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인물과 존재 · 27 / 100
노년의 빛
만년의 형식과 끝나지 않은 긴장
The Light of Old Age
밝은 화면이 반드시 평온한 것은 아니다
〈정오〉(2007)의 바탕은 밝다. 그러나 그 위의 획들은 쉬지 않는다. 굽은 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고, 나무의 검은 부분은 밝은 면을 가로막는다. 오른쪽 아래의 사람은 몸을 낮추고 있다. 이 그림 앞에서는 노년의 밝음이 곧 마음의 평화라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빛이 넓어질수록 작은 몸의 노출이 더 또렷해질 수도 있다.
화가의 나이를 알고 그림을 보면 모든 선이 마지막 말처럼 보이기 쉽다. 거친 곳은 손의 쇠약으로, 비어 있는 곳은 욕망의 소멸로 읽는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그림보다 먼저 결론을 갖고 있다. 어떤 부분이 줄었고 어떤 부분은 오히려 강해졌는지 살피는 일이 나이의 의미를 붙이는 일보다 앞서야 한다.
노년은 한 가지 표정이 아니다. 조용한 날과 불안한 날이 따로 있듯, 늦은 시기의 화면도 한 성격으로 묶이지 않는다. 원숙함을 칭송하기 위해 남아 있는 긴장을 지울 필요는 없다. 긴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그림이 여전히 현재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늦게 그린 그림과 만년양식
늦은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사실과 만년양식이라는 평가는 구별되어야 한다. 앞의 말은 연보의 자리이고, 뒤의 말은 형식에 대한 주장이다. 작품이 줄어든 재료와 느슨한 구성을 보인다고 해서 자동으로 만년양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변화가 화면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만년양식에 대한 생각」에서 늦은 작품을 화해와 평온으로만 이해하는 관습을 되묻는다. 아도르노의 베토벤 해석을 경유하면서, 해결되지 않은 모순과 어긋남 역시 만년의 형식이 될 수 있다고 논한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예술의 의미를 대신 설명하게 두지 않는 일이다.
이 논의를 변시지에게 그대로 씌울 필요는 없다. 다만 늦은 그림을 보면서 물음을 바꿀 수 있다. 무엇과 화해했는가만 묻지 말고, 무엇을 여전히 놓지 않았는가도 묻는 것이다. 〈정오〉의 가득한 획과 작은 몸 사이에는 아직 쉽게 정리되지 않는 힘이 있다.
덜 그린다는 것의 실제
〈점 하나〉(2006)를 보면 배는 매우 작고, 수평선도 가늘다. 그런데 넓은 바탕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밝음의 차이와 붓이 지나간 결이 눈을 머물게 한다. 점이라는 제목은 도상을 하나의 흔적으로 줄여 보게 하지만, 실제 화면에는 크기와 거리와 표면의 관계가 남아 있다.
덜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사물의 수를 줄이는 일이 아니다. 작아진 배를 여전히 배로 알아볼 수 있게 하고, 가는 선 하나가 화면의 위아래를 다르게 느끼게 하는 일이다. 남은 것이 적을수록 각 요소의 위치는 더 중요해진다. 여백은 그 위치를 느끼게 하는 넓이다.
이렇게 얻은 단순함을 기술의 포기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화면을 비우는 선택에도 분별이 필요하다. 더 지우면 거리까지 사라지고, 더 넣으면 작은 배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다. 생략은 그리지 못한 것의 이름이 아니라, 이 화면에서 어디까지 그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어둠에서 빛으로라는 직선을 멈추다
〈점 하나〉의 넓은 밝음과 이듬해 〈정오〉의 빽빽한 획을 나란히 놓으면 한 방향의 변화만 보이지 않는다. 앞의 작품이 덜 그려졌고 뒤의 작품은 다시 흔들림으로 차 있다. 제작 순서는 선형이지만 조형적 선택까지 한쪽으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비움과 밀도는 같은 시기에 다른 질문을 맡을 수 있다.
마른 풀잎색 안에도 밝고 어두운 차이가 있다. 하지만 도록의 복제 색만으로 전체 화업의 색채 변화를 확정해서는 안 된다. 조명과 촬영, 인쇄와 화면 설정이 색을 달리 보이게 한다. 현재의 도판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이미지들 안의 대비다. 원화의 색과 재료에 관한 결론은 별도의 대조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색의 정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밝은 바탕에서 검은 형상이 더 외따로 보이는지, 여러 획이 그 형상에 닿는지 살필 수 있다. 빛을 화해의 암호로 정하기보다 빛이 만드는 관계를 읽는 것이다. 같은 밝음도 한 화면에서는 고요한 거리가 되고 다른 화면에서는 피할 곳 없는 노출이 된다.
