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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Ⅲ 동물과 생명

Ⅲ 동물과 생명 · 34 / 100

외다리 까마귀

보이는 한 발과, 보이지 않는 것을 판단하는 일

The Crow on One Leg

돌담 위 까마귀 — 부분 / Crows on a Stone Wall — detail · 1983
〈돌담 위 까마귀 — 부분〉 · 1983 · 작은 복제 · 530 × 140pxFŪDO 057
돌담 위 까마귀 / Crows on a Stone Wall · 1983
〈돌담 위 까마귀〉 · 1983FŪDO 057

한 발이 보인다는 사실

작은 새의 몸 아래로 가는 선 하나가 보인다. 그 선을 다리로 읽는 순간 우리는 나머지 한쪽을 찾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없다는 사실과 다르다. 몸에 가렸을 수도 있고, 겹쳐졌을 수도 있으며, 화가가 구별해 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외다리’라는 말은 이 차이를 지나치게 빨리 닫아버릴 수 있다.

〈돌담 위 까마귀〉의 부분을 확대하면 검은 몸과 짧은 선, 돌의 테두리가 가까이 붙어 있다. 어떤 곳에서는 그것들을 뚜렷이 나누기 어렵다. 제공 도판의 작은 크기도 판단을 제한한다. 이 부분에서 확실히 읽을 수 있는 것은 다리의 상처가 아니라, 몸과 받침이 몇 개의 획으로 만나는 방식이다.

이 구별을 지키면 글의 질문도 달라진다. 무엇이 결핍되었는가보다, 적게 보이는 형상에서 어떻게 서 있음을 알아보는가를 묻게 된다. 새의 몸은 짧은 획 위에 놓여 있다. 그 접촉을 따라가며 눈은 무게를 생각한다. 불완전한 생명이라는 판정 없이도 충분히 긴장이 생긴다.

한 발로 서는 새는 반드시 위태롭지 않다

실제 새가 한 발을 접는 행동도 다리의 상실과는 다르다. 코넬 조류연구소의 설명처럼, 여러 새는 추위에 노출되는 다리의 면적을 줄이기 위해 한쪽을 몸 가까이 둘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반적 설명만으로 그림 속 특정 새의 상태를 확정할 수는 없다. 생물의 행동과 회화의 생략은 서로 다른 문제다.

우리는 사람이 한 발로 서 있을 때의 느낌을 새에게 옮기기 쉽다. 그래서 작은 검은 몸을 보자마자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불안은 먼저 관객의 몸에서 온 것일 수 있다. 새의 어려움을 안다고 생각하기 전에, 내가 어떤 경험을 그 형상에 보태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림은 이런 옮겨 느끼기를 막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사실로 굳힐 필요는 없다. 선이 가늘어 보여 마음이 쓰일 수 있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보여 오래 보게 될 수 있다. 그 경험은 새가 실제로 다쳤다고 주장하지 않고도 성립한다. 감상은 단정이 줄어들 때 오히려 더 세밀해질 수 있다.

대칭보다 먼저, 서로 받치는 관계

비대칭이라는 이유만으로 형상이 살아 있고, 대칭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의 균형은 좌우가 같은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검은 면의 무게, 그 면을 받치는 선의 위치, 주위에 남은 밝은 공간이 함께 작용한다. 작은 몸을 보는 일은 이 여러 조건을 함께 보는 일이다.

까마귀의 몸을 이루는 검은 면과 담의 돌을 두르는 선은 서로 가까운 빛깔이다. 그래서 둘이 붙어 보이기도 하고, 작은 밝은 틈 때문에 다시 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접촉과 분리가 동시에 생긴다. 한쪽 발을 찾아내는 것보다 이 짧은 틈을 보는 일이 그림의 긴장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림의 균형은 무게가 없어진 상태가 아니다. 무게가 있을 법한 몸을 적은 선이 받아내는 상태다. 이때 적다는 것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더 많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도 관계를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선 하나의 쓸모는 그것이 받치고 있는 몸과 함께 드러난다.

수선된 그릇과 살아 있는 몸

킨츠기는 깨진 도자기를 옻으로 접합하고 금가루 등으로 이음새를 드러내는 수선 방식이다. 스미소니언의 소장품 설명은 감추지 않은 수선이 그릇의 이력으로 남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깨짐 자체보다, 깨진 것을 다시 쓰기 위해 들인 손과 시간이다. 손상과 돌봄은 같은 일이 아니다.

