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Ⅱ 인물과 존재

Ⅱ 인물과 존재 · 24 / 100

술 취한 밤

도취와 창조 사이, 다시 그림 앞에 서는 일

A Drunken Night

변시지, 태풍, 1983. Byun Shi-Ji, Typhoon.
〈태풍〉 · 1983FŪDO 019

술잔으로 그림을 설명할 수 있는가

거친 선과 흔들리는 색을 보면 우리는 그린 순간의 격정을 상상한다. 술에 취해 그렸을까. 감정이 손보다 앞섰을까. 그러나 화면의 흔들림은 제작 당시의 몸 상태를 곧바로 알려주지 않는다. 거칠게 보이는 획도 여러 번 고른 결과일 수 있다.

이 장에서 술 취한 밤은 변시지의 특정 작품명이나 확인된 어느 하룻밤의 기록을 뜻하지 않는다. 도취와 창조의 관계를 묻기 위한 에세이의 제목이다. 한 번의 음주가 고유한 화풍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선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오래 이어진 회화의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물어야 할 것은 술이 얼마나 많은 그림을 낳았는가가 아니다. 익숙한 감각의 질서가 흔들렸을 때, 그 흔들림을 무엇으로 남길 수 있는가. 그리고 남은 것을 다시 보고, 버리고, 고르는 일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도취를 말하려면 그 뒤의 작업도 보아야 한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다시 읽기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인 꿈과 형상,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와 개체 경계의 흔들림을 함께 다룬다. 두 충동은 단순히 맑은 정신과 음주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비극이 서로 다른 예술적 힘을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구분이다.

이 구분은 변시지를 읽는 질문이 될 수 있다. 형상을 알아볼 수 있게 남기는 힘과 그 형상을 흔드는 힘은 어떻게 한 화면에 놓이는가. 그러나 일본 시기를 이성, 제주 시기를 도취라고 나누면 너무 많은 그림이 같은 답으로 묶인다. 한 시기 안에도 여러 감각과 형식이 있다.

철학의 이름은 화가의 생애를 대신하는 줄거리가 아니다. 변시지가 니체의 도식을 의식적으로 실현했다는 근거도 이 비교 자체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비교가 유용하려면 그림을 도식에 맞추는 대신, 도식이 놓치는 그림의 세부를 드러내야 한다.

흔들리는 면, 남겨진 윤곽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992)에서는 하늘과 산, 물가에 비스듬한 붓질이 넓게 이어진다. 밝은 획과 어두운 획이 겹쳐 표면이 한쪽으로 흐르는 듯하다. 그러나 거대한 산의 윤곽과 오른쪽 아래 사람과 말의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흔들림 안에도 구별이 남는다.

여기서 자유는 모든 경계를 없애는 일과 같지 않다. 산과 하늘이 완전히 섞여 버리면, 작은 몸이 그 앞에 놓이는 관계도 달라질 것이다. 남기는 윤곽과 풀어 놓는 표면이 서로 작용한다. 무엇을 알아보게 하고 무엇을 흔들리게 할지의 차이가 화면을 만든다.

이것은 취한 손과 맑은 손을 화면의 두 부분에 배정하는 분석이 아니다. 한 획에도 속도와 판단이 함께 있을 수 있다. 눈에 남는 것은 제작자의 숨은 상태가 아니라, 물감과 형상이 이루는 긴장이다. 우리는 그 긴장부터 읽을 수 있다.

색을 발견하는 일과 색을 만드는 일

2005년 4월 구술에서 변시지는 해변의 햇빛 속에서 흰 사물이 누렇게 보인 경험을 회고했다. 이 장면에서 출발하면 색의 변화는 먼저 보는 일과 관계한다. 익숙한 사물이 다른 빛 속에서 낯설어지는 순간, 이미 알고 있던 색의 이름도 잠시 흔들린다.

그러나 어떤 색을 보았다는 경험과 그 색으로 화면을 세우는 일도 같지는 않다. 빛을 받은 사물은 변하지만 물감은 캔버스에 남아야 한다. 어느 정도 밝게 할지, 검은 선과 어떤 차이를 둘지, 같은 바탕 안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남길지의 문제가 따라온다.

