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인물과 존재 · 26 / 100
자화상 없는 자화상
얼굴에서 풍경으로, 자기표현의 자리를 묻다
Self-Portrait Without a Self-Portrait
먼저, 얼굴이 있다
1944년의 〈자화상〉에는 젊은 얼굴이 있다. 짙은 재킷 사이로 흰 옷깃이 드러나고, 넥타이의 갈색은 얼굴 뒤의 바탕과 멀지 않다. 머리는 조금 돌아가 있지만 눈은 관객 쪽으로 향한다. 변시지는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그러므로 이 장의 제목은 자화상이 없다는 뜻일 수 없다. 얼굴을 그린 화가가, 얼굴 이외의 무엇으로 자신을 드러냈는가를 묻는 제목이어야 한다.
그 눈을 곧바로 야심이나 불안의 눈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러나 눈가의 어둠만으로 당시의 마음을 확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먼저 보는 것은 빛이 머문 이마, 입술의 경계, 어깨를 가르는 옷깃이다. 인물을 알아보게 하는 부분과 화면을 짜는 부분이 따로 있지 않다. 얼굴은 닮음의 대상이면서, 물감으로 만들어진 관계다.
이 출발점을 지켜야 이후의 풍경도 더 정확히 보인다. 얼굴을 그리는 일과 풍경을 그리는 일을 각각 피상과 깊이로 나눌 필요가 없다. 둘은 자신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는 서로 다른 방법이다. 한쪽이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쪽이 생겼다고 말하기 전에, 그 거리의 변화를 살펴야 한다.
닮음보다 먼저 자리를 본다
〈정오〉(2007)에서는 사람의 얼굴보다 그 사람이 놓인 자리가 먼저 다가온다. 인물은 화면 아래쪽에서 몸을 굽히고, 곁에는 나무가 서 있다. 집과 먼 배, 둥근 해가 서로 떨어져 있다. 얼굴을 크게 그린 1944년의 화면과 달리, 여기서는 사람을 둘러싼 넓이가 그 사람을 보는 방식을 결정한다.
지팡이를 짚은 인물을 보면 화가의 생애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지팡이 하나가 인물의 신원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자전적인 울림이 있다는 말과, 이 사람이 곧 화가라는 말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전자는 작품을 더 오래 보게 할 수 있지만, 후자는 다른 가능성을 너무 일찍 닫을 수 있다.
몸이 작아졌다고 자아가 없어진 것도 아니다. 작은 몸은 주위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 땅이 받치고, 나무가 거리를 만들고, 바다가 시선의 끝을 늦춘다. 자신을 묘사하는 일이 자기 얼굴을 확대하는 데만 있지 않다면, 이 관계들을 조절하는 일도 자기표현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풍경은 마음의 암호표가 아니다
까마귀는 불안, 말은 위로, 바람은 운명이라고 대응시키면 설명은 쉬워진다. 그러나 그런 대응표는 작품 사이의 차이를 지워 버린다. 같은 말도 혼자 놓일 때와 사람 곁에 놓일 때 다른 관계를 만든다. 까마귀가 날고 있는지, 땅에 있는지에 따라서도 화면의 무게가 달라진다. 의미는 이름보다 배치에서 다시 생긴다.
풍경을 자전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모든 사물에 화가의 감정을 나누어 붙이는 일이 아니다. 어떤 거리를 택했는지, 무엇을 크게 두었는지, 어느 부분을 거칠게 남겼는지를 묻는 일이다. 내면은 사물 뒤에 숨은 답이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만나는 방식을 통해 짐작되는 깊이일 수 있다.
이때 자연도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바다가 오직 마음의 은유라면 바다의 크기와 물결을 볼 이유가 줄어든다. 말이 오직 분신이라면 동물의 몸은 지워진다. 변시지의 풍경을 깊게 읽으려면 인간의 경험과 사물의 별개 존재를 함께 남겨야 한다. 서로 닿는다고 같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거울도 그림을 그대로 돌려주지 않는다
렘브란트의 〈63세의 자화상〉을 조사한 영국 내셔널갤러리는 손의 표현이 제작 중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이 사실은 얼굴 중심의 자화상 역시 단순한 복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거울 앞에서도 화가는 선택하고 수정한다. 자화상의 정직함은 수정하지 않는 데 있기보다,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내놓을지 거듭 묻는 데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변시지의 풍경을 얼굴 초상보다 더 완전한 자화상이라고 높일 필요가 없다. 얼굴 하나에도 주변의 어둠과 옷과 손이 함께 있고, 넓은 풍경에도 선택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어느 형식도 한 사람의 전부를 담지 않는다. 담을 수 없다는 조건 속에서 각자 다른 부분을 가까이 가져온다.
