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동물과 생명 · 32 / 100
까마귀의 존재론
상징을 외우기 전에, 새가 놓인 자리를 보다
The Ontology of the Crow
검은 새들은 같은 자세가 아니다
〈돌담 위 까마귀〉(1983)에서 돌담은 화면 아래를 길게 가로지른다. 그 위의 새들은 같은 간격으로 정렬되어 있지 않다. 몸을 세운 새, 낮춘 새, 날개를 벌린 듯한 새가 서로 다른 방향을 만든다. 멀리 놓인 배는 작다. 눈은 먼 바다를 보다가 가까운 검은 형상들로 되돌아온다.
까마귀라는 이름은 새들을 한 종류로 묶는다. 그러나 그림은 그 이름 안에 작은 차이들을 남긴다. 부리가 향한 쪽, 몸과 돌 사이의 틈, 날개가 벌어진 각도. 까마귀를 곧바로 고독이나 죽음의 표시로 읽으면, 같은 이름을 가진 형상들이 서로 다르게 놓였다는 사실이 사라진다.
이 장에서 존재론은 새에게 숨은 정답을 붙이는 일이 아니다. 새가 물감의 형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주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묻는 일이다. 까마귀는 뜻을 전달하는 기호이기 전에 화면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 작은 자리를 살피는 것에서 상징의 읽기도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상실의 새를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포의 「The Raven」에서는 잃어버린 레노어를 생각하는 화자에게 검은 새가 찾아온다. 새가 되풀이하는 말과 화자의 질문이 얽히면서 상실은 깊어진다. 이 의미는 검다는 성질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방, 밤, 기억, 반복되는 말이 함께 만든다. 시 속의 새를 다른 그림에 가져갈 때에는 그 차이도 따라와야 한다.
포의 원제에 쓰인 raven과 변시지의 까마귀를 자동으로 같은 종이라고 정할 이유도 없다. 시의 번역명과 실제 새의 분류, 그림 속 도상은 다른 층위다. 작품에 나타난 몇 획만으로 생물학적 종까지 확정하기 어렵다면, 그보다 더 먼 문화적 의미를 먼저 확정하는 일에도 신중해야 한다.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도 마지막 작품이나 죽음의 예고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반 고흐 미술관 연구자들이 제시한 마지막 작품의 후보는 〈나무뿌리〉다. 작품 순서에 관한 연구와 새의 의미에 관한 해석은 구별해야 한다. 까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화가의 죽음으로 곧장 잇지 않을 때, 비교는 비극의 반복이 아니라 그림의 차이를 보는 일이 된다.
문화의 이름보다 구체적인 장면
서양의 흉조와 제주의 길조를 맞세우면 설명은 간단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해진 설명에서는 각각의 문헌과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듣기 어렵다. 어느 지역의 모든 사람이 같은 새를 같은 뜻으로 보았다고 전제할 수는 없다. 민속을 참조하려면 그 말이 전해진 장소와 맥락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 확인과 별개로, 그림 안에서도 새의 역할은 달라질 수 있다. 〈빈 집〉의 나무 가까이에 있는 새와 〈돌담 위 까마귀〉의 여러 새는 같은 공간적 일을 하지 않는다. 전자는 집 위의 가까운 움직임을, 후자는 담을 따라 이어지는 긴 리듬을 만든다. 한 도상의 뜻은 되풀이되면서도 주변에 따라 바뀐다.
상징을 없애자는 말은 아니다. 상징이 작동하는 순서를 바꾸자는 것이다. 검은 새를 보고, 그 새가 놓인 곳을 보고, 제목과 자료를 읽은 뒤에 의미를 생각한다. 그렇게 얻은 의미는 새의 자세가 달라지면 수정될 수 있다. 고정된 사전보다 수정 가능한 읽기가 이 작은 형상에 더 오래 머문다.
돌담은 문턱인가
돌담 위에 앉은 새는 땅에서 조금 높아져 있다. 담은 둘로 나누는 선이면서 몸을 잠시 얹는 면이 된다. 사람에게는 경계인 것이 새에게는 머무는 자리가 될 수 있다. 같은 구조물이 서로 다른 몸에 다르게 쓰인다는 점이 중요하다. 담은 하나의 뜻만 가진 사물이 아니다.
터너가 발전시킨 리미널리티는 통과의례의 문턱 단계에서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는 과정을 이해하는 개념이다. 이를 까마귀의 자리와 비교할 수는 있지만, 돌담에 앉았다는 사실이 곧 의례를 겪는다는 증거는 아니다. 여기서 빌릴 수 있는 것은 한 상태에 완전히 고정되지 않은 자리를 생각하는 질문이다.
