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Ⅲ 동물과 생명

Ⅲ 동물과 생명 · 36 / 100

게의 형상

작은 몸이 여는 다른 방향

The Form of the Crab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Where Do We Come From, and Where Are We Going? · 1992. 큰 절벽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른쪽 아래 바위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사람과 그 곁의 말이 있다. 왼쪽 먼 수면에 작은 배가 보인다. / A large cliff occupies most of the picture. At lower right a seated figure bows its head, with a pony beside it. A tiny boat appears on the distant water at left.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1992
어느 흥겨운 바닷가의 한나절 / A Merry Afternoon by the Sea · 1979
〈어느 흥겨운 바닷가의 한나절〉 · 1979FŪDO 080

산에서 바위 틈으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992)에서 산은 화면을 크게 차지한다. 오른쪽 아래의 사람과 말은 그에 비해 작다. 그러나 눈을 산에서 해안으로 내리면 다른 크기의 풍경이 열린다. 바위가 꺾이는 곳, 물과 돌이 맞닿는 가장자리, 몸을 잠시 둘 수 있을 듯한 좁은 자리. 하나의 그림 안에서도 보는 높이를 바꾸면 세계의 크기가 달라진다.

게를 생각하는 일은 그 낮은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다. 산을 배경으로 삼는 인간의 시선과, 바위 하나의 턱을 넘어야 하는 작은 몸의 조건은 같지 않다. 우리에게 사소한 굴곡이 다른 생명에게는 길이거나 장애물일 수 있다. 작은 것을 크게 찬양하기보다, 큰 풍경을 작은 몸의 높이에서 다시 나누어 보는 일이다.

이렇게 바라보면 풍경의 중심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멀리서 먼저 보인 산이 전부를 대표하지 않고, 사람 곁의 말만이 생명의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는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가장자리에도 시선이 머물 수 있다. 게라는 주제는 그곳을 보게 하는 문턱이다. 화면에 없는 동물을 보태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중심으로 보아왔는지 묻는 일이다.

옆으로 간다는 것

게를 모두 같은 걸음으로 묶을 수는 없다. 게 50종을 관찰한 한 비교 연구에서는 옆으로 이동하는 경향과 앞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함께 확인되었다. 옆걸음은 중요한 특징이지만 게 전체의 유일한 이동 방식은 아니다. 다른 생명의 몸을 생각할 때에는 익숙한 한 장면이 그 생명 전체를 대신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옆으로 간다고 목적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옆이라는 말은 몸의 방향과 이동의 방향을 비교할 때 생긴다. 사람이 정면이라고 부르는 쪽을 다른 몸도 반드시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이 차이에서 얻을 수 있는 생각은 단순하다. 길은 하나의 자세에만 맞춰져 있지 않다.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몸이 길의 가능성을 다시 드러낸다.

이것을 회화로 옮기면, 옆걸음은 관객의 시선에도 가능한 운동이 된다. 인물에서 곧장 수평선으로 가던 눈이 잠시 돌의 결을 따라간다. 가장 큰 형상을 확인한 뒤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 옆에 남은 작은 간격을 본다. 앞으로 더 가는 대신 옆을 더 보는 것. 감상의 깊이는 그런 작은 방향 전환에서 생길 수 있다.

경계는 누구에게나 같은 곳이 아니다

1992년 화면의 해안은 지도 위의 가느다란 선처럼만 보이지 않는다. 암벽의 아래가 들쑥날쑥하고, 밝은 물의 면이 그 곁으로 들어온다. 땅과 물을 나누는 경계에 두께가 생긴다. 멀리서 보면 선이지만 가까이 보면 여러 굴곡과 접촉이 이어지는 자리다. 그 두께를 읽는 순간 해안은 배경에서 장소로 바뀐다.

그러나 물과 뭍 사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경계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머물기 어려운 곳이 되기도 한다. 어느 생명에게 필요한 조건이 다른 생명에게는 부담일 수 있다. 두 세계를 한꺼번에 누리는 특권이라는 말만으로는, 그 사이에서 몸을 지키는 구체적인 일을 놓친다.

변시지의 풍토를 읽을 때에도 이 차이는 중요하다. 같은 바다 앞에 있어도 사람과 말, 작은 해안 생명은 같은 방식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풍토를 함께 산다는 것은 같은 운명을 복사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의 장소가 서로 다른 몸에 어떤 조건이 되는지 살피는 것이다. 함께 있음의 의미는 그 차이를 지우지 않을 때 더 깊어진다.

껍데기를 벗는 시간

갑각은 보호와 성장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의 던저니스게 설명에 따르면, 게는 성장하면서 기존의 외골격을 벗고 새 껍데기가 굳는 동안 몸을 보호할 곳을 찾는다. 여기에는 벗어남뿐 아니라 다시 보호받아야 하는 시간이 있다. 단단한 것을 버리는 순간만 떼어내면 변화의 절반만 보게 된다.

