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인물과 존재 · 25 / 100
무기력한 자세와 저항
낮아진 몸을 패배로 읽기 전에
Listless Posture and Resistance
무기력하다는 말이 먼저 왔을 때
고개를 숙이고 등을 굽힌 인물을 보면 무기력하다는 말이 먼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은 눈에 보이는 자세와 보이지 않는 의지를 한꺼번에 묶는다. 몸의 높이는 보아도 의지의 크기까지 볼 수는 없다. 이 장의 제목은 인물을 진단하는 말이 아니라, 그 첫 판단을 다시 묻는 말이다.
변시지의 작은 인물은 때로 거대한 풍경 앞에 낮게 놓인다. 그 관계를 약함이라고 읽을 수는 있다. 다만 작게 그려졌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삶을 작게 만든 것은 아니다. 화면에서 차지하는 면적과 인간의 가치 사이에는 자동으로 성립하는 비례가 없다.
그러므로 이 자세를 옹호하기 위해 곧바로 가장 강한 저항이라고 뒤집을 필요도 없다. 무기력과 영웅 사이에는 더 많은 상태가 있다. 잠깐의 피로, 머무름, 조심스러운 움직임, 다른 것에 기대는 시간. 그 차이를 남겨 두어야 인물도 살아 있는 사람의 복잡함을 얻는다.
화가가 말한 폭풍의 한 의미
2004년 12월 구술에서 변시지는 수사기관에서 겪었다고 회고한 시달림과 그에 대한 저항을 폭풍에 연결했다. 자연의 힘을 자기 경험과 겹쳐 읽은 작가의 설명이다. 이 말을 그림의 유일한 뜻으로 고정하기보다, 화면으로 돌아가는 한 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폭풍의 뜻이 오직 하나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회고는 역사적 해석의 근거가 되지만, 모든 바람과 모든 굽은 인물을 같은 사건의 암호로 바꾸지는 않는다. 어떤 작품과 연결되는지는 제작 시기와 화면, 다른 자료를 함께 살펴야 한다.
이 구별을 지키면 자연과 역사를 서로 밀어낼 필요가 없다. 바람에 노출된 몸을 그리는 형식이, 다른 시달림의 경험도 담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겹침을 읽는 것과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입증하는 것은 다른 작업이다. 그림과 구술은 서로 비추되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하지 않는다.
바틀비가 남긴 어려운 질문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필경사는 요청받은 일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반복한다. 그 말 앞에서 고용주인 화자는 판단을 거듭 바꾼다. 불편함과 동정, 책임을 피하려는 마음이 얽힌다. 이야기는 거부하는 한 사람뿐 아니라 그 거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변의 반응을 보여준다.
변시지의 낮아진 몸을 이 이야기 옆에 놓으면, 행동이 적다는 이유로 존재도 적게 평가하는 시선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이 바틀비와 같은 말을 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소설에는 말과 사건이 있고, 회화에는 자세와 배치가 있다. 비교는 그 차이를 건너뛰지 않을 때 의미가 있다.
바틀비의 마지막을 뿌리 없는 삶의 필연적인 소멸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이야기가 드러내는 관계의 실패와 돌봄의 어려움이 가려진다. 그림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낮아진 사람을 혼자 견디는 의지로만 읽으면, 그에게 필요한 곁과 지지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굽힘과 지탱은 함께 있다
어떤 몸은 곧게 버티는 대신 기울어 균형을 찾는다. 그러나 기울어진 것은 모두 더 강하다거나 끝내 넘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림의 자세를 물리 법칙이나 생존의 보증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몸이 무엇과 함께 놓여 있는가다.
돌담과 비교할 때도 같다.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제주의 밭담을 바람과 토양 유실을 줄이는 농업 구조로 설명한다. 그 기능은 틈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여러 돌이 이루는 구조의 문제다. 그림에서 몸을 지탱하는 관계를 찾는 일과 연결할 수 있지만, 사람이 돌과 같다는 뜻은 아니다.
