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인물과 존재 · 29 / 100
침묵하는 인물
말하지 않는 화면을 읽는 일
The Silent Figure
〈대화〉라는 제목 앞에서
〈대화〉(1986)에는 낮게 앉은 사람과 말, 나무와 집이 있다. 인물 가까운 땅에는 작은 새의 형상도 보인다. 누구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는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제목은 대화다. 이 그림은 침묵과 소통을 서로 반대편에 놓기 전에, 말이 없는 화면에서 관계가 어떻게 생기는지 보게 한다.
회화는 물리적인 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 사실만으로 그림 속 사람도 말을 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입의 모양과 손짓, 몸의 방향으로 말하는 장면을 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침묵을 느끼는 까닭은 매체가 조용해서만이 아니라, 화면이 말의 내용을 확정하지 않은 채 주의를 붙들기 때문이다.
〈대화〉에서 눈은 한 얼굴에 오래 고정되지 않는다. 낮은 몸에서 말로, 나무와 작은 집으로 움직인다. 대화의 주체를 둘로만 정하기도 어렵다. 제목은 정답을 제공하기보다 관계를 찾는 방향을 열어준다. 누가 무엇을 말했다는 이야기보다, 서로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읽게 한다.
얼굴의 세부가 적다는 것
얼굴이 작게 그려지면 표정을 분명히 읽기 어렵다. 그러나 세부가 적다는 것과 얼굴이 없다는 것은 다르다. 머리가 향한 쪽, 목과 어깨의 연결, 몸의 높이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얼굴을 읽기 어려워진 눈은 그 주변으로 옮겨간다. 침묵의 감각은 이 시선의 이동에서도 생긴다.
〈네모의 상〉(1951)에서는 눈과 입이 분명하고 흰 옷과 두 손도 자세히 보인다. 그럼에도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는 없다. 얼굴의 묘사가 정교해졌다고 내면이 모두 공개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얼굴이 작아졌다고 개인의 삶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묘사의 양과 이해의 깊이는 같은 척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침묵하는 인물을 원형적인 인간이라고 부르더라도, 개별성을 버린 존재로 만들 필요는 없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림은 그것을 모두 내놓지 않는다. 침묵은 비어 있는 인격이 아니라, 관객에게 전부 주어지지 않은 삶의 감각으로 읽힐 수 있다.
말함과 보여줌 사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 4.12–4.1212에서 명제가 논리적 형식을 말로 재현하는 일과 그 형식을 드러내는 일을 구별한다. 끝의 7번 명제는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서 침묵을 요청한다. 여기서 보여줌을 곧바로 시각 예술의 우월함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논리와 언어에 관한 논의는 그림의 감동을 보증하는 공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구별은 해설의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그림이 한 몸의 기울어짐을 보여줄 때, 해설은 그 원인을 단어 하나로 고정하려 한다. 피로, 절망, 기다림. 그런 말은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곡선의 길이와 몸의 위치까지 대신하지는 못한다. 말이 그림에 닿는 곳과 그림을 덮는 곳을 구별해야 한다.
이것은 아무 말도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선이 굽는 쪽과 사물이 떨어진 거리를 정확히 말하면, 관객이 더 오래 볼 수 있다. 문제는 언어의 사용 자체가 아니라 언어가 자신을 마지막 답이라고 여기는 데 있다. 좋은 해설은 그림에서 읽을 일을 끝내지 않고, 다시 보게 할 부분을 남긴다.
그 사람의 말을 대신하지 않기
그림 속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관객은 대사를 보태고 싶어진다. 나는 외롭다. 나는 떠나지 않겠다. 문학적 상상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문장을 화가의 실제 발언이나 인물의 확정된 뜻으로 제시하면 다른 일이 된다. 상상은 자기 이름으로 나와야 한다.
말을 대신하지 않는 태도는 인물을 차갑게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다 이해했다고 선언하지 않고 가까이 머무는 방법이다. 숙인 고개 앞에서 슬픔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오직 슬픔만이라고 정하지 않는 것. 관계는 확신의 양보다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에서 깊어질 수 있다.
변시지의 인물을 오래 보는 일에는 이런 절제가 필요하다. 작은 몸은 감정을 넣기 위한 빈 통이 아니다. 이미 한 장의 화면 안에서 특정한 거리를 차지한다. 그 거리를 살피지 않고 아름다운 말을 많이 덧붙이면, 조용하던 사람은 어느새 해설자의 목소리에 가려진다.
