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Ⅲ 동물과 생명

Ⅲ 동물과 생명 · 33 / 100

조랑말의 존재

같은 땅에 서 있는 서로 다른 몸

The Being of the Jeju Pony

조랑말 / Jeju Ponies · 1975. 바위 해안 가까이에 서로 다른 자세로 선 두 마리의 말. / Two ponies standing in different postures near a rocky shore.
〈조랑말〉 · 1975FŪDO 053
풍랑 / Stormy Seas · 1983. 비스듬한 밝은 획들 아래 가까이 선 사람과 말, 뒤쪽의 작은 집. / A person and pony close together beneath diagonal light strokes, with a small house behind.
〈풍랑〉 · 1983FŪDO 067

한 마리는 고개를 들고 있다

〈조랑말〉(1975)에는 말 두 마리가 있다. 앞쪽의 말은 고개를 낮추고, 그 뒤의 말은 목을 세운다. 푸른 기운이 두 몸과 바다를 잇고, 바위와 땅에는 붉고 밝은 획들이 섞인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말들은 인간 곁의 위로이기 전에, 서로 다른 자세로 화면을 이루는 두 생명이다.

두 마리가 함께 있다고 해서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낮은 머리와 높은 머리는 눈길을 다른 곳으로 이끈다. 하나는 가까운 땅을, 다른 하나는 그 너머의 공간을 열어준다. 이 차이 때문에 그림은 하나의 감정으로 쉽게 닫히지 않는다. 곁에 있다는 것은 같아진다는 뜻이 아니다.

변시지의 말을 늘 고개 숙인 존재로만 기억하면 이 장면을 놓친다. 반복되는 자세를 읽는 일과 예외를 없애는 일은 다르다. 말 한 마리의 머리 높이가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그의 그림에 붙여온 겸허나 체념이라는 말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 된다.

풍토는 몸을 설명하는 하나의 원인이 아니다

제주마의 몸을 설명하면서 바람 때문에 키가 작아지고 소금기 때문에 갈기가 거칠어졌다고 말하면, 풍토는 너무 간단한 원인이 된다. 2019년의 유전체 연구는 제주마를 몽골마와 가까운 관계이면서 별도의 유전적 집단으로 분석했다. 이런 연구가 묻는 것은 집단의 역사와 유전적 변이다. 그림의 비유만으로 대신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몸과 장소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땅 위에 서 있고 무엇을 먹으며 사람과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 다만 생물학적 몸이 형성된 과정과 화가가 그 몸을 그리는 방식은 구별해야 한다. 화면의 작은 말이 곧 작은 몸의 진화사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회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풍토는 관계의 모양이다. 〈조랑말〉의 몸과 바위와 바다는 서로 비슷한 색을 나누면서도 다른 획으로 구별된다. 말은 주변에서 잘려 나온 표본이 아니라 그 안에 놓인 몸으로 보인다. 같은 빛을 나눈다는 사실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명마의 초상에서도 말은 보인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한간의 작품으로 귀속하는 〈조야백〉은 당대 황제의 말을 그린 그림이다. 소장기관은 말의 외형뿐 아니라 기세를 포착한 점을 설명한다. 이 작품을 제국의 영광이라는 말로만 덮으면 말의 몸이 지닌 긴장을 놓친다. 높은 지위의 말과 평범한 말이라는 구분만으로 두 화가의 차이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변시지의 말과 비교할 때에는 이름난 말인가보다 몸이 화면에서 어떻게 주목받는가를 보아야 한다. 한 마리를 집중해서 보게 하는 형식과, 두 마리의 차이를 주변 풍경 속에서 보게 하는 형식. 말의 지위를 높이는 이야기와는 별개로, 각각의 그림은 다른 방식으로 동물에게 시선을 머물게 한다.

천리를 달리는 재능의 상징을 작은 조랑말의 반대편에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랑말의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 명마의 가치를 낮출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말을 인간의 성공이나 실패를 설명하는 도구로만 두지 않는 일이다. 달리는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 순간에도 말은 볼 만한 몸으로 남는다.

기수가 없는 말은 변시지만의 것이 아니다

스터브스의 〈휘슬재킷〉에서도 말 위에 사람은 없다. 런던 내셔널갤러리의 작품에는 장식적인 풍경 대신 넓은 바탕이 있고, 말의 몸이 크게 드러난다. 서양의 말은 언제나 인간의 권력을 위해 그려졌다는 설명은 이 작품 하나 앞에서도 충분하지 않다. 기수가 없다는 공통점에서 오히려 더 정확한 비교가 시작된다.

휘슬재킷의 몸은 시선을 한곳으로 모으는 반면, 〈조랑말〉의 두 몸은 바다와 바위 사이로 시선을 나눈다. 전자를 지배로, 후자를 공존으로 곧장 번역할 수는 없다. 비교할 수 있는 것은 크기, 빈 곳의 쓰임, 몸이 주변과 분리되는 정도다. 윤리적 결론에 앞서 조형적 차이를 보아야 한다.

