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Ⅱ 인물과 존재

Ⅱ 인물과 존재 · 21 / 100

기다림의 시간

멈춘 화면에서 흐르는 시간

The Time of Waiting

선착장 / The Landing · 1979. 뭍의 사람과 작은 배 사이에 넓게 남겨진 수면. / A stretch of water separates a figure on shore from a small boat.
〈선착장〉 · 1979FŪDO 078

배와 뭍 사이

〈선착장〉(1979)에서 굵은 검은 뭍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그 앞에 배 한 척이 놓이고, 왼쪽 뭍에는 작은 인물이 있다. 위쪽에는 긴 수평선과 한쪽으로 휘어진 나무가 보인다. 배와 사람은 가까워 보이지만 서로 닿지 않는다. 그 사이의 좁은 물빛이 눈을 붙든다.

배가 막 도착했는지, 곧 떠날 것인지는 화면만으로 알 수 없다. 인물이 누구를 기다리는지도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움직임이 없다는 이유로 기다림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건너갈 수 있을 듯한 거리를 남겨 둔 채, 그림은 다음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기다림은 여기서 얼굴의 표정이 아니라 관계의 형식으로 다가온다. 배와 뭍, 사람과 물, 가까운 것과 아직 닿지 않은 것. 어느 하나만 떼어 보면 평범한 사물이다. 함께 놓이면, 눈은 그 사이에서 일어날 일을 잠시 기다리게 된다.

말해지지 않은 대상

그림에 기다리는 대상이 없다고 해서 그 인물에게 아무 대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화면 밖에 누군가 있을 수 있고, 인물은 배와 상관없는 생각에 잠겨 있을 수도 있다. 그려지지 않은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이 차이를 남겨 두어야 그림의 침묵도 남는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도 기다리는 동안 말과 몸짓, 방문과 변화가 있다. 고도의 도착이 미뤄진다고 무대의 시간이 텅 비는 것은 아니다. 기다림을 채우는 작은 행동들이, 오히려 그 시간을 견디기 어렵게도 하고 서로의 곁에 머물게도 한다.

두 작가를 나란히 놓을 때 보이는 것은 허무와 충만의 동서양 대립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동안 이미 곁에 있는 것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다만 베케트는 대사와 반복되는 행동으로 시간을 펼치고, 변시지는 떨어져 있는 형상과 간격으로 시간을 열어 둔다.

한 순간은 얼마나 오래 머무는가

레싱은 『라오콘』에서 공간에 나란히 놓인 형상과 시간 속에서 이어지는 행위를 구별했다. 그러나 회화가 시간을 전혀 다루지 못한다고 한 것은 아니다. 몸의 상태를 통해 그 앞뒤의 행동을 짐작하게 할 수 있다. 멈춘 형상은 시간의 부정이라기보다, 시간을 보여주는 한 방식이다.

변시지의 선착장에서는 사건을 추리할 단서가 많지 않다. 그래서 눈은 곧장 도착이나 출항이라는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배의 검은 안쪽을 보았다가 뭍의 두꺼운 선으로 돌아간다. 수평선을 따라갔다가 다시 작은 인물에게 내려온다. 같은 화면을 몇 번 다르게 통과한다.

이때 구별할 시간은 셋이다. 화면이 암시하는 시간, 화가가 그리는 데 들인 시간, 우리가 지금 보는 시간.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그대로 증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세 시간이 만나는 곳에서, 짧게 그려진 선도 오래 보게 하는 힘을 얻는다.

되돌아온 시선은 처음과 다르다

베르그손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 따로 떨어진 단위를 세는 시간과 서로 스며드는 경험의 지속을 구별한다. 선율을 들을 때 앞의 소리는 완전히 사라진 뒤 다음 소리로 교체되지 않는다. 앞선 소리가 남아 다음 소리의 느낌을 바꾼다.

