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인물과 존재 · 19 / 100
초가집 안의 사내
문턱에서 시작되는 거주
The Man Inside the Thatched House
집 안을 보기 전에
〈회상〉(1988)의 집은 화면 아래에 크게 놓인다. 지붕의 굽은 윤곽 아래로 돌을 쌓은 벽과 문이 보인다. 작은 사람은 집 밖 왼편에 있다. 눈은 그 사람에게서 문으로 갔다가, 지붕 위의 넓은 공간으로 올라간다. 집과 사람을 함께 그렸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집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초가집 안의 사내라는 제목은 그래서 눈을 안으로 향하게 하는 질문으로 읽을 수 있다. 저 안에는 어떤 자리가 있는가. 밖에 있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 문을 향한 선은 어디에서 이어지는가. 실내가 보이지 않으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방 안의 생활보다 안과 밖을 잇는 작은 경계다.
〈빈 집〉(1987)에서는 집이 왼쪽에 있고, 그 앞뒤로 나무와 넓은 바탕이 이어진다. 외부에 사람의 형상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어두운 출입구를 보고 실내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작품명이 비어 있음을 가리키더라도, 누가 언제 떠났는지까지 화면이 대신 말해 주지는 않는다.
지붕과 문이 만드는 크기
집의 지붕은 바깥 윤곽을 만들고, 문은 그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을 만든다. 두 선은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 지붕의 휘어짐을 따라가던 눈은 문의 수직에서 멈춘다. 작은 구획 하나 때문에 넓은 바탕이 단순한 평면에 머물지 않고, 들어갈 곳과 남을 곳을 가진 공간처럼 느껴진다.
〈회상〉에서는 돌담이 집 양옆으로 이어지고, 그 위에 나무와 말의 옅은 형상이 놓인다. 같은 계열의 색이 여러 거리를 잇지만, 선의 굵기와 농담 때문에 모두 같은 깊이에 붙어 있지는 않는다. 가까운 집의 세부와 멀리 열린 바탕이 서로를 구별한다. 거주는 집 하나의 모양보다 그 둘 사이의 배치에서 느껴진다.
화면의 집이 작다는 말에도 기준이 필요하다. 하늘과 견주면 작지만, 사람에게 필요한 문과 지붕의 크기는 따로 있다. 산보다 작다는 이유로 보잘것없는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집을 인간이 쓸 수 있는 척도로 다시 보면, 자연의 광대함과 생활의 가까움이 한 화면 안에서 다른 몫을 가진다.
사물은 관계를 모은다
하이데거는 「짓고 거주하고 사유하기」의 다리 논의에서, 다리를 먼저 단순한 물체로 놓고 나중에 상징을 붙이는 방식을 묻는다. 다리라는 사물이 관계를 모으며 장소를 이룬다는 생각이다. 이 논의를 변시지의 집에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집을 외딴 기호가 아니라 주변 관계와 함께 보게 하는 질문으로 삼을 수 있다.
문으로 향하는 자리, 벽 가까이 선 사람, 집을 둘러싼 담과 그 너머의 나무를 함께 보면 건물의 뜻이 달라진다. 집은 어디에나 놓을 수 있는 안식의 표시가 아니다. 같은 지붕도 문 앞이 막혀 있는지 열려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거주를 묻는 일은 그 구체적인 배치를 읽는 일에서 시작한다.
이 관계를 대지·하늘·신·인간의 네 칸에 하나씩 넣을 필요는 없다. 까마귀가 있다는 이유로 신적인 존재가 확인되는 것도 아니다. 철학은 그림에 정답을 배정하는 표보다, 무엇을 함께 보아야 하는지 묻게 할 때 더 유효하다. 집을 보며 문을 보고, 문을 보며 그 앞에 놓일 몸을 생각하는 일이다.
보호를 낭만으로 바꾸지 않기
집은 바깥과 접촉하면서도 그 접촉을 조절하는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빛이 들어올 자리와 비를 피할 자리는 같은 요구가 아니다. 문을 연다는 것과 아무런 보호도 받지 않는다는 것도 다르다. 자연과 가까이 산다는 말을 쓸 때, 몸이 쉬고 보살핌을 받을 필요까지 줄어드는 것처럼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림 속 낮은 지붕이 주는 친밀함과 실제 집의 안전은 구별된다. 형상만 보고 어떤 집이 폭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보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붕 아래의 작은 영역이 넓은 바깥과 다른 크기로 느껴지는 것은 살필 수 있다. 보호의 감각을 읽는 일은 생활의 불편을 미덕으로 바꾸는 일과 다르다.
거주에는 머무는 일만 아니라 나갈 수 있는 길도 포함된다. 들어가 쉬고 다시 문을 여는 움직임을 생각하면, 안과 밖은 적대적인 두 세계로 고정되지 않는다. 집의 의미는 바람을 얼마나 받아들이는가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누가 그 안에서 쉴 수 있고, 어떻게 다시 다른 곳과 만나는가라는 물음도 필요하다.
어두운 문 안의 시간
〈빈 집〉의 문은 어둡고, 그 곁의 벽과 지붕에는 획이 많다. 눈은 설명이 많은 표면을 지나 설명이 적은 구멍 앞에서 멈춘다. 보이지 않는 내부가 바깥과 다른 시간을 가진 듯 느껴질 수 있다. 다만 그 시간이 곧 사별이나 버려짐의 시간이라고 정할 필요는 없다. 어둠은 이야기를 열지만 완성하지 않는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집 앞에서는 관람자의 기억이 쉽게 들어온다. 오래 비운 방이나 늦게 돌아가던 저녁을 떠올릴 수 있다. 이 기억은 그림을 읽는 경험의 일부지만, 화가가 바로 그 일을 그렸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림이 남긴 자리와 우리가 가져온 시간을 구별하면, 둘은 서로를 덮지 않고 만날 수 있다.
〈회상〉으로 돌아가면 집 밖의 작은 사람이 다시 보인다. 그 사람을 집의 주인이라고 확정하지 않아도, 사람과 출입구의 거리는 읽을 수 있다. 집은 이미 끝난 이야기의 보관함이기보다, 아직 움직임이 이어질 수 있는 자리가 된다. 기억은 이때 과거를 봉인하기보다 지금 보는 눈을 다시 문 앞으로 데려온다.
한 사람만의 집으로 끝나지 않는 것
집을 화가 자신의 내면이라고만 읽으면 다른 삶이 들어올 자리는 작아진다. 벽을 쌓고 지붕을 손보고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일을 모두 한 사람의 정신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그림에 그 사람들이 보이지 않더라도 집이라는 사물은 그런 생활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내면은 관계가 없는 방과 같지 않다.
또한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만 진정으로 거주했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옮겨 다니는 사람도 생활을 만들고, 임시로 머무는 곳에도 관계와 기억이 생길 수 있다. 고향의 의미를 깊게 읽기 위해 그 이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돌아온 집의 무게에는 그곳이 아닌 곳에서 살아온 시간도 들어갈 수 있다.
변시지의 집을 이렇게 읽으면, 집은 완전한 귀환의 증명보다 몸을 다시 둘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낮은 지붕, 돌의 구획, 어두운 출입구가 그 가능성을 만든다. 바깥을 모두 지우지 않으면서도 작은 안쪽을 남기는 것. 그 안쪽이 누구의 것인지 다 알지 못한 채로도, 우리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출 수 있다.
지붕 아래 문이 어둡다. 문 앞에는 아직 밝은 땅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