〈풍랑〉에서는 사람과 말이 나란히 있다. 이 배치가 기마상의 위아래 관계와 다른 감각을 준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에 기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소유와 노동의 역사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화면이 새로 제안하는 가까움은 현실의 모든 관계를 해결한 선언이 아니라, 달리 볼 수 있는 한 장면이다.

묶였다는 이야기보다 먼저 볼 것

서 있는 말을 보면 묶여 있어서 떠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기 쉽다. 하지만 먼저 줄이 보이는지 살펴야 한다. 〈조랑말〉의 제공 도판에서는 두 몸을 붙잡는 분명한 줄을 확인하기 어렵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 속에 그려졌다는 사실과 움직일 자유가 없다는 주장은 같지 않다.

‘길들여진 야생’이라는 표현도 이렇게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을 제주마의 성격이나 화가의 본성을 입증하는 말로 삼을 수는 없다. 인간과 가까이 살아온 동물이 인간의 필요만으로 다 설명되는가를 묻는 표현으로는 유용하다. 익숙한 동물에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움직임과 관심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말의 목과 귀가 향한 곳을 보는 일은 그 남은 부분을 인정하는 작은 방법이다. 풀을 찾는지 소리를 듣는지 화면만으로 확정할 수 없더라도, 인간과 다른 방향을 갖는 몸은 볼 수 있다. 말은 사람이 자기 마음을 읽어낸 뒤에도 그 사람의 해석보다 조금 더 남아 있는 존재다.

고개 높이가 만드는 두 개의 공간

〈조랑말〉에서 낮아진 머리는 몸 앞의 땅을 좁고 가까운 자리로 만든다. 뒤쪽의 세운 목은 그 위의 바다와 이어진다. 두 몸이 가까이 겹쳐 있어도 방향은 같지 않다. 함께 있다는 감각은 완벽한 일치보다 이 작은 차이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생긴다.

〈풍랑〉에서는 사람의 굽은 몸 가까이 말이 목을 세우고 있다. 사선으로 흐르는 주변의 획에 비하면 그 목은 짧지만 뚜렷한 다른 방향이다. 사람과 말이 반드시 같은 쪽으로 숙여야 같은 바람 안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같은 조건에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몸들이 한 화면을 이룰 수도 있다.

그래서 낮은 고개를 굴복으로만, 높은 고개를 지배로만 읽지 않으려 한다. 자세는 주변과 함께 읽어야 한다. 몸이 기댄 곳과 바라보는 쪽, 옆의 형상과 벌어진 간격이 달라지면 같은 기울기도 다른 감각을 준다. 말의 자세는 도덕의 도표가 아니라 관계가 만들어지는 자리다.

바라보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데리다의 『동물,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동물이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을 통해, 보는 주체를 인간에게만 맡겨온 관습을 되묻는다. 또한 수많은 다른 생명을 ‘동물’이라는 단수의 이름으로 묶는 문제를 다룬다. 이 질문은 변시지의 말도 인간 감정을 담는 빈 그릇이 아니라 다른 방향을 가진 몸으로 보게 한다.

물론 그림 속 말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른다는 것이 그 몸에 내면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관객에게 주어진 것은 눈의 방향과 머리의 각도, 다른 몸과의 간격이다. 충분히 알지 못하는 채로도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동반의 읽기는 바로 그 정도의 거리에서 시작될 수 있다.

곁에 있는 말이 사람의 고독을 해결해야 할 의무는 없다. 사람 또한 말을 이해했다고 서둘러 선언할 필요가 없다. 〈풍랑〉의 두 몸을 그렇게 보면 서로가 서로를 설명하는 관계보다 함께 노출된 관계가 먼저 보인다. 집은 뒤에 있고, 두 몸은 아직 바깥에 있다.

분신이 된 뒤에도 남는 말

말과 사람이 닮아 보이는 순간은 있다. 몸의 기울기와 작은 크기, 주위에 비해 낮은 자리가 서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닮음이 곧 동일함은 아니다. 말에게 인간의 생애를 모두 맡기지 않을 때, 화면은 한 사람의 고백보다 넓어진다. 다른 생명이 자기 자리를 갖기 때문이다.

풍토가 몸들을 함께 놓는다고 해서 차이까지 지우는 것은 아니다. 같은 색이 몸과 바다를 잇고, 다른 선이 말 한 마리와 다른 한 마리를 나눈다. 연결과 구별은 동시에 일어난다. 변시지의 조랑말을 읽는 일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그 둘을 함께 보는 일이다.

앞의 말은 머리를 낮추고 있다. 뒤의 말은 목을 세운다. 두 몸 사이로 푸른빛이 조금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