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Ⅱ 인물과 존재

Ⅱ 인물과 존재 · 18 / 100

걸인(乞人)의 미학

가난을 찬양하지 않고 사람을 보는 일

The Aesthetics of the Beggar

변시지, 귀로, 1991. Byun Shi-Ji, The Way Home.
〈귀로〉 · 1991FŪDO 093

이름을 붙이기 전에

걸인이라는 제목은 사람의 사회적 처지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림에서 그 이름을 읽는 일에는 순서가 필요하다. 공식 아카이브에는 〈걸인〉(1979)이 별도의 작품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 제목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다른 그림의 이름 없는 사람까지 모두 걸인이라는 판단은 다르다. 하나의 작품명으로 모든 인물의 삶을 대신 정할 수는 없다.

길게 내려온 옷, 작은 몸, 지팡이 같은 형상을 보며 가난을 떠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옷의 선만으로 소유한 것의 전부나 직업, 살아온 이력을 알지는 못한다. 많이 그려지지 않은 사람과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은 같지 않다. 그 차이를 지키는 것이 인물을 적게 보는 일이 아니라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일이다.

걸인의 미학이라는 말은 그래서 가난 자체가 아름답다는 선언보다, 사회적 이름이 붙은 사람을 그림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이 되어야 한다. 이름은 우리를 가까이 데려갈 수도 있지만, 이름이 가리키지 않는 얼굴과 자세를 가릴 수도 있다.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여기기 전에 화면에 남은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작은 사람이 놓인 넓이

〈귀로〉(1991)에는 긴 어두운 옷의 인물이 있고, 그 왼편에 말이 있다. 화면 위쪽은 짙고, 그 아래로 흰 획들이 비스듬히 이어진다. 사람과 말이 놓인 땅은 그보다 밝다. 이 그림의 인물을 〈걸인〉의 인물과 동일시하지 않아도, 어두운 몸이 밝은 땅과 맞닿는 방식은 자세히 볼 수 있다.

몸의 작은 크기는 넓은 풍경을 재는 눈금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사람을 공간의 크기만 알려주는 도구로 보면 옷의 짙음과 몸의 기울기가 사라진다. 눈은 넓은 곳을 보다가 다시 그 어두운 형상으로 돌아온다. 작게 그려진 것은 덜 중요하게 그려진 것과 다를 수 있다. 그 차이가 인물의 존재감을 만든다.

가난을 읽는 일도 이런 왕복을 필요로 한다. 몸의 조건을 지워 보편적인 인간으로만 만들면 구체적인 삶이 희미해진다. 반대로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면 그 사람이 취한 자세와 놓인 공간을 더 볼 이유가 없어진다. 사회적 질문과 화면의 관찰은 서로를 지우지 않고 함께 남아야 한다.

가지지 못함과 비워 둠

화가가 화면을 비우는 것과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전자는 한 화면의 형식을 결정하는 선택일 수 있다. 후자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줄일 수 있다. 적은 물건이 그려졌다는 이유로 인물도 소유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면, 조형적 생략이 생활의 결핍을 대신 설명하게 된다.

가진 것이 없으면 잃을 것도 없다는 말은 이 인물을 지나치게 가볍게 만든다. 몸의 온기와 하루를 지낼 자리,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물건의 수로 셀 수 없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그림이 소유물을 자세히 그리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삶의 무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움의 아름다움은 결핍의 칭찬과 분리되어야 한다. 넓게 열린 바탕이 한 사람을 오래 보게 한다면, 그 힘은 사람에게 덜 가져도 된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다. 가진 것을 먼저 세던 시선이 잠시 멈추는 데 있다. 무엇을 가졌는가라는 질문만으로는 그 사람 앞에서 할 일이 끝나지 않는다.