새는 그림 안에서 실제로 날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벌어진 날개와 몸의 방향 때문에 다음 움직임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 머문 자리와 곧 떠날 수도 있는 자리가 겹쳐진다. 문턱이라는 말이 유용하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다. 보이지 않는 두 세계를 선언하기보다, 정지된 형상에 남은 이동의 가능성을 읽게 한다.
흩어진 것들이 만드는 리듬
담의 돌들은 크기와 모양이 다르고, 그 위의 새들도 자세가 다르다. 돌의 검은 테두리와 새의 검은 몸은 이어지면서 구별된다. 눈은 담을 따라가다가 날개가 벌어진 곳에서 잠시 멈춘다. 일정한 간격이 없는데도 흐름이 생긴다. 이 리듬은 규칙을 지킨 결과만이 아니라, 규칙에서 벗어난 차이를 포함한 결과다.
그 흐름을 곧바로 생물 무리의 자기조직화라고 설명하면 회화와 생태의 차이가 가려진다. 실제 새들의 움직임에는 관찰과 측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화가가 남긴 형상과 간격이다. 자연의 운동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운동의 법칙을 증명했다는 주장은 같지 않다.
대신 한 마리의 방향을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왼쪽으로 향한 부리가 오른쪽을 보면 주변의 간격도 달리 읽힐 것이다. 작은 형상의 차이가 넓은 화면의 균형에 참여한다. 새들은 큰 풍경에 덧붙은 장식이 아니다. 저마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 풍경의 시간을 만든다.
선이 새가 되는 순간
까마귀의 몸에는 자세한 깃털 묘사보다 뭉친 검은 면과 짧게 뻗은 획이 먼저 보인다. 그러나 모든 새가 한 획으로 그려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겹친 획도 있고 두꺼운 면도 있다. 중요한 것은 획의 수를 줄였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얼마만큼의 차이로 머리와 날개와 몸을 알아보게 하는가이다.
이 선은 새의 윤곽이면서 물감이 지나간 흔적이다. 가까이 보면 거친 가장자리가 보이고, 조금 물러서면 새의 방향이 보인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우지 않는다. 그림 속 생명감은 실제 새처럼 움직이는 데서만 오지 않는다. 물감이 남아 있으면서 새도 보이는 이 이중의 경험에서 생긴다.
서예의 필획과 비교할 때에도 이 구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닮은 호흡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특정 화론을 직접 계승했다고 증명할 수는 없다. 선은 먼저 이 화면에서 어떤 무게와 방향을 갖는지 보아야 한다. 검은 몸 아래의 짧은 획 하나가 돌과 새 사이에 접촉을 만든다.
사람이 없어도 관계는 남는다
〈돌담 위 까마귀〉에는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인간의 일이 지워진 풍경은 아니다. 돌을 쌓은 담과 바다 위의 배가 있다. 새들은 누군가 만든 경계 위에 머문다. 인간이 화면의 중심에서 물러난 뒤에도, 인간이 한 일과 다른 생명의 움직임은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
까마귀를 화가의 분신으로만 읽으면 이 관계도 작아진다. 새가 사람의 감정을 대신하는 동안, 새가 차지한 자기 자리는 잊히기 쉽다. 이 그림에서는 사람 없는 담 위에서도 새들이 충분히 화면을 이룬다. 인간을 설명해 주지 않더라도, 그 형상들은 볼 이유를 가진다.
풍토를 함께 사는 조건으로 읽는다면, 새는 풍토를 상징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돌과 바다와 만들어진 담 사이에 실제로 자리를 갖는 형상이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거나 같은 운명을 가져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둔 채 하나의 담 위에 있을 수도 있다.
아직 날아가지 않은 자리
길조인가 흉조인가라는 질문은 보는 이를 지나치게 빨리 결론으로 데려간다. 다른 질문도 가능하다. 이 새는 어디를 향하는가. 다른 새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몸 아래의 선은 무엇을 받치는가. 이 질문들은 정답을 늦추지만 그림을 더 오래 보게 한다.
상징의 자유는 아무 의미나 붙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형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해석을 여럿 남긴다는 뜻이다. 하나의 읽기를 얻고도 새의 자세가 그 읽기에 들어맞지 않으면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까마귀는 그렇게 익숙한 이름 속에서 다시 낯선 형상이 된다.
담 위에 검은 새들이 있다. 한쪽은 몸을 세우고, 다른 쪽은 날개를 벌린다. 그 사이에 돌의 밝은 면이 조금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