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동물과 생명 · 35 / 100
소와 풀
먹는 몸과, 그 몸을 살게 하는 자리
Cattle and Grass
먼저, 소는 고개를 들고 있다
〈해촌〉(2002)의 오른쪽 아래에는 뿔이 있는 소가 있다. 소의 머리는 올라가 있다. 왼쪽의 말은 고개를 낮추고, 가운데 길에는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보인다. 돌담은 두 동물이 놓인 땅과 사람이 선 길을 나눈다. 이 그림은 소가 풀을 뜯고 있다는 설명보다 먼저, 서로 다른 세 몸의 방향을 보게 한다.
고개를 숙인 동물을 모두 소라고 읽거나, 소라면 늘 풀을 먹는다고 설명하면 실제 장면은 지워진다. 이 작품에서 소의 입이 풀에 닿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먹는 생명이라는 일반적 지식과 지금 그려진 자세를 구별해야 한다. 그러면 머리를 든 채 있는 이 잠깐의 장면도 자기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먹는 모습이 없다고 해서 먹이와의 관계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몸이 서 있는 땅과 담으로 나뉜 자리는 그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소와 풀’은 특정 동작을 확정하는 제목보다, 눈앞의 몸이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는가를 묻는 에세이의 제목이 된다.
풍경을 보는 눈과 먹이를 찾는 몸
관객에게 풀은 풍경의 작은 무늬일 수 있다. 그러나 먹는 몸에게 식물은 살아가는 조건이다. 소는 되새김을 하는 반추동물이며, 위는 네 개의 독립된 위가 아니라 기능이 다른 네 구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생물학적 사실은 평온한 표정의 설명이 아니다. 몸이 주위의 물질에 의존한다는 구체적인 출발점이다.
〈해촌〉의 땅에서는 풀의 종류나 먹이의 양을 판별하기 어렵다. 그려진 짧은 획을 모두 특정 식물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는 동물이 몸만으로 자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화면을 다시 본다. 작게 그려진 주변의 땅이 그때 단순한 배경보다 중요한 자리가 된다.
이것은 동물을 인간의 교훈으로 바꾸는 읽기와 다르다. 소가 겸손해서 고개를 숙인다거나 지혜로워서 느리다는 설명보다, 먹고 쉬며 주위에 의존하는 몸을 먼저 생각한다. 생명의 의미는 높은 상징에만 있지 않다. 오늘 몸을 유지하게 하는 작은 조건들에도 있다.
돌담이 나눈 자리
〈해촌〉의 돌담은 길의 양옆에서 굽어 간다. 사람은 가운데에 있고 동물들은 양쪽에 떨어져 있다. 집들은 더 멀리 모여 있으며, 그 너머에 바다와 배가 놓인다. 가까운 생활의 구획과 먼 바다의 열림이 함께 보인다. 이 화면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자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담은 단순한 분리의 표지가 아니다. 길을 알아보게 하고, 각각의 몸이 놓인 자리를 구별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둘 사이를 가로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로 지나갈 수 있는지 드러낸다. 함께 사는 장소는 차이가 없는 장소가 아니다. 여러 몸이 다른 자리를 갖되 서로의 주변이 되는 장소일 수 있다.
이 구획을 실제 소유관계의 지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담과 집과 길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이 장소를 만들고 고쳐왔음을 생각하게 한다. 풍토는 바람과 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또는 서로를 제한하도록 만들어진 구조도 함께 들어온다.
작은 소와 크게 그려진 황소
파울루스 포터의 〈황소〉(1647)는 소를 크게 그려 주목하게 한다. 마우리츠하위스는 이 평범한 소재가 거대한 화면의 중심이 된 점과 세밀한 관찰을 설명한다. 자연주의적 묘사를 단지 인간이 동물을 객체로 만드는 방식이라고만 읽으면, 동물 한 몸에 기울인 주의도 놓치게 된다.
변시지의 〈해촌〉에서는 소가 화면 전체를 차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관심이 적다고 말할 수는 없다. 뿔과 등과 다리의 짧은 선이 오른쪽 아래의 자리를 분명하게 만든다. 포터가 몸의 크기와 세부로 시선을 모은다면, 변시지는 주변과의 거리 속에서 작은 몸을 다시 찾게 한다. 크고 작은 두 형식은 서로 다른 주의의 방법이다.