발밑의 땅과 그 바깥

『장자』 「외물」에는 발이 딛는 자리만 남기고 주변의 땅을 파낸다면 그 자리도 쓸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이 나온다. 당장 사용하는 부분만으로 쓸모를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 질문은 가난한 인물을 쓸모없는 존재로 부르는 근거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 무엇을 지탱하는지 더 넓게 보도록, 우리의 판단 기준을 바꾸어 놓는다.

그림에 노동의 도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인물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정지된 장면에는 쉬는 때도 들어갈 수 있다. 생산과 성과가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몸은 존재한다. 미술이 그 몸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람의 가치를 활동의 증명서에만 맡기지 않는 길을 연다.

이때 그냥 있다는 말도 조심해서 써야 한다. 그것이 먹고 쉬고 돌봄을 받아야 하는 몸의 요구까지 없애지는 못한다. 생존의 필요를 지운 채 존재만을 칭찬하면, 실제 삶이 다시 추상적인 표지가 된다. 몸을 그 자체로 본다는 것은 그 몸이 필요로 하는 것에도 무관심하지 않는다는 뜻이어야 한다.

변시지의 작은 인물 앞에서 가능한 연민은 그래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감정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다 안다는 확신을 늦추고, 화면의 낮은 자리로 눈을 옮기는 일이다. 불쌍하다는 말로 설명을 마치는 대신, 그 몸의 무게와 다른 존재와의 거리를 조금 더 오래 보는 것이다.

화가의 삶을 대신 쓰지 않는 자화상

이 인물에 화가의 자화상을 겹쳐 읽더라도, 그 읽기가 곧 경제적 처지의 기록이 되지는 않는다. 작은 몸이나 성긴 선에서 화가가 모든 명예와 재산을 자발적으로 버렸다고 결론 낼 수는 없다. 조형적 절제와 생활의 선택은 각각 다른 자료를 필요로 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증거인 것처럼 쓰지 않아야 한다.

자화상이라는 말은 더 낮게 놓일 수 있다. 자기 삶에 가까운 형상을 풍경 안의 한 사람으로 옮겨 놓는 것. 그 사람이 누구를 닮았는가뿐 아니라 어떤 바탕에 놓이고 무엇을 바라보는가를 함께 보는 것. 이렇게 보면 자기 표현은 나의 이야기를 크게 하는 행위에서, 한 사람의 자리를 더 섬세하게 만드는 행위로 달라진다.

〈귀로〉의 어두운 옷은 바탕의 밝음과 분리되어 남는다. 그 사람을 세계와 완전히 합쳐진 존재라고만 부르기에는 선의 구별이 또렷하다. 혼자 선 몸을 말과 같은 풍경에 놓으면서도 그 차이를 없애지 않는 것.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을 모르는 우리에게도, 이 공존의 구도는 읽을 자리를 준다.

품격은 가난의 보상이 아니다

걸인의 미학이 지킬 것은 가난한 자가 더 순수하다는 순서가 아니다. 부유함이 사람의 깊이를 보증하지 않듯, 가난함도 그것을 자동으로 보증하지 않는다. 품격을 결핍의 대가처럼 주지 않을 때, 인물은 미덕을 증명할 의무에서 벗어난다. 그는 삶이 어렵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교훈까지 주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화면의 적은 요소가 주는 깊이는 이 구별 위에서 더 분명해진다. 많지 않은 선이 한 사람을 알아보게 하고, 넓은 바탕이 그 작은 형상으로 눈을 돌려보낸다. 비어 있음은 사람의 빈 주머니와 같아서가 아니라, 보는 관계를 바꾸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때 절제는 남의 고통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는 형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림 속 사람을 실제로 도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보는 말은 고를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지워 버릴 것인지, 내가 모르는 삶이 있는 사람으로 남겨 둘 것인지. 그 선택은 그림의 뜻을 하나로 확정하는 일보다, 그림 앞에 선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일에 가깝다.

긴 옷의 어두운 끝이 밝은 땅에 닿는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말의 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