비교의 목적은 승자를 정하는 데 있지 않다. 얼굴 가까이에서 생기는 응시와, 넓은 땅을 거쳐 한 사람에게 닿는 응시가 어떻게 다른지 보는 데 있다. 전자는 마주함을 조밀하게 만들고, 후자는 그 사람에게 이르는 길을 늘일 수 있다. 두 방식은 경쟁하기보다 우리가 사람을 보는 거리를 넓힌다.
삼인칭이라는 거리
풍경 속 인물을 삼인칭의 자화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이것은 그림에 문법적 인칭이 적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비평의 비유다. 자기 경험과 닿은 형상을 자기 앞에 따로 놓아 보는 것. 나와 비슷하지만 나로 끝나지 않는 사람을 화면에 두는 것. 그 사이에서 가까움과 낯섦이 함께 생긴다.
거리가 있다고 감정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얼굴에서 놓쳤던 몸의 작음이 멀어졌을 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거리가 언제나 절제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작은 사람을 지나치게 비극적인 상징으로 만들면, 먼 시점에서도 감상은 과해진다. 절제는 크기가 아니라 관계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정오〉에서 사람은 나무 아래에 있지만 나무와 합쳐지지 않는다. 둘레의 거친 획들도 몸을 완전히 삼키지는 않는다. 이 구별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을 찾고, 다시 그를 둘러싼 것을 본다. 자기와 세계 사이의 왕복이 화면을 읽는 움직임이 된다. 그 왕복 안에서 자화상이라는 말의 범위도 넓어진다.
세 시기를 하나의 운명으로 묶지 않기
1944년의 얼굴을 제주 회화에 이르기 전의 미완성 자아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 그림은 자기 시대의 빛과 옷, 인물의 크기로 이미 하나의 관계를 만들고 있다. 뒤의 작품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앞의 작품에 결핍만을 부여하면, 젊은 화가가 실제로 해낸 선택을 보지 못한다.
인물화에서 궁의 풍경으로, 다시 제주의 바다로 시선이 옮겨 가는 일을 성장의 순서로만 읽지 말자. 얼굴 가까이에서 배운 것은 풍경에서도 작용할 수 있고, 풍경의 간격은 다시 인물을 보게 할 수 있다. 새로운 장소가 예전의 경험을 모두 지우지는 않는다. 경험은 다른 문제를 만나 쓰임을 바꾼다.
그러므로 풍경-자화상은 생애의 마지막에 도착한 유일한 정답이 아니다. 서로 다른 작품을 연결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질문이다. 이 그림에서는 자기 경험이 어디에 머무는가. 인물의 얼굴인가, 몸의 각도인가, 사물 사이의 거리인가. 답이 달라지는 만큼 한 화가의 세계도 넓어진다.
이름 없는 사람은 아무나가 아니다
인물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으면 관객은 자신의 기억을 가져온다. 그러나 자기 기억이 들어온다는 이유로 그림 속 사람을 모두 자기 자신으로 바꾸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몸은 이미 특정한 크기와 방향을 갖는다. 내가 느낀 것이 그림이 보여주는 것과 어디에서 만나고 갈라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보편성은 개별성을 지운 뒤 얻는 빈 그릇만은 아니다. 낯선 사람에게도 자기와 닮은 피로가 있을 수 있음을 느끼되, 그의 삶을 다 안다고 말하지 않는 태도에서 생길 수 있다. 그림은 얼굴의 세부를 줄여도 관계의 세부를 남긴다.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다.
이렇게 보면 열린 자화상은 무엇이든 넣을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열려 있으면서도 우리를 되묻는 그림이다. 왜 나는 저 사람을 나라고 생각했는가. 내가 보고 싶은 얼굴 때문에 실제의 작은 몸을 놓치지는 않았는가. 관객도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의 시선을 조금 고쳐야 한다.
두 화면 사이에 남은 얼굴
1944년의 〈자화상〉과 2007년의 〈정오〉 사이에는 얼굴의 유무보다 큰 차이가 있다. 하나에서는 어깨와 옷깃이 얼굴에 가까운 틀을 만들고, 다른 하나에서는 집과 나무와 바다가 몸의 주변을 넓힌다. 그 차이를 하나의 상실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자신을 세상에 놓는 방법이 달라진 것이다.
마른 풀잎색을 화가의 마음과 곧바로 등치하지 않을 때, 그 색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담는다. 빛과 물감의 층, 사물의 거리,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이 함께 놓인다. 내면을 설명하기 위해 바깥을 지우는 대신, 바깥과 만나는 자리에서 내면을 더듬는 것. 이 장에서 자화상이라 부르는 것은 그 만남이다.
젊은 얼굴 아래에 흰 옷깃이 있다. 다른 화면에서는 작은 몸 곁으로 나무의 선이 내려온다. 두 화면 사이에서 눈은 한 번 더 사람을 찾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