화가의 변화에 탈피라는 비유를 쓸 수도 있다. 다만 이전의 그림을 모두 버려야 할 껍데기로 만들 필요는 없다. 배운 관찰과 손의 습관은 다른 화면에서도 작용할 수 있다. 바뀌는 것은 과거 전체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어떤 관계로 다시 놓는가일 수 있다. 새로운 화풍은 빈손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의 한계도 남겨두어야 한다. 게의 성장을 예술가의 결단과 같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몸의 변화와 화풍의 선택은 다른 과정이다. 두 과정을 나란히 놓을 때 얻는 것은 인과의 설명이 아니라 질문이다. 달라지는 동안 무엇이 몸을 지탱하는가. 벗어난 뒤에도 살아갈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작은 웃음을 남기는 풍경

〈어느 흥겨운 바닷가의 한나절〉(1979)에서는 제목부터 다른 호흡이 열린다. 화면 왼편의 나무와 새들, 멀리 떨어진 배, 넓게 이어지는 수면을 따라 눈이 움직인다. 이것을 비극의 장면으로만 정리하면 흥겨움이라는 제목이 열어둔 여지를 잃는다. 거친 선과 밝은 기운이 함께 있을 수 있다.

게의 옆걸음에서 웃음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의 예상이 조금 어긋났기 때문일 수 있다. 익숙한 앞뒤의 질서에서 벗어난 움직임이 눈을 새롭게 한다. 그러나 웃음을 느끼는 관객과 우스꽝스럽다고 규정되는 동물은 구별해야 한다. 작은 생명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변시지의 그림에도 한 가지 정서만 배당하지 않는 편이 좋다. 기다림 사이에 한낮이 있고, 거센 획 사이에 가벼운 틈이 있을 수 있다. 웃음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슬픔이 화면의 모든 것을 대신 설명하지 못하게 한다. 한 사람의 세계를 깊게 읽는 일에는 이런 다른 온도를 남겨두는 일도 포함된다.

미물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기

미물이라는 말에는 이미 보는 사람의 크기가 들어 있다. 작아서 하찮다는 판단과 작아서 놓치기 쉽다는 사실은 다르다. 손바닥보다 작은 몸에도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하는 일이 있다. 그 일을 인간의 거대한 서사로 바꾸어야만 관심을 줄 수 있다면, 작은 것의 고유한 크기는 다시 사라진다.

게를 화가의 분신이라고 읽는 해석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해석이 게의 전부가 될 필요는 없다. 고독, 저항, 자유라는 낱말을 붙이기 전에 서로 벌어진 다리와 낮은 몸, 바닥과 닿는 방식을 먼저 상상해볼 수 있다. 상징은 형태를 없애는 이름이 아니라 형태에 다시 돌아가게 하는 질문이어야 한다.

이 원칙은 작품 속 작은 배나 새에도 이어진다. 작다는 이유로 의미가 적은 것도 아니고, 작은 것마다 우주 전체를 대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형상은 그저 다른 형상 옆에 자리를 마련한다. 크게 말하지 않으면서 화면의 관계를 조금 바꾸는 일. 작은 것의 힘은 그 정도의 변화에서도 충분히 드러날 수 있다.

바위의 윤곽을 다시 읽는다

1992년의 산으로 돌아가면, 산 아래 해안은 사람과 말의 자리와 이어져 있다. 산의 거대함과 작은 몸의 유한성을 대조하는 읽기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 대조만으로 끝내면 둘 사이의 땅이 사라진다. 몸이 놓인 가까운 지면과 멀리 솟은 암벽을 잇는 굴곡도 그림을 구성한다.

풍경을 관계로 읽는다는 것은 그 중간을 생략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과 자연이라는 두 항만 놓으면 돌의 틈, 몸의 높이, 물의 가장자리는 설명의 배경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눈이 지나가는 곳은 바로 그런 구체적인 자리다. 거대한 뜻은 작은 접촉들을 거쳐야 화면에 닿는다.

게의 형상이라는 주제는 그래서 확정된 정답보다 읽기의 습관을 바꾼다. 화면에 작은 생명이 보인다면 그것이 놓인 표면까지 함께 본다. 보이지 않는다면 있다고 만들어 넣지 않는다. 대신 그 생명을 생각하며 새롭게 보게 된 해안의 결을 남긴다. 상상은 관찰을 대신하지 않고 관찰의 방향을 열어준다.

다른 방향도 길이 된다

옆으로 간다는 비유가 남길 것은 성공의 교훈이 아니다. 중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새로운 예술이 생긴다는 약속도 아니다. 다른 방향으로 몸을 두는 순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조건을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에는 막힌 자리도 쉬어야 할 때도 포함된다.

변시지의 해안을 그 가능성의 자리로 읽을 수 있다. 먼 바다를 바라보는 눈과 발밑을 살피는 눈은 서로를 대신하지 않는다. 하나는 거리를 열고 다른 하나는 접촉을 찾는다. 두 시선이 번갈아 움직일 때, 바다는 막연한 운명이 아니고 땅은 단순한 근원이 아니게 된다. 몸이 지나는 장소가 된다.

눈은 산 아래로 내려온다. 밝은 물이 바위의 가장자리에 닿아 있다. 조금 옆으로, 돌의 굴곡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