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Ⅱ 인물과 존재

Ⅱ 인물과 존재 · 30 / 100

여인좌상

옷 입은 몸과 누드, 바라봄의 거리

Seated Female Figure

네모의 상 / Portrait of Nemo · 1951. 흰 블라우스와 짙은 치마를 입고 나무 의자에 앉아 두 손을 포갠 여인. / A woman in a white blouse and dark skirt sits in a wooden chair with her hands overlapping.
〈네모의 상〉 · 1951
〈나부〉 · 1953 / Nude · 1953
〈나부〉 · 1953 · 작은 복제 · 301 × 404px
남자 / Man · 1950
〈남자〉 · 1950

먼저, 서로 다른 그림을 나눈다

〈네모의 상〉(1951)에는 흰 블라우스와 짙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 앉아 있다. 두 손은 무릎 가까이 포개져 있고, 나무 의자의 둥근 등받이는 어깨 뒤를 감싼다. 이 그림은 누드가 아니다. 좌상은 앉은 자세를 가리키며, 옷을 벗었는지와는 다른 구분이다. 앉은 여인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작품을 섞지 않는 데서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다른 도판의 〈나부〉(1953)는 몸이 훨씬 깊이 접혀 있다. 고개는 낮고, 다리는 굽어 몸 가까이 놓인다. 보관된 작은 복제에서는 색과 피부의 결을 자세히 판단할 수 없지만, 머리와 팔다리가 모이는 방향은 보인다. 이 몸을 의자에 앉아 정면을 향한 여인의 모습으로 옮겨 적으면 작품 자체가 달라진다.

이 장의 여인좌상은 특정 한 작품의 신원을 대신하는 제목이 아니라, 앉은 몸을 그리는 방식에 관한 주제다. 여기서는 두 작품을 중심으로 자세와 시선의 차이를 살핀다. 같은 화가의 일본 시기 인물화라는 공통점보다, 서로 어떻게 다르게 앉아 있는지를 먼저 보려는 것이다.

의자는 배경이 아니라 지지다

〈네모의 상〉에서 팔걸이는 몸의 양옆으로 나온다. 치마의 어두운 면 아래로 의자의 세부가 이어지고, 등받이의 곡선은 머리 둘레의 밝은 바탕을 가른다. 의자는 인물에게 위엄을 더하는 장식만이 아니다. 몸의 무게가 놓인 위치와 화면의 폭을 함께 정한다.

앉는다는 것은 몸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발과 다리에 실렸던 무게가 엉덩이와 의자로 나뉘고, 팔은 무릎이나 팔걸이 가까이에 자리를 얻는다. 이런 관계를 보면 정지한 좌상에도 몸의 일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만히 있다는 사실과 아무런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르다.

여기에서 내면성은 앉은 사람에게 자동으로 부여되는 성질이 아니다. 서 있는 사람도 사유할 수 있고 앉은 사람도 타인에게 마음을 열 수 있다. 그림이 만드는 내면의 감각은 자세 하나보다 시선과 손, 의자와 주변 공간이 함께 이루는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두 손이 포개진 곳

흰 블라우스에서 내려온 두 팔은 어두운 치마 위에서 만난다. 손가락은 서로 한 덩어리로 합쳐지지 않고, 밝은 작은 면들로 남아 있다. 눈은 얼굴에서 팔을 따라 내려왔다가 그 손들 앞에서 잠시 늦어진다. 감정의 이름을 붙이기 전에도, 화면은 보는 속도를 조절한다.

포갠 손을 반드시 불안이나 순종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기다리는 손, 쉬는 손, 자세를 유지하는 손일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은 많지만 아무 해석이나 같지는 않다. 손의 긴장과 놓인 위치, 팔의 방향을 다시 보아야 한다. 해석은 작은 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 설득력을 얻는다.

얼굴의 시선은 관객과 곧장 마주치지 않고 화면 오른쪽으로 비껴 있다. 그렇다고 그 눈이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보이는 방향을 기술하는 것과 마음의 부재를 선언하는 것은 다르다. 여인은 우리에게 보이지만, 보는 일까지 우리에게 넘겨주지는 않는다.

누드의 몸은 옷의 부재만이 아니다

〈나부〉에서는 목과 어깨, 팔과 굽힌 다리가 더 가까이 모인다. 바깥을 향해 펼쳐진 몸보다 안으로 접힌 몸의 윤곽이 먼저 보인다. 한쪽 다리는 접혀 옆으로 놓이고 다른 무릎은 더 높게 모인 자세로 읽힌다. 이 접힘은 피부를 넓게 보여주는 전시의 형식과 다른 시선의 경로를 만든다.

