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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Ⅱ 인물과 존재

Ⅱ 인물과 존재 · 28 / 100

아버지의 등

기억의 형상과 전승의 거리

The Father’s Back

지게꾼 / The Porter · 1958
〈지게꾼〉 · 1958 · 작은 복제 · 314 × 380px
정오 / Noon · 2007. 촘촘한 짧은 획, 작은 집과 굽은 사람 사이의 짙은 나무. / Dense short marks surround a dark tree between a small house and a bent figure.
〈정오〉 · 2007FŪDO 012

등 위에 놓인 것을 먼저 본다

〈지게꾼〉(1958)의 보관 도판에서는 높게 쌓인 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인물의 머리는 그 큰 덩어리 아래에 작게 놓인다. 복제 상태 때문에 얼굴과 옷의 세부를 또렷하게 읽기는 어렵다. 그러나 짐과 사람의 크기 차이는 남아 있다. 이 그림에서 등은 맨살의 윤곽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얹힌 것을 통해 느껴진다.

이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작품의 모델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짐과 몸의 관계 앞에서 자신의 기억을 불러오는 것이다. 누군가가 앞서 걸어가던 모습, 가까이 있었지만 다 알지 못했던 생활. 이 장의 아버지는 그러한 감상의 자리다. 인물의 실제 신원이나 가족관계를 단정하는 이름이 아니다.

등은 흔히 얼굴보다 늦게 기억난다. 함께 있을 때에는 말을 듣고 표정을 보지만, 사람이 멀어질 때는 어깨의 높이와 걸음의 간격이 남는다. 그림은 그 기억과 만날 수 있다. 다만 그림 속 사람이 나의 기억을 위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 거리까지 남겨둘 때 애틋함은 더 구체적이 된다.

모든 침묵을 희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버지의 등을 떠올리면 말없는 희생이라는 설명이 뒤따르기 쉽다. 그러나 모든 아버지가 같은 방식으로 살지는 않았고, 모든 침묵이 배려였던 것도 아니다. 그림 앞에서 생기는 감정을 오래 지키려면, 가족을 한 가지 미덕의 표상으로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한 사람의 삶에는 따뜻함과 거리, 돌봄과 모름이 함께 있을 수 있다.

〈지게꾼〉의 무게도 감동을 위한 장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짐을 진 몸을 아름답게 본다는 것과, 그 짐을 계속 지게 하는 조건을 좋다고 여기는 것은 다르다. 노동의 형상이 존엄을 지닌다고 해서 고단함 자체를 찬양할 이유는 없다. 그림의 무게는 한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겨온 우리의 시선도 되묻게 한다.

어머니나 다른 돌봄의 사람을 떠올리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은 제목을 잘못 읽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라는 말을 모든 책임의 독점자로 세우지 않는 일이다. 한 사람의 등에서 출발한 시선이,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 있었던 다른 몸들로 넓어질 수 있다.

형태는 기억을 부르지만 증명하지 않는다

뒷모습이 그려진 화면에서도 그 사람이 떠나는지 돌아오는지는 자동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정지한 몸이 이동의 어느 순간에 놓였는지, 앞에 무엇이 있는지 함께 보아야 한다. 등을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영원한 이별을 말하면, 잠시 쉬거나 같은 곳을 바라보는 다른 가능성은 사라진다.

더구나 〈지게꾼〉의 도판을 아버지의 뒷모습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짐 아래에 놓인 몸이지 모델의 친족관계가 아니다. 몸의 방향을 세밀하게 확정하기 어려운 복제에서, 얼굴을 완전히 지웠다는 주장까지 끌어내는 것도 지나치다.

기억의 힘은 사실을 대신하지 않을 때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붙들고, 기억은 내가 왜 그 사람 앞에 머무는지 알려준다. 두 층을 구별하면 그림을 읽는 문장도 달라진다. 아버지를 그렸다고 쓰는 대신, 나는 이 몸에서 아버지를 떠올린다고 쓸 수 있다.

배운 것을 그대로 남기지 않는 일

세대 사이에서 전해지는 것은 닮은 얼굴만이 아니다. 대상을 보는 습관, 손을 멈추는 시점, 작업 앞에서 시간을 쓰는 방식도 전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전승을 특정한 가족 일화로 적으려면 기록이 필요하다. 알려지지 않은 어린 날의 장면을 아름답게 채우는 대신, 남은 작품과 문서를 통해 배움의 관계를 살피는 편이 정확하다.

