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Ⅱ 인물과 존재

Ⅱ 인물과 존재 · 23 / 100

산책하는 사람

걷기의 철학, 몸이 아는 거리

The Walking Figure

정오 / Noon · 2007. 촘촘한 짧은 획, 작은 집과 굽은 사람 사이의 짙은 나무. / Dense short marks surround a dark tree between a small house and a bent figure.
〈정오〉 · 2007FŪDO 012

걸음을 먼저 보아야 한다

〈정오〉(2007)의 오른쪽 아래에는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있다. 등은 굽어 있고, 가까운 나무 위로는 넓고 어두운 수관이 기울어 있다. 그 둘레에 짧은 곡선들이 이어진다. 이 그림 앞에서는 어디로 가는가보다, 어떤 몸으로 가는가를 먼저 물을 수 있다.

이 장의 산책은 그 장면을 한가로운 여가로 바꾸는 이름이 아니다. 일을 마친 걸음과 생각에 잠긴 걸음, 쉬어 가는 걸음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묻는 이름이다. 걷는다고 모두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속도뿐 아니라 손에 든 것과 발밑의 땅이 그 경험을 바꾼다.

그림에는 실제 발소리가 없다. 우리는 다리의 벌어짐과 몸의 기울기, 길과 인물의 배치를 통해 움직임을 느낀다. 걸음은 캔버스 안에서 진행되지 않지만, 눈은 그 몸의 앞과 뒤를 이어 본다. 멈춘 형상이 우리에게 한 걸음을 만들어 내게 한다.

생각을 걷는 사람

키에르케고르는 1847년 예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걷기와 자신의 사유를 연결했다. 이 편지를 인용한 로저 풀의 서평은 그가 실제 산책뿐 아니라 상상 속 산책도 편지에 담았음을 전한다. 여기서 걸음은 철학의 반대편에 놓인 휴식만이 아니다. 생각이 다른 모양으로 이어지는 한 방식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편지를 모든 몸에 적용되는 처방으로 읽을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걷기가 가능하지도 않고, 걷는다고 모든 괴로움이 풀리지도 않는다. 변시지의 인물을 이 비교 안에 놓을 때 중요한 것은, 걸음을 건강한 정신의 증거로 삼는 일이 아니다. 생각하는 몸에도 서로 다른 조건이 있음을 보는 일이다.

우리는 그림 속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풍경만 느끼는 사람인지, 생활의 일을 계산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그려져 있지 않다고 생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 모름을 지킬 때, 인물은 자연의 감각만을 대신하는 상징에서 한 사람으로 돌아온다.

도시의 산책자와 바닷가의 몸

벤야민이 다룬 도시의 산책자는 군중과 상품의 세계 밖에 홀로 서 있는 관찰자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상점과 거리의 볼거리는 그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보는 자유와 시선을 빼앗기는 경험이 겹친다. 도시의 산책을 순수한 여유로만 읽으면 이 긴장이 사라진다.

변시지의 해안 풍경에는 그와 다른 시각적 조건이 놓인다. 〈귀로〉에서는 가게의 진열 대신 넓은 어둠과 흰 물결이 인물의 뒤를 채운다. 비교의 중심은 도시인은 계산하고 섬사람은 느낀다는 구분이 아니다. 눈과 몸에 다가오는 것들의 크기, 밀도, 방향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다.

이 차이는 고립과 자유를 쉽게 바꾸어 부르는 일을 막는다. 사람이 적은 길도 편하지 않을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이 없어 더 멀게 느껴지는 거리도 있다. 한적한 풍경이라는 첫인상 뒤에서, 그 길을 실제로 지나야 하는 몸의 조건이 다시 드러난다.

몸이 먼저 재는 거리

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은 몸을 정신이 명령하는 물체로만 다루지 않는다. 몸은 움직일 수 있는 방향과 닿을 수 있는 거리를 통해 이미 세계와 관계한다. 공간은 좌표가 되기 전에 손이 닿고 발이 놓이는 자리로 경험된다.

