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Ⅱ 인물과 존재

Ⅱ 인물과 존재 · 17 / 100

웅크린 사내

몸을 낮추는 일과 자리를 찾는 일

The Crouching Man

〈대화〉 · 1986 / Dialogue · 1986
〈대화〉 · 1986FŪDO 002

먼저 무릎과 등을 본다

〈대화〉(1986)의 사람은 화면 아래쪽에 작게 앉아 있다. 고개는 내려가고, 팔과 다리는 몸 가까이 모인다. 등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윤곽이 몸의 바깥을 둥글게 감싼다. 그 뒤에는 말이 서 있다. 사람을 먼저 보았다가 말의 다리로 눈을 옮기면, 낮아진 몸과 서 있는 몸의 높이 차이가 선명해진다.

웅크림은 여기서 몸의 부피를 줄이는 자세로 보인다. 그렇다고 사람의 존재감까지 같은 비율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몸 주위에 열린 바탕이 남고, 그 바탕 때문에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가장 큰 형상이 아니지만,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던 눈이 잠시 멈추는 자리가 될 수 있다.

그 자세를 곧바로 패배나 용기의 표정으로 옮기기 전에, 몸이 어디에서 접히는지 보아야 한다. 무릎 가까이에 모인 손, 아래로 내려간 얼굴, 둥글게 이어진 등은 서로 다른 부분이다. 웅크림이라는 말 하나가 그 차이를 덮지 않을 때, 인물은 익숙한 상징에서 구체적인 몸으로 돌아온다.

몸을 받치는 것은 무엇인가

앉은 몸을 볼 때에는 그 몸 아래도 보게 된다. 발이 닿은 곳, 무릎이 놓인 높이, 몸 가까이 남은 땅이다. 그림의 바탕이 넓게 열려 있다고 해서 사람이 허공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짧은 선과 겹침, 다른 형상과의 거리만으로도 몸을 놓을 자리가 느껴진다. 자세는 몸만의 모양이 아니라 자리와 맺는 관계다.

〈대화〉에서 나무의 길게 선 줄기와 말의 다리는 사람의 낮음을 더 또렷하게 한다. 하지만 모든 형상이 같은 쪽으로 눕지는 않는다. 가지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고, 집은 사면을 따라 따로 놓인다. 몸 하나가 세계의 힘을 혼자 설명하지 않는다. 주변 형상들이 서로를 바꾸어 보이게 하는 가운데 사람의 자세도 달라진다.

여기서 몸의 지혜라는 말을 쓴다면, 몸이 모든 위험을 미리 안다는 뜻이어서는 안 된다. 자리를 찾고 균형을 바꾸는 작은 대응을 가리키는 말이면 충분하다. 어떤 자세가 언제나 안전한지 그림이 보증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을 생각만 하는 존재나 힘을 받기만 하는 물체로 갈라놓지 않고 바라볼 길을 연다.

생각하는 몸과 살아 있는 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이성만의 형상으로 놓으면 비교는 너무 쉬워진다. 로댕미술관은 이 인물이 처음 〈지옥의 문〉의 시인으로 구상되었고, 단테와 관련되며, 고통받는 몸과 자유롭게 사유하는 존재의 성격을 함께 지녔다고 설명한다. 생각과 몸의 긴장은 그 조각 안에서 이미 함께 있었다.

따라서 로댕은 생각하고 변시지는 살아 있다는 대조보다, 몸이 보이는 방식의 차이를 살피는 편이 좋다. 조각의 부피와 근육은 여러 방향에서 볼 수 있는 몸을 만든다. 변시지의 작은 인물은 적은 윤곽과 넓은 바탕의 관계 안에서 읽힌다. 두 작품의 차이는 정신과 육체의 소유권보다 규모와 매체, 보는 거리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큰 몸이 언제나 강한 인간을 뜻하지 않고, 작은 몸이 언제나 무력한 인간을 뜻하지도 않는다. 팽팽한 근육에서 고단함을 느낄 수 있고, 가는 윤곽에서 지속되는 주의를 느낄 수도 있다. 몸의 모양에 인간관을 미리 배정하지 않을 때, 각 작품이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긴장이 남는다.

