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Ⅱ 인물과 존재

Ⅱ 인물과 존재 · 31 / 100

고독의 건축학

집과 몸 사이, 혼자 있음의 자리를 읽다

The Architecture of Solitude

빈 집 / Empty House · 1987. 왼쪽의 작은 집과 기울어진 나무, 오른쪽 먼 배와 태양. / A small house and leaning tree at left, with a distant boat and sun to the right.
〈빈 집〉 · 1987FŪDO 062
풍랑 / Stormy Seas · 1983. 비스듬한 밝은 획들 아래 가까이 선 사람과 말, 뒤쪽의 작은 집. / A person and pony close together beneath diagonal light strokes, with a small house behind.
〈풍랑〉 · 1983FŪDO 067

사람이 보이지 않는 집

〈빈 집〉(1987)에는 낮은 집이 있다. 그 뒤로 나무가 기울고, 가지 가까이에 새들이 보인다. 먼 바다에는 작은 배가 놓여 있다. 정작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집의 문과 지붕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 머물 자리를 생각하게 된다. 사람을 그리지 않은 화면에서도 사람과 장소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제목의 ‘빈’은 문이 열려 있다는 뜻과도, 주인이 죽었다는 뜻과도 같지 않다. 화면은 그 사연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집이라는 사물은 사람이 드나드는 크기와 모양을 지닌다. 그 구조가 남아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자리를 떠올릴 수 있다. 부재는 아무것도 없는 곳보다 쓰임이 남은 곳에서 더 가까워지기도 한다.

고독의 건축학은 그래서 외로운 사람을 찾아 이름 붙이는 일이 아니다. 몸이 머물 곳, 몸과 다른 것 사이의 간격, 그 간격을 에워싼 넓이를 읽는 일이다. 감정을 공간으로 바꾸었다고 단정하기보다, 공간이 어떤 감정을 가능하게 하는지 살핀다. 집 하나가 놓인 위치에서 그 읽기는 시작된다.

지붕이 덮는 것과 덮지 못하는 것

〈풍랑〉(1983)에서는 집 가까이에 사람과 말이 있다. 두 몸은 집 안에 숨지 않고 화면 아래쪽에 나란히 드러난다. 지붕은 비스듬하고, 그 주변의 밝은 획들은 사선으로 흐른다. 집의 작은 면적과 주위의 넓은 바탕이 함께 보인다. 보호할 수 있는 곳과 그 바깥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있는 집이 곧 완전한 안식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까지의 거리가 짧아도 몸은 아직 밖에 있을 수 있다. 집이 있다는 사실과 집 안에 있다는 사실은 다르다. 이 작은 차이가 화면을 단순한 피난의 이야기에서 벗어나게 한다. 보호받고 싶은 마음과 바깥에 노출된 몸이 같은 자리에서 겹쳐진다.

사람과 말의 간격도 중요하다. 둘은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지지 않지만, 떨어진 집보다 가까이 보인다. 벽이 하지 못하는 일을 곁에 있는 몸이 조금 대신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말이 사람을 구한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함께 놓인 두 몸과 그 뒤의 집이 서로 다른 크기의 거처를 생각하게 한다.

집을 기억하는 방식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은 집과 방, 다락과 지하실, 둥지와 껍질을 기억과 상상의 장소로 읽는다. 집을 치수의 합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어떤 모서리는 실제 면적보다 오래 기억되고, 작은 방은 한 시절의 크기로 남는다. 이 관점은 변시지의 작은 집을 건물의 축소 모형 이상으로 보게 한다.

그러나 다락과 지하실의 구별을 제주의 집에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화면에 보이지 않는 내부를 마음의 층으로 그려 넣어서도 안 된다. 이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지붕의 기울기, 벽의 경계, 문이 차지한 자리다. 빌려온 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구체적인 모양을 남겨두어야, 비교는 작품을 넓히는 일이 된다.

집은 기억을 담기도 하지만 기억을 불러오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고향집이고, 다른 이에게는 처음 보는 작은 건물이다. 두 감상 가운데 하나가 틀린 것은 아니다. 익숙함을 요구하지 않는 형식이 있다. 집의 크기와 주위의 넓이를 느끼는 데에는 그곳에서 살았던 기억이 꼭 필요하지 않다.

빈 곳에도 표면이 있다

〈빈 집〉에서 형상이 적은 곳도 무색의 구멍은 아니다. 마른 풀잎색으로 읽을 수 있는 바탕에는 밝고 어두운 결이 남아 있다. 배와 집 사이를 볼 때 눈은 그 결을 지나간다. 여백은 사물이 빠져나간 나머지가 아니라, 사물 사이의 거리를 보이게 하는 물감의 면이다.

같은 넓이도 주변의 배치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집이 조금 커지면 그 바깥은 가까워질 수 있고, 배가 더 작아지면 바다는 멀어질 수 있다. 이는 실제 거리를 계산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크기의 형상이 보는 속도를 조절하는 일이다. 고독의 감각은 넓이 하나보다 이런 크기와 간격의 관계에서 생긴다.