소리를 상상하게 하는 간격
〈대화〉의 나뭇가지들은 한 덩어리로 뭉치지 않는다. 검은 획 사이로 밝은 바탕이 드러나고, 수평선은 나무 뒤로 길게 이어진다. 눈은 조밀한 곳과 성긴 곳을 번갈아 지난다. 이 리듬을 따라가면서 바람이나 먼 물결의 소리를 떠올릴 수 있다. 실제 소리의 기록이 아니라 시각이 불러낸 감각이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에서는 지정된 세 악장 동안 연주자가 의도적인 연주음을 내지 않으며, 그 자리에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 작품을 변시지의 화면과 비교할 때 중요한 것은 침묵이 주의를 옮긴다는 점이다. 다만 음악의 실제 환경음과 그림 앞에서 상상하는 소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회화에서는 사람이 조용해 보일수록 주변의 흔적이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바람을 그 사람의 감정 대변자로만 만들면 자연도 단순해진다. 바람은 위로가 될 수도 있고 부담이 될 수도 있으며, 어느 쪽인지 정하지 않은 채 느껴질 수도 있다. 사람과 세계 사이에는 번역되지 않은 간격이 남는다.
침묵과 부재는 다르다
〈대화〉에서 사람은 낮게 앉아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말의 몸과 땅의 휘어진 경계가 그 주변에 놓여 있다. 화면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세계를 읽는 방식을 바꾼다. 작은 몸 하나 때문에 바탕은 몸이 놓일 수 있는 장소가 되고, 거리는 누군가에게 가까운 것과 먼 것으로 나뉜다.
그러나 인물이 없는 회화에는 삶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물감의 물성이나 빛, 사물의 배열을 통해 인간의 감각과 관계를 다루는 방식도 있다. 변시지의 인물이 갖는 힘을 말하기 위해 다른 회화의 침묵을 허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서로 다른 형식이 감각을 조직하는 방법을 비교하면 된다.
이 화면에서 작은 사람이 하는 일은 세계의 의미를 혼자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와 말, 집과 바다 사이에 하나의 다른 크기를 더하는 일이다. 그 크기는 주변을 모두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주변의 크기를 느끼게 한다. 말이 없어도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림 곁의 글이 할 일
침묵을 존중한다고 제목과 연보, 구술 기록을 모두 치울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작품을 만나는 다른 길이다. 다만 제목에서 얻은 생각과 이미지에서 확인한 형상, 기록이 전하는 사실을 같은 것으로 처리하지 않아야 한다. 서로 다른 자료가 한 그림을 가리키더라도 각각 말할 수 있는 범위는 다르다.
〈대화〉라는 제목은 말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녹취록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표지도 아니다. 제목을 알고 본 뒤 사람과 말 사이의 간격이 달리 느껴진다면, 언어는 이미 감상에 참여했다. 좋은 읽기는 그 참여를 숨기지 않고, 어디까지가 작품의 제안이고 어디부터가 자신의 응답인지 돌아본다.
침묵의 도상학은 그래서 말의 금지가 아니라 말의 책임에 관한 문제가 된다. 인물에게 아무 말도 시키지 않는 대신 관객이 더 정확히 말해야 한다.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은 상상했는지. 그 구별을 지킬 때 글은 그림의 침묵을 대신 차지하지 않고 그 곁에 놓일 수 있다.
대화가 끝나지 않는 자리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고 처음 생각했던 화면에 오래 머물면, 그 판단이 조금 달라진다. 한 사람에게서 다른 존재로 눈이 옮겨가고 다시 돌아온다. 이 왕복을 대화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특정한 문장을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를 보게 하는 관계다.
그림 속 인물이 말보다 큰 존재라고 과장할 필요도 없다. 말에는 말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림에는 눈으로 따라가야 할 일이 있다. 둘을 경쟁시키지 않을 때 침묵은 더 정확한 이름이 된다. 모든 뜻을 감춘 신비가 아니라, 아직 내 문장으로 다 바꾸지 않은 화면의 상태다.
사람 가까이에 작은 새가 있다. 그 뒤로 말이 서 있다. 눈은 둘 사이의 땅을 한 번 더 지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