나를 닮았으나 나로 닫히지 않는 사람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인물을 보며 화가 자신의 몸을 떠올리는 읽기는 가능하다. 그러나 닮음을 느끼는 일과 실제 인물의 신원을 확정하는 일은 다르다. 구부린 몸이라는 이유만으로 화가의 특정한 기억이나 감정을 알 수는 없다. 자화상으로 읽더라도 그 인물이 놓인 장면을 먼저 남겨 두어야 한다.

이를 풍토적 3인칭 자화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화가가 그렇게 명명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삶에 가까운 몸을 그림 안의 한 사람으로 놓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바라본다는 비평적 가설이다. 나는 나를 그렸다는 선언보다, 저 사람을 바라보는 거리가 생긴다. 그 거리에 관람자의 경험도 들어올 수 있다.

그렇게 읽을 때 말과 나무는 화가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소품만이 아니다. 사람에게 돌아오던 눈을 다시 밖으로 이끄는 존재들이다. 가까이에 있어도 서로 다르고, 같은 바탕에 놓여도 한 사람의 내부로 흡수되지 않는다. 풍토는 자아를 크게 펼치는 화면보다, 자아가 다른 것들 곁에서 자기 크기를 알아가는 자리로 읽힌다.

멈춘 자세 안에 남는 다음 동작

앉아 있는 사람에게도 다음 동작이 있을 수 있다. 손을 펴거나 고개를 들거나 조금 더 몸을 낮추는 일이다. 그림에는 그다음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접힌 몸의 모양은 우리가 움직임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 가능성을 남겨 두면 웅크림은 영원한 체념의 모양으로 굳지 않는다.

기다린다고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기다릴 상대와 시간이 화면에 명시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대신 지어낼 필요는 없다. 자세가 오래 이어질 것 같은 느낌과 어떤 사람을 평생 기다렸다는 이야기는 다르다. 그 사이를 구별할 때 그림이 허락하는 시간은 오히려 넓어진다. 잠깐의 쉼과 긴 머묾이 함께 가능해진다.

〈대화〉의 제목은 이 작은 정지에 다른 방향을 더한다. 말이 실제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과 말이 마주보며 대화하는 장면으로 단순화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서로 다른 높이의 두 몸을 오가는 눈은 하나를 본 뒤 다른 하나를 보게 된다. 말소리 대신 시선의 왕복이 관계를 만든다.

존엄을 자세의 시험으로 만들지 않기

웅크린 사람이 쓰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만 존엄하다고 말하면, 누워 있거나 남에게 기대는 몸은 설명 밖으로 밀려난다. 존엄을 한 자세의 성취로 만들 필요는 없다. 이 그림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얼마나 잘 버텼는가보다, 작은 몸이 어떤 공간을 얻고 어떤 존재들과 함께 놓였는가이다.

몸을 낮추는 사람을 보는 일은 우리 자신의 보는 높이도 돌아보게 한다. 멀리서 지나치던 작은 형상을 보려고 눈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간다. 그 몸을 강한 상징으로 만들지 않아도 오래 머물 이유는 있다. 얼굴의 설명이 적을수록 등과 손, 땅과의 작은 접촉이 더 오래 눈에 남는다.

변시지의 인물을 읽는 일은 약함을 강함으로 뒤집어 칭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약함과 강함의 이름을 붙이기 전에 한 몸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넓은 바탕이 그 몸을 압도하면서도 드러내고, 가까운 말이 그 작음을 강조하면서도 함께 있는 거리를 만든다. 감정은 그 겹침 속에서 천천히 생긴다.

무릎 가까이에 손이 있다. 말의 다리와 사람의 등 사이로 밝은 바탕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