소를 노동이나 수행의 상징으로 읽는 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택하기 전에 이 소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쟁기나 목동이 없는 장면에 일을 시키는 사람을 넣을 수는 없다. 다른 전통의 상징을 빌리더라도 이 화면이 말하지 않는 것은 남겨두어야 한다.
반추는 같은 것을 삼키는 반복이 아니다
먹이를 다시 씹는 반추는 한 번 삼킨 것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일만은 아니다. 먹이가 몸 안에서 처리되는 과정에 속한다. 그러나 이 생물학적 과정을 회화의 제작 순서와 곧바로 맞출 수는 없다. 소화와 그림은 서로 다른 일이다. 반추를 비유로 쓰려면 무엇이 닮았고 무엇이 다른지 먼저 밝혀야 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 서문 8절에서 읽기를 예술로 실천하는 데 필요한 태도를 반추에 비유한다. 한 번 읽었다고 뜻을 다 해독한 것은 아니라는 맥락이다. 이 비유를 회화로 옮기면, 같은 그림으로 돌아와 처음 보지 못했던 관계를 다시 살피는 일을 생각할 수 있다. 변시지가 이 구절을 따랐다는 주장은 아니다.
처음에는 말과 소를 서로 반대되는 상징으로 보았을 수 있다. 다시 보면 한쪽의 낮은 머리와 다른 쪽의 높은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더 오래 보면 그 사이의 길과 돌담이 보인다. 그림은 바뀌지 않았지만 읽기는 달라진다. 되새김은 같은 결론을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돌아와서 결론을 고칠 수 있는 시간이다.
같은 색 안에서도 몸은 구별된다
〈해촌〉의 말과 소는 주위의 땅과 가까운 빛깔을 나눈다. 마른 풀잎색의 넓은 바탕은 각각을 서로 멀리 떨어진 색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그러나 검은 선은 등을 세우고 다리를 나눈다. 색이 이어주는 동안 선은 구별한다. 몸이 풍경과 연결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색으로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현실의 위계가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감의 관계가 사회적 관계를 그대로 증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몸을 한 시야 안에 두고 살피게 하는 힘은 있다. 인간의 피부와 동물의 몸, 땅의 표면이 전혀 다른 세계의 것으로 갈라지지 않는다.
그 안에서 소의 뿔은 말과 다른 형상을 만든다. 작은 차이를 덜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빛 속에서도 두 동물을 구별할 수 있다. 공존을 그린다는 것은 모두를 같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있다. 차이를 남긴 채 하나의 장소를 나누게 하는 일이다.
주인이 보이지 않아도 돌봄은 필요하다
그림에서 사람이 소에게 명령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지배가 사라진 세계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소유관계도, 먹이를 마련하는 사람도, 하루의 노동도 이 한 장면으로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은 그 일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돌봄을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풀과 물이 필요하고 쉴 곳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물을 장식으로 보지 않게 하는 가장 단순한 생각이다. 소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몸에는 그 몸의 필요가 있다. 함께 산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만들려면, 말없는 존재도 필요를 가진다는 데까지 읽기가 가야 한다.
가운데 사람을 다시 본다.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 다만 길의 한가운데에 있는 몸을, 양쪽의 동물과 무관한 구경꾼으로만 보기도 어렵다. 집과 담과 길이 그들을 한 생활의 자리 안에 놓는다. 풍토는 바라보는 경치이기 전에 몸들이 서로의 조건이 되는 장소로 읽힌다.
고개를 드는 시간도 삶에 속한다
평화로운 그림이라고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평화는 소가 언제나 먹고 바람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지켜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몸에는 먹는 때와 멈추는 때, 아래를 향하는 때와 고개를 드는 때가 있다. 하나의 모습만 남기지 않을 때 평온의 감각도 더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소와 풀의 관계는 그 한 동작으로 모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도 먹이를 생각하고, 작게 그려져 있어도 몸의 필요를 잊지 않는 것. 이 정도의 주의가 풍경의 감상을 조금 바꾼다. 아름다운 바탕이던 땅이 누군가 살아가는 자리가 된다.
왼쪽의 말은 고개를 낮추고 있다. 오른쪽의 소는 머리를 들었다. 둘 사이로 돌담을 따라 길이 지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