그림에서 지팡이, 땅, 집, 곁의 동물을 살피면 견딤은 한 사람 안에만 있는 능력이 아니게 된다. 힘이 모자라 기대는 것과 관계를 통해 움직이는 것은 같은 장면의 다른 설명일 수 있다. 부족함만을 찾던 시선은 무엇이 그 몸을 가능하게 하는지 묻게 된다.
무위는 무감각과 같지 않다
『도덕경』 제43장과 제78장은 부드러움과 물을 통해 강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를 무위의 사유와 함께 읽으면, 힘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언제나 능력의 부재는 아니라는 질문을 얻을 수 있다. 다만 무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나 모든 상황에서의 순응과 같게 둘 수는 없다.
이 질문을 변시지에게 가져오는 것은 그가 노자의 철학을 그대로 그렸다고 선언하는 일이 아니다. 몸의 낮아짐을 오직 결핍으로 보던 기준을 잠시 내려놓는 일이다. 그다음에는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느 몸이 어떤 힘을 받고, 어디에 자리를 얻는지를 보아야 한다.
바틀비의 거부와 무위도 같은 결론의 두 이름은 아니다. 앞의 이야기에는 요청과 거절의 관계가 있고, 뒤의 사유에는 억지로 작위하는 힘을 되묻는 문제가 있다. 서로 다른 질문이 그림 앞에서 만날 수는 있어도, 하나가 다른 하나의 번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추운 날의 나무와 남아 있는 관계
김정희의 〈세한도〉(1844)는 제주 유배 중 책을 보내 준 이상적에게 답례로 그린 작품이다. 그림에 붙은 글은 추위 속의 송백과 변하지 않은 관계를 연결한다. 이 경우 나무의 의미는 형상의 닮음만이 아니라 함께 남아 있는 글과 제작 경위로 뒷받침된다.
변시지의 나무와 이를 비교할 때에도 곧은 나무와 굽은 나무, 선비와 민중이라는 대칭만으로 끝낼 수는 없다. 같은 섬과 비슷한 소재가 곧 직접적인 계보를 증명하지 않는다. 여백의 크기, 획의 건조함, 나무 곁에 놓인 것들이 어떤 관계를 만드는지 먼저 살피는 편이 좋다.
그렇게 보면 견딤은 고립된 의지의 이야기에서 조금 벗어난다. 추운 날에도 끊어지지 않은 관계, 작은 몸의 곁에 남은 다른 형상.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도 주변과 무관하게 있지는 않다. 그림이 비워 둔 자리에는 그 관계를 읽을 여지가 남는다.
서 있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992)의 인물은 다리를 내밀고 땅 가까이에 앉아 있다. 굽은 상체와 숙인 머리, 곁의 말이 보인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변시지의 인물은 한 번도 낮게 주저앉은 적이 없다는 식의 포괄적인 설명을 유지하기 어렵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몸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다. 휴식인지, 지침인지, 다른 상태인지는 화면만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서 있지 않다는 이유로 존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쓰러지지 않는 사람만 가치 있다고 말하면, 그림을 읽는 언어가 정작 약해진 사람을 밀어내게 된다.
그림은 그 사람을 화면 밖으로 버리지 않았다. 거대한 산에 비해 작지만, 말과 함께 오른쪽 아래의 자리를 차지한다. 형상의 작음과 장면의 중요함은 일치하지 않는다. 눈은 큰 산을 건넌 뒤에도 그 작은 몸으로 돌아온다.
저항의 크기보다, 남겨 둔 자리
변시지의 그림을 저항이라는 말로 읽을 근거는 있다. 화가의 회고와 화면의 형식이 만나는 곳이다. 그러나 그 말을 모든 자세의 정답으로 삼으면, 조금 전 무기력이라는 말이 했던 일을 반복한다. 서로 다른 몸을 한 이름 안에 가둔다.
이 장에서 되찾으려는 것은 저항하는 영웅만이 아니다.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에게도 남아 있는 자리다.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이기고 있는지 증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곁과 그 앞의 거리를 오래 볼 수 있다. 삶의 가치를 끊임없는 버팀의 성과로 환산하지 않는 시선이다.
사람은 낮게 앉아 있다. 말은 그 곁에 서 있다. 둘 사이에 작은 땅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