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Ⅱ 인물과 존재

Ⅱ 인물과 존재 · 22 / 100

귀로(歸路)

돌아온 뒤에 다시 살아야 하는 곳

The Road Home

변시지, 귀로, 1991. Byun Shi-Ji, The Way Home.
〈귀로〉 · 1991FŪDO 093

돌아가는 사람은 누구인가

〈귀로〉(1991)에는 말과 사람이 나란히 있다. 인물은 등에 둥근 짐을 지고 상체를 숙였으며, 화면 오른쪽 위에는 낮은 집이 놓여 있다. 그 뒤로 밝은 물결이 사선을 이루고 검은 하늘이 무겁게 내려온다. 집은 보이지만, 사람과 집 사이에는 아직 땅이 남아 있다.

이 인물을 노년의 화가 자신으로 곧장 읽으면 등에 진 짐과 생활의 구체성이 흐려진다. 공개 작품 해설은 그를 물허벅을 진 여인으로 소개한다. 적어도 이 귀로는 노인의 독백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러 사람의 몸이 그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귀로는 먼 나라에서 돌아오는 큰 사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짐을 지고 돌아오는 길에도 있다. 여전히 무게가 남아 있는 몸과, 그 몸이 향할 수 있는 작은 집. 이 두 가지가 제목을 거창한 귀환의 서사에서 생활 가까이 데려온다.

집이 보인다고 도착한 것은 아니다

집은 화면의 끝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표지가 아니다. 낮은 지붕도 거센 배경과 떨어져 있지 않다. 사람을 둘러싼 힘은 집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돌아가 쉴 곳이 있다는 것과, 그곳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막아 준다는 것은 다르다.

인물과 집 사이의 간격은 그래서 중요하다. 눈은 짐 진 몸에서 집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멀리 있는 안식보다 지금 옮겨야 하는 무게를 보게 된다. 귀환은 도착한 장소의 이름만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기까지 몸이 하는 일이다.

그림에 길의 끝이 뚜렷하지 않더라도 목적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집은 목적지가 될 수 있고, 짐은 해야 할 일을 암시할 수 있다. 다만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이 생략되지 않는다. 작은 사람이 집보다 먼저 우리 눈에 남는다.

이타카에 도착한 뒤

『오디세이아』 제13권에서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도착하고도 곧바로 그곳을 알아보지 못한다. 여신이 드리운 안개 속에서 이타카는 낯선 땅으로 보인다. 귀환의 어려움은 먼 바다에만 있지 않다. 돌아온 장소를 다시 알아보는 일도 남아 있다.

제23권의 재회 뒤에도 모든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노를 들고 바다를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가야 한다는 예언을 페넬로페에게 전한다. 서구의 귀환은 완결되고 한국의 귀환만 미완이라는 구분은 이 서사부터 놓친다. 집에 닿은 뒤에도 남은 일이 있다.

변시지와 오디세우스를 겹쳐 놓을 수는 없다. 한 사람은 실제 화가이고 다른 하나는 서사시의 인물이다. 다만 두 경우를 함께 읽으면 도착과 귀향 사이의 틈이 드러난다. 돌아온 자는 장소만 되찾는 것이 아니다. 달라진 자신으로 그곳의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 생애의 두 귀환

변시지는 1957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고, 1975년 서울에서 제주로 옮겼다. 두 이동을 같은 뜻의 귀환으로 볼 수 있을까. 나라로 돌아오는 일과 태어난 섬에서 다시 살아가는 일 사이에, 다른 장소에서 살아온 시간이 놓인다.

그러나 연보의 두 날짜만으로 당시 마음의 변화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첫날의 도착이 곧 새로운 화풍의 완성일 수도 없다. 이미 익힌 방법으로 다른 장소를 보다가, 그 방법이 맞지 않는 순간을 만났을 것이다. 귀환의 시간을 회화에서 찾으려면 완성된 양식뿐 아니라 형식이 달라지는 과정도 보아야 한다.

