 몸은 가장자리로 밀려 있으며, 하늘의 획은 고요한 빈 면을 허락하지 않는다. 익숙한 대상들이 낯선 관계로 놓여 있다. 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도 그림은 이미 우리의 보통 시선을 바꾸고 있다.
화가가 무엇에 취했는지, 어떤 환상을 보았는지를 알아야만 색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감이 만들어낸 화면의 판단을 먼저 읽을 수 있다. 어떤 차이를 줄이고 어떤 선을 남겼는가. 어디를 넓히고 어디에 몸을 놓았는가. 몽환적인 느낌도 이런 구체적인 선택을 지나 우리에게 온다.
화면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
그림 속에 들어간 것 같다는 말은 감상의 강도를 표현한다. 그러나 관객은 여전히 그림 앞에 있고, 캔버스의 경계도 남아 있다. 그 경계가 사라져야만 깊은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바깥에 있으면서 안쪽의 거리를 느낄 수 있다. 물리적 이동 없이 시선의 자리가 바뀌는 것이다.
1992년 작품의 작은 사람에게 눈을 두면 거대한 산이 더 무거워진다. 산을 먼저 오래 보면 사람의 자리가 더 작아진다. 시선은 이 두 크기 사이를 왕복한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머물지 못하는 왕복이 그림의 긴장을 만든다. 관객의 몸은 정지해 있어도 감상의 거리는 계속 달라진다.
호접몽과의 비교는 여기에서 유용하다. 나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대상을 판단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다른 형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나의 판단도 달라지는가. 이 물음은 관객을 나비로 바꾸지 않는다. 다만 자기 시선이 세계를 보는 유일한 자리라는 확신을 조금 느슨하게 한다.
가벼움과 무게를 함께 본다
나비의 가벼움과 산의 무게를 서로 반대되는 본질로 고정할 필요는 없다. 그림에서 무게는 대상의 이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작은 검은 형상이 넓은 밝은 면보다 강하게 눈을 붙잡을 수 있고, 큰 산도 끊기는 획 사이에서 풀려 보일 수 있다. 조형의 무게와 실제 물체의 무게는 같은 척도가 아니다.
산의 능선을 따라가던 눈이 거친 획의 틈에서 잠시 멈춘다. 덩어리로 보이던 것이 여러 붓질로 나뉜다. 멀리서는 바위였던 것이 가까이에서는 물감의 자리가 된다. 형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형상을 보면서 재료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끝내 밀어내지 않는 겹침이 생긴다.
이 겹침은 꿈과 현실을 완전히 나누거나 완전히 합치는 설명보다 그림에 가까울 수 있다. 물감인 것을 알면서 산을 보고, 산을 보면서 몸을 연상한다. 보는 일은 한 번의 이름 붙이기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읽기가 들어올 자리를 남긴 채 같은 화면을 다시 만난다.
나의 뜻으로 모두를 채우지 않는 일
물화의 생각을 인간이 자연을 모두 이해한다는 자신감으로 바꾸면 역설이 생긴다. 나비도 말도 산도 모두 나라고 말하는 순간, 다른 존재가 나와 다를 가능성은 줄어든다. 친밀함이 소유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 닮음을 느끼되 상대에게 남아 있는 낯섦을 함께 인정해야 하는 까닭이다.
산이 몸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산의 뜻이 모두 읽힌 것은 아니다. 사람 곁에 선 말 역시 인간을 위로한다는 역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림 속 존재를 가깝게 느끼는 일과 그 존재를 내 이야기 안에 완전히 넣는 일은 다르다. 남겨둔 차이가 관계를 막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계속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장에서 경계를 허문다는 말은 경계의 소멸보다 경계의 재검토에 가깝다. 어디까지 보았고 어디서부터 뜻을 보탰는가. 무엇을 닮았다고 느꼈고 무엇은 여전히 다른가. 이런 질문을 남기면 철학은 그림을 덮는 이름이 아니라, 그림 앞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길이 된다.
같은 그림을 다르게 만나는 아침
호접몽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정답보다 시선의 유연함이다. 내가 그린 세계라고만 여겼던 것을, 나의 몸을 둘러싸고 바꾸어온 세계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화가의 선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풍토와 제작의 관계는 한쪽이 다른 쪽을 자동으로 그린다는 말보다 복잡하다.
변시지의 산 앞에서 그 복잡함을 감당하는 방법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산을 산으로 보고, 닮은 몸을 느끼고, 다시 산으로 돌아온다. 작은 사람에게 눈을 두었다가 말에게 자리를 내준다. 서로를 완전히 설명하지 않는 형상들이 한 화면을 함께 지탱하고 있다.
산은 그대로 있다. 사람의 다리 앞에 작은 땅이 남아 있다. 말의 머리는 그 땅 가까이 내려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