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인물과 존재 · 20 / 100
부부(夫婦)
둘로 남아 함께 살아가는 일
The Couple
하나에서 둘로
화면에 사람이 하나 더 놓이면 보는 일도 달라진다. 한 몸과 넓은 바탕을 오가던 눈은 이제 두 몸 사이를 건넌다. 가까운지 먼지, 같은 곳을 보는지 다른 쪽으로 돌아서는지 살피게 된다. 둘이라는 수는 사람을 한 명 보탠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을 보던 방식에 그 곁을 함께 보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있다고 곧 부부라는 관계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명이나 기록이 관계를 알려 주는 경우와, 관람자가 배치에서 친밀함을 느끼는 경우는 구별되어야 한다. 부부라는 이름을 알고 보더라도 그 이름만으로 두 사람의 마음을 전부 읽을 수는 없다. 관계를 부르는 말과 관계가 보이는 방식은 함께 살펴야 한다.
이 장에서 부부는 한 존재로 합쳐진 두 사람이라는 답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이다. 바람과 땅을 같이 겪더라도 몸은 각각 있다. 한 사람이 피곤할 때 다른 사람도 같은 만큼 피곤한 것은 아니다. 함께 산다는 말은 이 차이를 없애는 대신 그 차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로 깊어질 수 있다.
간격을 한 가지 뜻으로 읽지 않기
두 인물 사이에 틈이 있다면, 그것은 소원함일 수도 있고 각자의 몸을 놓는 자리일 수도 있다. 손이 닿아 있다면 의존이나 돌봄, 긴장이나 친밀함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어느 하나의 배치가 관계의 정답은 아니다. 떨어져 있을수록 존중하고 가까이 있을수록 소유한다는 식으로 선을 그을 수는 없다.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를 안내하는 레이크스미술관은 시선과 손의 부드러운 접촉을 함께 보게 한다. 또한 섬세한 분위기와 옷을 그린 대담한 필치의 대비에 주목한다. 접촉이라는 몸짓 하나도 그 주변의 회화적 관계 안에서 읽힌다. 이를 서양의 부부는 모두 합일을 추구한다는 주장의 예로 좁힐 필요는 없다.
변시지의 두 인물을 읽을 때에도 같은 기준이 필요하다. 먼저 확인된 작품 앞에서 크기와 높이, 선의 농도와 사이에 남은 바탕을 보아야 한다. 그다음에 함께라는 말을 써도 늦지 않다. 한 사람의 윤곽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이어지거나 멈추는지 살피면, 관계는 정해진 감정의 표지가 아니라 눈앞의 구체적인 일이 된다.
같은 길과 다른 보폭
나란히 걷는 두 인물을 본다면, 같은 방향과 같은 속도를 구별해볼 수 있다. 몸의 기울기와 발의 위치가 다르면 걸음의 리듬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정지된 그림에서 누가 먼저 멈추고 누가 기다렸는지까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림이 드러낸 차이에서 동행을 생각하되, 그 사이의 사건은 가능성으로 남겨 두는 것이다.
동행을 완전한 일치라고 보면 어긋나는 걸음은 곧 부족한 관계가 된다. 그러나 삶에서는 한 사람이 느려질 때 다른 사람이 속도를 바꾸는 일이 있을 수 있다. 먼저 가던 사람이 돌아볼 수도 있고, 잠시 서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함께 있다는 감각은 언제나 나란한 모양보다, 달라진 간격을 다시 살피는 데서 생길 수 있다.
이것은 특정 작품 속 부부에게 대신 써 넣는 일화가 아니다. 둘이라는 형상 앞에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시간의 문제다. 같은 방향을 향한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몸이 그 길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가까움이 달라질 때 무엇을 다시 알아차리는지 생각할 여지가 남는다.
둘의 이름이 함께 남은 기록
변시지 구술채록문의 연보에는 1978년 예총화랑에서 열린 변시지·이학숙 부부전이 기록되어 있다. 이 항목은 부부라는 관계를 두 작품 세계가 만나는 전시의 자리로도 보게 한다. 두 이름이 함께 적혀 있다는 사실부터 읽을 수 있다. 다만 이 전시 기록을 곧 부부를 그린 연작의 존재나 구체적인 화면 구성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이 기록을 생각하면 화가의 배우자를 이름 없는 뒷받침으로만 놓는 이야기는 충분하지 않다. 작품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각각 있다. 한 사람의 예술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이 모두 존재했다고 쓸 필요는 없다. 함께했다는 사실과 같은 일을 했다는 판단, 한쪽이 다른 쪽의 삶을 대신했다는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가족의 시간 역시 그림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한 이야기 재료만은 아니다. 누가 언제 옮겨 살았고 어떤 일을 맡았는지는 별도의 기록과 기억이 필요하다. 부부의 의미를 깊게 읽기 위해 확인되지 않은 희생을 더할 필요는 없다. 두 이름을 지우지 않고 남겨 두는 일만으로도, 고독한 천재 한 사람의 이야기와는 다른 입구가 열린다.
대신할 수 없음과 도울 수 있음
가장 가까운 사람도 다른 사람의 몸으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아무것도 도울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물건을 들어주거나 쉴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외로움도 관계 안에서 달라질 수 있다. 각자의 삶이 남는다는 말과 고독은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은 같은 결론이 아니다.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규칙보다, 지금 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다시 묻는 태도에 가깝다. 때로는 다가감이 필요하고 때로는 물러섬이 필요할 수 있다. 친밀함을 알아보는 눈은 간격의 크기만 재지 않는다. 그 간격이 누구에게 어떤 자리로 주어지는지 함께 살핀다.
그림 속 두 사람을 하나의 행복이나 하나의 슬픔으로 묶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같은 공간 안에서도 표정과 자세는 다를 수 있다. 한 사람이 겪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복제되지는 않는다. 함께라는 말은 둘을 하나로 세는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둘 사이에서 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는 말이 될 수 있다.
둘로 남는 형식
한 사람의 그림을 읽을 때 우리는 그 곁의 바다와 나무를 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 곁은 다시 달라진다. 자연의 힘만이 아니라 다른 몸의 리듬도 고려해야 한다. 풍토 속에 산다는 것은 같은 바람을 맞는 일에 그치지 않고, 같은 장소를 서로 다르게 겪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일로 넓어진다.
이 차이는 관계의 결함만이 아니다. 서로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는 여지가 될 수 있다. 그림을 보는 눈도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건너가며 처음의 판단을 조금씩 바꾼다. 함께 있는 것을 그린다는 일은 둘을 닮게 만드는 것만 아니라, 그 왕복이 계속될 공간을 남기는 일이다.
부부를 읽는 글도 그 공간을 지켜야 한다. 보이지 않는 희생을 아름답게 덧붙이거나, 닿지 않은 손을 무조건 깊은 사랑이라고 설명하지 않는 것. 가까움과 차이를 함께 보면서, 한 사람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신하지 않게 하는 것. 둘의 삶은 한 문장으로 다 끝나지 않는다.
연보의 한 줄에 두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눈은 한 이름에서 다른 이름으로 건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