마른 풀잎색이라는 말은 그 결과를 읽는 한 언어다. 바랜 시간과 견딘 표면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그 말을 화가가 물감을 만든 처방이나 특정한 음주의 증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비평의 비유와 제작의 사실이 떨어져 있을 때, 비유도 더 정확하게 작동한다.

가위와 버린 천의 시간

2005년 1월 구술에서는 천을 가위로 잘라 시험하고, 안 되면 지우거나 버리던 일을 돌아본다. 이 회고를 읽으면 완성작 뒤의 작업대를 생각하게 된다. 이미 틀에 들어간 작품보다, 아직 어느 크기와 형식이 될지 모르는 천 조각에 가까운 시간이다.

이 기록은 번뜩임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번뜩임 이후에도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다른 크기에서 다시 해 보는 선택, 남길 것과 버릴 것을 나누는 손. 창조는 한 번의 해방으로 끝나지 않는다.

버린 그림을 모두 실패의 증거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남은 작품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탐색의 시간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고통스러운 시행착오를 반드시 거쳐야만 좋은 그림이 나온다고 말할 수도 없다. 기록이 보여주는 작업을 읽되, 그 작업을 모든 화가의 운명으로 만들지 않는다.

위기를 창조의 대가로 만들지 않기

예술가의 힘든 밤은 훗날 작품을 설명하는 편리한 이야기가 되기 쉽다. 그 고통이 있었으므로 그림이 태어났다고 말하면, 견뎌야 했던 사람보다 완성작을 먼저 두게 된다. 고통 뒤에 작품이 남았다는 것과 고통이 작품을 위해 필요했다는 것은 다른 명제다.

도취도 마찬가지다. 감각이 풀리는 경험을 회화적 자유에 비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비유만으로 실제 음주와 창조의 인과관계가 증명되지는 않는다. 작품의 깊이를 술의 양이나 상처의 크기로 환산할 수 없다. 그림은 그만의 형식과 관계를 통해 다시 읽혀야 한다.

확인되지 않은 내면의 위기를 사실처럼 채우는 대신, 남아 있는 자료와 화면을 볼 수 있다. 그 편이 덜 극적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을 작품의 기원 신화로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변화가 이루어진 과정을 더 가까이 보게 한다.

흥분이 지나간 뒤에도 남는 것

도취라는 말을 넓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잊을 만큼 한 장면에 들어가는 경험일 수 있다. 그러나 몰입과 판단은 반드시 적이 아니다. 빠르게 그으면서도 다른 획과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고, 멈춘 뒤에는 조금 전의 속도를 다시 볼 수 있다.

〈태풍〉(1983)에서는 넓게 번지는 파도의 밝음과 절벽을 이루는 짙은 획이 부딪친다. 바다의 흐름을 따라가던 눈은 폭포의 가는 수직을 만나 잠시 방향을 바꾼다. 큰 동세 안에 작은 방향의 차이가 있다. 거침만이 아니라 그 차이가 화면의 힘을 만든다.

밤의 감각이 다음 날에도 그림으로 남으려면, 처음의 흥분이 없는 눈 앞에서도 서 있어야 한다. 보는 이는 화가와 같은 밤을 겪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화면에 머물 수 있다면, 경험은 개인의 비밀에 갇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닿을 형식을 얻은 것이다.

다시 앞에 놓인 그림

술 취한 밤의 마지막에 반드시 영감의 기적이 올 필요는 없다. 다시 보는 일이 올 수 있다. 어제는 남기고 싶었던 것을 오늘 지울 수도 있고, 지나쳤던 작은 형상을 다시 살필 수도 있다. 창조의 시간에는 그 느린 재판단도 들어 있다.

따라서 도취와 창조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경계를 무너뜨리는 힘만이 아니다. 무엇을 관계 맺게 할지 고르는 힘도 있다. 그림은 풀어 놓은 것과 남겨 둔 것 사이에서 자란다. 그 사이를 살피는 손을 잊지 않을 때, 화가의 밤도 하나의 전설로 굳지 않는다.

넓은 물결 사이로, 절벽의 폭포가 가늘게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