거친 선 앞에서 손을 상상하는 일
늦은 그림의 거친 선을 보면 그 선을 그은 손을 생각하게 된다. 그 생각은 자연스럽지만, 선에서 곧바로 신체의 상태를 진단할 수는 없다. 붓과 물감과 바탕, 속도와 압력, 수정의 선택이 함께 흔적을 만든다. 어떤 원인이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화면 하나로 나누기 어렵다.
졸박미라는 말도 조심해서 써야 한다. 매끈하지 않은 형상이 언제나 더 진실한 것은 아니다. 단순한 형태가 주위와 정확한 긴장을 만들 때 그 거침은 힘을 얻는다. 반대로 선이 거칠다는 이유만으로 깊이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우리는 서투름을 칭송하기보다, 서툴러 보이는 것이 화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아야 한다.
오래 그린 사람에게 남은 솜씨는 과시의 형태만 갖지 않는다. 덧붙일 수 있지만 덧붙이지 않는 선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부분의 의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완전한 통제와 완전한 무능 사이의 두 극단을 피하고, 실제로 남은 형식의 일을 읽는 것이다.
작은 배가 넓이를 만드는 방식
캔버스의 크기와 그림에서 느끼는 넓이는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도판을 확대해 보여준다고 실제 작품까지 커지는 것은 아니며, 작은 화면으로 본다고 그 안의 거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물리적 크기를 논하려면 실측 자료가 필요하다. 감각적 넓이는 화면 안의 비례에서 따로 살펴야 한다.
〈점 하나〉에서는 작은 배 때문에 넓은 면이 더 넓게 느껴진다. 배가 없다면 그곳을 바다라고 읽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작은 것은 넓음에 눌린 장식만이 아니다. 넓이를 재게 하는 기준이다. 한 흔적이 주변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주변도 그 흔적을 통해 크기를 얻는다.
그래서 만년의 생략은 사라짐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무엇이 없어졌는가와 함께, 남은 것이 무엇을 새로 가능하게 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도상의 수는 줄어도 보는 시간은 길어질 수 있다. 그 시간은 화가의 나이가 직접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의 화면이 요청한다.
〈점 하나〉와 〈마지막 작품〉을 구별한다
〈점 하나〉는 2006년 작품으로, 〈마지막 작품〉은 2013년 작품으로 보관 목록에 구분되어 있다. 후자의 화면에는 말과 작은 배, 둥근 해와 해안의 선이 남아 있다. 따라서 마지막 그림이 점 하나뿐이었다는 이야기를 해석의 토대로 삼을 수 없다. 두 작품의 차이를 보아야 생략의 여러 방식도 드러난다.
마지막이라는 이름 역시 제작 순서에 관한 보관상의 명칭과 작가가 붙인 제목을 구별해 읽어야 한다. 서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의도적인 지움이나 죽음의 예감을 증명할 수는 없다. 끝에 놓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기는 감정은 분명하지만, 그 감정이 곧 당시 화가의 생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조심스러움은 그림을 덜 애틋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을 마친 뒤의 기념비가 아니라, 아직 볼 것이 남은 화면으로 돌려놓는다. 말이 놓인 아래쪽과 배가 있는 먼 쪽 사이에 넓은 빛이 있다. 이 간격은 유언을 알지 못해도 눈으로 따라갈 수 있다.
끝에 놓인 그림도 지금 보인다
노년의 빛을 모두 내려놓은 사람의 빛이라고만 부르면, 그림에 남은 선택이 희미해진다. 늦게 그렸다는 이유로 질문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넓은 바탕에 어느만큼의 흔적을 남길 것인지, 검은 부분 하나를 어디에 놓을 것인지. 그런 물음은 나이를 설명하는 말보다 구체적이다.
변시지의 늦은 그림들 앞에서 우리는 완성이라는 말을 조금 늦출 수 있다. 비움과 거침, 밝음과 긴장이 서로 갈라지지 않은 채 놓여 있다. 모든 작품이 화해의 결말로 가는 것은 아니고, 끝에 놓인 작품도 이전의 모든 그림을 대신하지 않는다. 한 점씩 보는 일이 마지막까지 필요하다.
해안의 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말 한 마리가 그 가까이에 있다. 먼 배 위로, 둥근 해의 검은 가장자리가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