그림 앞에서도 비슷한 일을 생각할 수 있다. 처음 보았던 배의 인상은 수평선을 살피는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배로 돌아오면, 조금 전보다 주위의 빈 곳이 넓게 느껴진다. 달라진 것은 배의 위치가 아니라, 이미 본 것들이 겹쳐진 우리의 시선이다.

이것을 화가가 베르그손의 이론을 그렸다는 증거로 삼을 필요는 없다. 철학은 화면을 대신 설명하는 답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피는 도구다. 기다림의 시간은 캔버스 안에 완제품처럼 들어 있지 않다. 보는 동안 조금씩 생겨난다.

멈춤을 만드는 선

〈선착장〉의 수평선은 길고 가늘다. 아래의 뭍은 두껍고, 배에서는 가는 세로선과 사선이 솟는다. 모두 같은 검은색이라도 무게와 방향은 다르다. 긴 선은 눈을 옆으로 보내고, 작은 선들의 엇갈림은 그 흐름을 붙잡는다.

기다림의 감각은 이 두 작용 사이에서 생길 수 있다. 눈은 멀리 가려다가 가까운 데서 멈춘다. 다시 움직이지만 금세 끝에 닿지는 않는다. 수직은 인간, 수평은 영원이라는 식으로 선의 뜻을 고정하지 않아도 된다. 먼저 그 선이 눈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볼 수 있다.

나무의 휘어짐도 같은 일에 참여한다. 수평으로 길게 놓인 세계 안에서 그 형상만은 한쪽으로 당겨져 있다. 화면은 고요하지만 모든 방향이 편안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멈춤 속에 남은 작은 불일치가, 다음 순간의 가능성을 지우지 않는다.

기다리는 몸에도 생활이 있다

선착장은 관념적인 기다림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떠나고 돌아오는 길목이다. 그곳의 멈춤은 누군가에게 잠깐의 휴식일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을 시작할 수 없는 시간일 수 있다. 같은 자세라도 그 사람이 놓인 생활에 따라 기다림의 무게는 달라진다.

따라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이 언제나 가장 충만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지만, 선택할 수 없어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그림의 아름다움이 그 차이를 지워서는 안 된다. 작은 몸을 볼수록, 그 몸이 감당하는 사정을 함부로 대신 말하지 않아야 한다.

풍토는 여기서 바람과 바다의 분위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때와 멈추어야 하는 때, 가까워도 건널 수 없는 거리까지 포함한다. 화면의 간격을 오래 보는 일은, 그 안에 들어갈 생활의 차이를 열어 두는 일이기도 하다.

견딤과 기다림 사이

견딤과 기다림은 분명히 나뉘지 않는다. 기다리는 동안 견뎌야 할 수 있고, 견디는 동안 무언가를 기다릴 수 있다. 고개를 낮춘 자세 하나에 두 시간이 겹친다. 지금을 버티는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쪽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시간이다.

그림은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크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물은 작고 얼굴은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손쉽게 표정을 읽는 대신, 사람이 놓인 자리를 본다. 배까지의 거리, 뭍의 폭, 그 위로 열린 공간. 마음을 단정할 수 없을 때 관계는 더 또렷해진다.

그 관계 앞에서 관객 자신의 기억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내 기억을 그림 속 인물의 전기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림이 내 기다림을 떠올리게 하는 것과, 그 인물이 나와 같은 일을 겪었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닮음은 남겨 두되 동일함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음 순간을 남겨 두는 일

변시지의 그림은 기다림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배를 움직여 사람에게 붙여 주지도 않고, 기다리는 대상을 화면 밖에서 데려오지도 않는다. 대신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남긴다. 닿지 않았지만 아주 무관하지도 않은 거리다.

그 앞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사건을 얻기보다 보는 속도를 바꾼다. 처음에는 배가 보인다. 그다음에는 배와 뭍 사이가 보인다. 마지막에는 그 사이를 처음부터 있었던 것으로 지나치지 못한다. 기다림은 무엇이 오는가의 질문에서, 무엇을 아직 보고 있는가의 질문으로 옮겨 간다.

배는 뭍에 닿지 않는다. 그 사이의 물빛이 조금 더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