여백을 동양의 충만함으로, 빈 공간을 서양의 공허로 나누면 이 움직임이 사라진다. 한 그림의 같은 자리에서도 숨을 돌릴 여유와 몸을 둘 곳 없는 막막함이 번갈아 느껴질 수 있다. 어느 쪽도 화면 밖에서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눈이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그 사이의 거리는 조금 다르게 남는다.

유리 너머의 네 사람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에는 손님 셋과 종업원 한 사람이 있다. 밤거리에서 우리는 밝은 식당 안을 본다. 시카고미술관의 설명은 넓은 유리와 보이지 않는 출입구가 만드는 닫힘을 짚는다. 사람이 여러 명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거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여기서도 고독은 인원수보다 배치와 접근의 문제에 가깝다.

호퍼의 유리는 안을 보여주면서 몸의 진입을 가로막는다. 변시지의 〈풍랑〉은 반대로 집 밖의 몸을 드러낸다. 한쪽에서는 보이지만 닿지 않는 실내가, 다른 쪽에서는 가까운 집이 덮지 못하는 바깥이 중요하다. 도시와 자연이라는 큰 구분보다, 경계가 시선과 몸에 서로 다르게 작용한다는 점이 두 화면을 잇는다.

이 비교로 어느 고독이 더 깊거나 오래간다고 판정할 수는 없다. 식당의 침묵도, 집 밖의 침묵도 각각의 관계를 남긴다. 중요한 것은 화면이 타인에게 닿는 일을 어떻게 어렵게 하거나 가능하게 하는가이다. 변시지의 말이 사람 곁에 있는 장면은, 고독 안에서도 가까움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혼자 있는 그림과 혼자 산 생애

화면에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해서 화가의 하루도 늘 혼자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려진 장소는 생활의 전부를 기록한 방이 아니다. 어떤 만남은 빠지고, 어떤 사물은 반복해서 남는다. 그림 속 고독을 화가의 생애와 연결하려면, 그 연결을 받치는 편지나 구술을 별도로 읽어야 한다. 화면은 그 기록을 대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면의 선택을 보면 다른 질문이 생긴다. 왜 이 집은 이만큼 작고, 왜 배는 이렇게 멀리 놓였는가. 특정한 사연을 몰라도 그 질문은 가능하다. 생애를 지우자는 뜻이 아니다. 생애로 그림의 모든 간격을 메우지 말자는 뜻이다. 남겨둔 간격이야말로 보는 이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이때 고독은 완결된 성격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관계가 된다. 같은 집도 배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같은 사람도 말이 곁에 서면 다른 거리를 갖는다. 혼자 있음은 다른 것과 무관한 상태가 아니다. 무엇이 가까이 있고 무엇이 멀리 있는지, 그 차이를 유난히 또렷하게 느끼는 한 방식이다.

낮은 자리는 낮은 가치가 아니다

〈풍랑〉의 사람과 말은 화면 아래에 있다. 그러나 아래에 있다는 이유로 자연 앞에 굴복했다고 읽을 필요는 없다. 시선은 넓은 바탕을 지나 그 작은 몸으로 돌아온다. 차지한 면적은 작아도 눈을 붙드는 힘은 작지 않다. 화면의 높낮이와 존재의 가치를 곧바로 대응시키지 않을 때 이 역설이 보인다.

사선이 많은 화면에서 짧게 선 다리와 지팡이는 다른 방향을 만든다. 길게 흐르는 획과 짧게 닿는 선이 서로를 받친다. 이 균형을 영원히 쓰러지지 않는 인간의 의지로 바꾸면, 선이 실제로 하는 일을 놓치기 쉽다. 그림은 오래 남지만 그 안의 몸은 여전히 작고 노출되어 있다. 보호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남는다.

〈빈 집〉에서는 그 몸마저 보이지 않는다. 두 그림을 나란히 보면 집과 사람과 하늘이 언제나 같은 설계도를 따른다는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한 화면은 가까운 몸들을 보여주고, 다른 화면은 사람이 머물 만한 구조를 남긴다. 고독의 건축은 하나의 공식이 아니라, 있다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조정하는 여러 방식이다.

문을 모두 닫지 않는 그림

혼자 있는 시간을 모두 축복이라 부를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여유이고,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거리다. 그림은 그 차이를 없애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혼자 놓인 존재를 성급히 부족한 존재로 만들지도 않는다. 그 주변을 오래 보게 한다. 가까이 놓인 몸과 멀리 남은 배를 함께 보게 한다.

거처는 바깥을 완전히 없앤 곳이 아닐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고, 다시 밖을 볼 틈이 있는 곳. 변시지의 작은 집을 그렇게 읽으면 고독은 막힌 방보다 문턱에 가깝다. 머무름과 드나듦이 함께 가능한 자리다. 누가 들어올지는 아직 그려져 있지 않다.

다시 〈빈 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가까이 있고 배는 멀리 있다. 문을 이루는 선은 남아 있다. 바탕의 밝은 결이 그 곁을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