그 관점에서 짐 진 몸을 보면 언덕은 같은 높이의 도형으로 남지 않는다. 앞으로 기운 등과 좁아진 보폭을 통해, 오르거나 건너야 할 거리로 다가온다. 풍경의 크기는 몸과 무관한 척도만이 아니다. 그 몸이 할 수 있는 움직임과 만날 때 다른 무게를 얻는다.

이것은 몸이 자연에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멈추고, 돌아서고, 지지할 곳을 찾는다. 작은 선택들이 공간과의 관계를 바꾼다. 풍토가 몸에 흔적을 남기는 동안, 몸도 그 안에서 자기 길을 만든다.

지팡이를 부족함으로만 읽지 않기

변시지의 인물을 설명할 때 지팡이는 곧잘 상처나 노쇠의 기호로 불린다. 그러나 지팡이는 몸이 할 수 없는 일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몸과 땅 사이에 닿을 자리를 하나 더 만든다. 지팡이를 짚는 자세에서는 손의 힘도 발밑의 거리와 관계한다.

따라서 지팡이 없는 몸을 완전한 기준으로 놓고 다른 몸을 결핍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림에서 보아야 할 것은 도구를 빼앗긴 가상의 몸이 아니라, 지금 도구와 함께 서 있는 몸이다. 지지는 독립성의 반대말만이 아니다. 움직임이 가능해지는 관계이기도 하다.

지팡이를 반드시 세 번째 다리라고 부르거나 일정한 박자의 걸음을 상상할 필요도 없다. 그 사람이 어떻게 짚고 얼마나 기대는지는 작품마다 살펴야 한다. 하나의 상징으로 묶기 전에, 손과 막대와 땅이 만나는 구체적인 자리를 본다.

같은 길은 같은 풍경이 아니다

같은 장소를 여러 번 그린다고 매번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몸을 조금 옮기면 집과 바다의 간격이 달라지고, 시선이 낮아지면 가까운 땅이 넓어진다. 먼 풍경을 많이 모으는 일과 한 장소의 차이를 오래 보는 일은 서로 다른 작업이다. 어느 하나만이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변시지의 반복되는 도상도 이 차이 속에서 읽을 수 있다. 사람과 말이 다시 나타나더라도 크기와 간격, 선의 굵기는 같지 않다. 하나의 귀로를 다른 화면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이미 알고 있는 뜻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익숙한 형상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 된다.

그림 속 걸음과 보는 사람의 걸음이 여기서 가까워진다. 인물은 한 자세로 남아 있지만, 우리는 작품을 옮겨 다니며 다른 거리를 경험한다. 반복은 제자리걸음만이 아니다. 되돌아왔을 때 다르게 보이는 곳을 만드는 방법일 수 있다.

쉬는 몸도 길 위에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992)의 오른쪽 아래에는 다리를 앞으로 내민 채 몸을 낮춘 사람이 있다. 머리는 숙여져 있고 말은 가까이 서 있다. 이 몸을 죽음이나 좌절로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인물이 줄곧 서 있거나 걷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장면은 걷기의 철학에 멈춤을 되돌려 놓는다. 길은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앉을 자리와 기대는 곳도 길의 일부다. 멈추었다는 이유만으로 의지가 끝났다고 하면, 우리는 그 몸보다 속도를 먼저 평가하는 셈이다.

쉬는 사람 곁의 말은 그 멈춤을 더 오래 보게 한다. 다른 생명은 곁에 있고 큰 산은 뒤에 있다. 몸의 낮아짐이 화면에서 사람을 지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작은 자리를 두고 주변의 크기를 다시 보게 한다.

발이 놓일 만큼의 세계

변시지의 걸음을 무조건 고행이라고 부르면 산책의 가벼움도, 휴식의 필요도 사라진다. 반대로 모두 평온한 산책으로 부르면 무거운 짐과 거친 땅이 지워진다. 그림은 그 사이에서 각 몸의 다른 속도를 보게 한다.

느림은 빠름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속도가 아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서둘러 의미를 정하지 않는 시선이다. 인물이 무엇을 이겨냈는지 말하기 전에 어디에 기대는지 본다. 얼마나 멀리 갈지 묻기 전에, 다음 발을 놓을 곳을 본다.

길은 멀리 이어진다. 가까운 땅에는 발 하나를 놓을 자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