이 관점에서 귀향은 과거로 후퇴하는 일이 아니다. 오사카와 도쿄에서 배운 것, 서울에서 그린 것, 제주에서 마주한 것이 한 사람의 손에 함께 남는다. 어느 시기를 실패한 준비 단계로 밀어내지 않을 때, 돌아온 그림이 품은 시간도 더 복잡하고 깊어진다.

뒷모습을 읽는 여러 방법

인물이 등을 보이면 관객은 얼굴을 읽는 대신 그 사람이 보는 쪽을 살피게 된다.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도 뒷모습을 통해 관객을 풍경으로 이끈다. 등을 보인 인물은 어느 한 문화만의 형식이 아니다. 문제는 그 등을 어떤 크기와 높이에 놓았는가다.

프리드리히의 높은 바위 위 인물과 변시지의 짐 진 몸을 비교하면 시선의 자리가 달라진다. 그렇다고 앞의 그림을 정복, 뒤의 그림을 겸손이라는 낱말로 끝낼 필요는 없다. 가려진 시야와 불확실한 거리가 두 화면에 어떻게 놓이는지 살피는 편이 더 정확하다.

변시지의 귀로에서는 사람의 자세를 따라 눈이 낮아진다. 짐의 무게와 가까운 땅이 먼저 온다. 멀리 보려는 눈도 결국 발을 두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다. 풍경은 감상의 대상이면서, 그 사람이 오늘 지나가야 하는 곳이다.

곁에서 가는 말

〈귀로〉의 말은 인물을 높이 태우는 받침대가 아니다. 두 몸은 가까운 땅에 따로 놓여 있다. 사람의 몸은 짐 때문에 접혀 있고, 말의 긴 목은 그 곁에서 다른 곡선을 만든다. 서로 같아지지 않은 두 형상이 한 화면의 이동을 나누어 가진다.

동행은 이 차이를 없애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이끄는지, 그들이 같은 속도로 가는지도 확정할 수 없다. 다만 화면은 한 몸만의 귀로를 그리지 않는다. 사람 곁에 다른 생명의 몸을 두어, 돌아가는 일을 소유나 성취보다 관계 가까이 놓는다.

말의 존재를 곧바로 구원이라고 부르면 너무 빨리 끝난다. 집에 닿기까지 남은 땅은 여전히 있고, 사람의 짐도 사라지지 않았다. 함께 있다는 사실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길을 오직 한 사람의 내면으로만 읽을 수 없게 한다.

기억 속 고향과 살아야 할 고향

기억 속의 고향은 내가 떠났을 때 멈추어 있기 쉽다. 그러나 돌아온 곳에서는 다른 사람의 시간이 계속 흘렀다. 남아 있던 사람에게도 삶이 있었고, 집과 길도 달라졌을 수 있다. 귀향자의 그리움만으로 그곳을 설명하면, 정작 고향에서 살아온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짐을 진 사람이 있는 〈귀로〉는 그 위험에서 시선을 돌려놓는다. 고향은 돌아온 이를 기다리기만 하는 풍경이 아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물을 옮기고, 집을 돌보고,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 구체적인 생활이 귀향을 향수의 이미지보다 넓게 만든다.

풍토를 살아가는 조건으로 읽는다는 것은 이 왕복을 보는 일이다. 장소는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그 안에서 길과 집과 관계를 만든다. 돌아온 화가 역시 그 왕복 밖에 서 있을 수 없다. 그가 다시 그리는 고향은 이미 알고 있던 답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다시 보아야 할 곳이다.

귀로는 문 앞에서 끝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은 그 장면을 미리 주지 않는다. 아직 등에 있는 무게와 아직 닿지 않은 집을 함께 둔다. 제목이 귀환을 말하는 동안, 화면은 귀환에 필요한 몸의 시간을 남긴다.

이 때문에 변시지의 귀로는 안식의 약속도, 영원한 실패의 선언도 아니다. 도착할 수 있으나 다시 살아야 하는 길이다. 끝내 돌아올 수 없다는 말만큼이나, 돌아왔으니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는 말도 이 몸을 지나친다.

낮은 지붕이 보인다. 사람의 등에는 아직 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