그릇의 이음새를 몸의 상처와 비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비유가 상처를 가져야 아름다워진다는 요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은 감상자의 교훈을 위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몸은 금빛으로 수선되어야 할 물건도 아니다. 비교는 닮은 부분만큼 다른 부분을 남길 때 정직해진다.

까마귀의 한 발을 보는 일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 빠졌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위로나 극복의 이야기로 채우려 한다. 그러나 작은 몸 앞에서 먼저 필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그 몸이 놓인 돌과 주위의 간격을 살피는 것. 설명보다 오래 주의를 두는 것이다.

소박함은 결핍을 숭배하는 일이 아니다

와비나 멋 같은 미학의 말을 떠올릴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이름들이 새의 몸에 결함이 있음을 확인해 주지는 않는다. 또한 서로 다른 전통을 모두 불완전함의 찬양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이 화면에서 먼저 살필 것은 화려한 묘사를 덜어낸 뒤에도 남아 있는 구별이다.

새의 깃털 한 올 한 올을 그리지 않아도 몸의 방향은 읽힌다. 눈동자가 뚜렷하지 않아도 머리가 향한 쪽은 짐작된다. 이렇게 남은 차이가 관객의 눈을 움직인다. 소박함은 모든 차이를 없앤 상태가 아니라, 필요한 차이를 적은 것으로 남기는 선택일 수 있다.

그 선택은 언제나 옳은 공식이 아니다. 더 그려야 보이는 것도 있고, 덜 그려야 드러나는 것도 있다. 이 새 앞에서는 무엇이 생략되었는지보다, 생략 뒤에 어떤 관계가 살아 있는지를 묻게 된다. 한 획이 다리로 읽히고 그 위의 면이 몸으로 읽히는 순간, 적은 형식은 이미 충분히 복잡하다.

화가의 몸을 필치의 원인으로 환원하지 않기

화가의 신체 경험과 그림의 자세를 함께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다리의 불편함이 곧 거친 선을 만들었다고 말하려면 별도의 근거가 필요하다. 신체의 한 조건에서 붓질의 성격을 곧장 끌어낼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오랜 관찰과 선택, 재료를 다룬 시간이 한 가지 원인으로 줄어든다.

까마귀를 화가 자신이라고 읽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전적 해석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수 있지만, 새의 모든 선을 화가의 상처로 바꾸는 순간 새는 보이지 않는다. 그림의 몸과 그림을 만든 몸 사이에는 닮음도 거리도 있다. 그 거리를 지키는 일이 두 몸 모두를 존중하는 방법이다.

장애가 예술을 가능하게 했다고 찬양하는 말도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그 고통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될 수 있다. 그림의 가치는 그런 보상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불편함을 견딘 삶을 인정하면서도, 작품은 작품이 실제로 보여주는 형식과 관계로 읽을 수 있다.

부분에서 다시 전체로

한 발에 오래 머물렀던 눈을 조금 물린다. 다른 새들이 보이고 돌담의 긴 선이 다시 나타난다. 그 위로는 넓은 바다와 먼 배가 있다. 부분만 보았을 때의 긴장은 전체 안에서 다른 크기를 갖는다. 작은 몸은 혼자 균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여러 형상과 함께 화면을 이룬다.

확대는 더 잘 보게 하지만 더 좁게 보게 하기도 한다. 새 하나를 화면에서 떼어내면, 담의 리듬과 다른 새의 방향이 주던 힘을 잃는다. 그러므로 부분 도판은 원작을 대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전체로 돌아가기 위한 잠깐의 멈춤이다.

전체를 보면서도 작은 접촉을 잊지 않는 것. 부분을 보면서도 주변의 넓이를 잃지 않는 것. 이 두 시선이 함께 움직일 때, 외다리라는 이름은 판정에서 질문으로 바뀐다. 무엇이 없느냐는 질문보다, 지금 보이는 몸을 무엇이 받치고 있느냐는 질문이 남는다.

서 있음에 자격을 요구하지 않기

작은 몸이 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만 귀한 것은 아니다. 쉬고 있거나 기대어 있거나 다른 몸의 도움이 필요해도 그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림을 견딤의 상징으로 읽을 때에도, 견디지 못한 몸을 그 반대편에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존엄은 균형 시험의 상이 아니다.

이 까마귀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한 몸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다. 또한 상처를 자랑스러운 이야기로 바꾸는 일도 아니다. 관객이 할 일은 보이는 것을 세심히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성급히 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남겨둔 자리는 부족한 설명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위한 거리일 수 있다.

검은 몸 아래에 짧은 선이 있다. 선은 돌에 닿아 있다. 그 곁의 밝은 틈은 채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