그러나 고개를 숙였다는 이유만으로 모델이 수치심을 느꼈거나 화가의 시선을 거부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자세는 그려져 있지만, 그 자세를 택한 대화는 남아 있는 도판만으로 알 수 없다. 몸의 모양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몸의 심리를 마음대로 채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보임과 가림이 한 몸 안에서 함께 일어난다는 점이다. 옷은 없지만 모든 부분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얼굴이 가려져도 어깨와 다리의 관계는 구체적이다. 노출의 양이 사람을 얼마나 알 수 있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접힌 몸에서 선명해진다.

보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

존 버거는 『보는 방법』에서 유럽 누드화의 관습을 살피며, 여성의 몸이 상정된 관객의 시선에 맞추어 배치되는 문제를 논한다. 이것은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만 묻는 논의가 아니다. 누가 바라볼 권리를 갖고, 누구의 존재가 그 바라봄을 위해 정리되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 질문은 변시지의 인물화 앞에서도 유효하다.

다만 시선을 피한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관습을 완전히 넘어섰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 고개를 돌린 자세도 관객을 위한 구도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작품에 승리의 이름을 붙이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이 몸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 묻는 일이다. 말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의 감동을 위한 재료로만 대하지 않는가.

존중은 인물에게 반드시 반항의 표정을 부여하는 데 있지 않다. 조용히 앉은 사람도 우리에게 자신을 증명할 의무가 없다. 그의 시선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아도, 그가 약하거나 수동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감상은 한 사람을 끝까지 알아내는 권리가 아니라, 보이는 것 앞에서 자신의 권한을 줄이는 일이 될 수 있다.

사람을 보기 위해 줄인 화폭

공개 아카이브가 전하는 2004년 구술 발췌에서 변시지는 인물 옆의 빈 곳을 채우려고 테이블이나 꽃병을 덧붙이는 대신, 인물에 맞게 화폭을 줄였다고 회고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식의 반대가 무조건적인 공백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려던 사람을 중심에 두기 위해 주변의 양을 조절한 선택이다.

〈네모의 상〉에서는 의자가 남아 있다. 따라서 사물은 모두 지워야 한다는 원칙을 읽어내면 오히려 그림을 놓친다. 의자는 몸을 받치며 곡선과 수직선을 만든다. 필요한 것은 사물의 수를 무조건 줄이는 일이 아니라, 그 사물이 이 인물을 보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묻는 일이다.

빛과 색도 같은 관계 안에 있다. 흰 옷과 어두운 치마는 서로를 드러내고, 살빛은 그 사이에서 팔과 손의 방향을 잇는다. 색은 장식이고 선은 본질이라는 식으로 나눌 수 없다. 윤곽과 면, 밝음과 어둠이 함께 몸의 무게를 만든다. 선과 색은 서로 다른 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기서 함께 작용하는 조형의 수단이다.

여인에서 노인으로라는 지름길을 피한다

보관 도록은 〈네모의 상〉 곁에 〈남자〉(1950)를 놓는다. 흰 셔츠를 입은 인물은 몸을 비스듬히 두고 두 손을 낮게 모은다. 뒤에는 책장이 보인다. 이 좌상을 함께 보면 앉음과 침묵이 여성만의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자세의 문제는 성별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일본 시기의 여인들을 훗날 제주 노인을 준비한 단계로만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굽은 몸이나 비껴간 시선을 비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과 장면을 하나의 운명으로 합칠 필요는 없다. 여인은 노인이 되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화면에서 이미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연속성은 차이를 지우지 않을 때 더 설득력 있다. 몸의 무게에 대한 관심이 이어진다고 해도, 흰 옷의 밝음과 제주의 넓은 바탕은 다른 일을 한다. 의자가 받치는 몸과 땅에 낮게 놓인 몸도 같지 않다. 무엇이 이어지고 무엇이 바뀌었는지 함께 보는 일이 한 화가의 시간을 넓힌다.

앉아 있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여인좌상을 읽는 일은 기술의 습득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가 그려졌는지, 어떻게 앉았는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은 남겨두는지 물어야 한다. 다만 모든 질문에 답을 얻어야 그림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르는 삶과 구체적인 자세가 한 화면에 함께 있다.

그 사람을 아름다움의 표본이나 화가의 고독을 담는 그릇으로만 만들지 않을 때, 작은 부분들이 다시 보인다. 손가락 사이의 차이, 흰 옷의 주름, 의자의 둥근 선. 인간에 대한 관심은 큰 철학적 선언보다 이런 부분을 다르게 보려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다.

두 손이 무릎 가까이에 놓여 있다. 의자는 그 몸을 받친다. 눈은 아직 우리 쪽으로 돌아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