공개 아카이브에는 데라우치 만지로가 변시지의 1949년 첫 개인전에 보낸 추천사의 일부가 실려 있다. 그 자료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읽을 구체적인 출발점이다. 다만 추천사가 있다는 사실과,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감정을 안다는 것은 다르다. 문서가 증언하는 범위 안에서 가르침의 자리를 보아야 한다.

전승은 같은 화면을 되풀이하는 일과 다를 수 있다. 배운 빛의 질서를 다른 장소에서 시험하고, 인물 가까이에서 익힌 비례를 넓은 풍경에서 다시 조절하는 것.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배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묻는 일은,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보는 일과 함께 가야 한다.

높은 곳의 등과 낮은 곳의 몸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에서 관객은 높은 바위 위 인물의 뒤에 놓인다. 인물의 얼굴 대신, 그가 향한 넓은 풍경을 보게 된다. 뒷모습은 단순한 차단이 아니다. 얼굴을 감추면서 시선의 방향을 공유하게 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다만 그 높은 자리를 곧 자연을 정복한 자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정오〉의 인물은 다른 자리에 있다. 그는 나무 아래쪽에서 몸을 굽히고, 집과 해와 배는 떨어져 놓인다. 관객이 누군가의 등 뒤에서 전망을 함께 얻는 방식과 달리, 여기서는 넓은 화면 안의 작은 몸을 찾아가게 된다. 차이는 용감한 서양인과 순응하는 동양인의 차이가 아니라, 시선을 배치하는 방법의 차이다.

아버지의 기억 역시 이 두 거리를 오갈 수 있다. 앞서 가던 큰 등으로 남을 때도 있고, 넓은 세상 안에서 뜻밖에 작았던 몸으로 떠오를 때도 있다. 후자의 순간에는 보호받던 아이의 눈이 조금 바뀐다. 나를 지켜주던 사람도 어떤 것들 앞에서는 작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온다.

모르는 삶을 남겨두는 전승

가까운 사람의 삶일수록 모두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함께 산 시간과 그 사람이 혼자 감당한 시간은 일치하지 않는다. 뒷모습은 그 간격을 떠올리게 한다. 얼굴을 보지 못해서만 모르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매일 보았어도 알지 못했던 생활이 있다.

전승은 그 빈 부분을 후손의 말로 모두 메우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남은 기억을 전하되, 들은 말과 자신이 보탠 해석을 구별하는 일도 전승이다. 모르는 곳을 모른다고 남겨놓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애가 나의 설명보다 크다는 사실을 지키는 태도다.

그림도 비슷한 거리를 요청한다. 굽은 등에서 힘겨움을 느낄 수 있지만, 무엇 때문에 굽었는지 모두 알지는 못한다. 그 모름 때문에 감정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가지 이유로 끝내지 않고 계속 바라볼 수 있다. 이해는 소유가 아니라, 거리를 지킨 채 머무는 일이 된다.

작품을 물려받는 손

화가가 남긴 것을 이어받는 일은 같은 선을 그리는 데만 있지 않다. 제목과 연도를 확인하고, 서로 다른 작품을 혼동하지 않고, 복제 도판의 한계를 표시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림 한 점의 자리를 정확히 남기는 일이 그 그림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시작이다.

보관 도판의 작은 〈지게꾼〉을 다시 보는 일은 이런 전승의 실무와 닿는다. 복제의 망점은 원화의 붓질이 아니며, 인쇄색은 원화의 색을 그대로 보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판이 아무것도 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짐과 몸의 관계, 화면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크기는 다음의 시선으로 건너갈 수 있다.

전승은 기억을 고정하는 일인 동시에 다시 볼 가능성을 남기는 일이다. 한 해석을 유일한 뜻으로 봉인하면 작품은 이어지기보다 닫힌다. 자료는 정확히 남기고 해석은 이유와 함께 열어두는 것.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지킨다는 말도, 예술 앞에서는 그렇게 구체적인 일이 될 수 있다.

뒤에 선 사람이 보는 것

아버지의 등은 우리보다 먼저 모든 답에 도달한 사람의 등일 필요가 없다. 길을 찾느라 잠시 멈춘 사람의 등일 수도 있다. 그림 앞에서 그 가능성을 받아들이면, 존경은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게 된다. 모르는 채로 살아간 사람에게도 다가갈 수 있다.

그 몸을 기억하는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만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삶을 택하면서도 받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작품을 읽는 후대의 시선 역시 그렇다. 앞선 사람의 뜻을 함부로 대신하지 않되, 지금의 질문으로 다시 보는 일. 전승에는 따라감만큼이나 거리를 조절하는 자유가 필요하다.

도판을 다시 펼친다. 짐은 사람보다 높다. 그 아래, 작은 머리와 어깨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