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인물과 존재 · 16 / 100
원시에의 향수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 보는 일
Nostalgia for the ‘Primitive’
적게 그린 화면에 남은 일들
〈대화〉(1986)에는 작은 사람과 말, 나무와 집이 있다. 넓은 바탕에 비하면 그 수는 적다. 그러나 가까이 보면 집에는 돌을 쌓은 모양과 문을 나눈 선이 남아 있다. 사람의 몸은 접혀 있고, 나무의 가지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는다. 단순한 화면이라는 첫인상 뒤에, 각기 다른 것을 알아보게 하는 작은 구별들이 있다.
이 그림을 문명 이전의 제주라고 부르면, 화면에 남은 사람의 일을 놓치기 쉽다. 집은 저절로 솟은 바위가 아니고, 먼 배도 바다에서 저절로 자란 것이 아니다. 그 작은 형태들에는 만들고 고치고 오가는 생활이 들어갈 수 있다. 그림이 세부를 줄였다는 사실은 그곳의 삶에 역사나 기술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원시에 대한 향수를 묻기 전에,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남겼는지 보아야 한다. 화려한 장식은 적지만 사물의 자리는 모호하지 않다. 말과 사람은 겹쳐 하나가 되지 않고, 집은 그들 곁에 따로 놓인다. 단순함은 구별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적은 구별로 관계를 오래 보게 하는 방법일 수 있다.
원시라는 말과 새로 보는 눈
원시라는 말에는 서로 다른 바람이 섞일 수 있다. 오래된 형상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 익숙한 기법을 벗어나려는 마음, 설명보다 감각에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 말이 어떤 사람들의 삶을 덜 발달한 것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새로 보려던 눈은 오히려 다른 삶을 오래된 틀 안에 가두게 된다.
이 장에서 그 말은 제주의 시대를 분류하는 이름이 아니다. 이미 안다고 여긴 사물을 다시 낯설게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소나무를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늘 같은 가지를 그을 필요는 없다. 집을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늘 같은 지붕을 놓을 필요도 없다. 배운 형식이 보는 일을 대신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데서 변화가 시작된다.
새로운 눈은 기억이 없는 눈과 다르다. 무엇을 이미 보았는지 알아야, 이번에는 무엇을 다르게 보았는지도 알 수 있다. 배움을 전부 지워야 솔직해지는 것은 아니다. 익숙한 손을 잠시 멈추게 하고 눈앞의 차이에 자리를 내어 주는 것. 순수함이라는 말을 쓴다면, 여기서는 무지보다 그런 주의에 가깝다.
오래된 그림에도 기술은 있다
알타미라 국립박물관의 설명은 동굴벽화를 기법 이전의 충동으로만 보는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그곳의 제작에는 새김과 목탄의 윤곽, 색을 채우는 작업과 세부를 더하는 작업이 함께 있었다. 오래된 그림이라는 사실은 기술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재료와 표면을 다루는 구체적인 판단이 있었다는 사실부터 보아야 한다.
이 비교가 변시지와 동굴벽화 사이의 직접적인 계보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간결한 형상과 미숙한 형상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게 한다. 적은 선으로 동물의 몸을 알아보게 하는 일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어떤 굴곡을 남기고 어떤 세부를 생략해도 몸의 방향과 무게를 느낄 수 있는가. 비교는 이 질문에서 유효해진다.
〈대화〉의 말은 속이 넓게 열려 있지만, 등과 배와 다리를 이루는 선 때문에 몸으로 보인다. 나무의 짙은 획은 말의 가는 윤곽과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 한 화면 안에서 그 차이를 조절한 선택이 있다. 이를 솜씨를 버린 결과라고만 하면, 적게 남기기 위해 이루어진 판단까지 사라진다.
낯선 곳과 돌아온 곳
고갱과의 비교에서도 발견과 귀환만으로 두 화가를 나누기는 어렵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고갱의 〈이아 오라나 마리아〉가 그가 가져간 보로부두르 부조 사진을 구도에 참조했다고 설명한다.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에도 다른 곳에서 가져온 이미지가 들어갔다. 장소에 도착했다고 이전에 배운 시선이 모두 벗겨지는 것은 아니다.
돌아온 사람에게도 같은 질문이 남는다. 고향이라는 말은 가까움을 설명하지만, 모든 것을 이미 안다는 보증은 아니다. 기억에 남은 집과 지금 눈앞의 집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차이를 지우고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았다고 말하기보다, 익숙함과 낯섦이 한 화면 안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살피는 편이 좋다.
이렇게 보면 풍토는 손대지 않은 원형을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다. 사람의 생활과 기억, 배움이 오가는 자리다. 변시지의 그림을 제주와 깊이 연결하는 일과 제주를 변하지 않는 과거로 만드는 일은 다르다. 그림의 고유함은 장소가 순수하게 보존되었다는 증명보다, 그 장소를 다시 볼 때 생기는 형식의 차이에서 찾아야 한다.
거친 선의 정확함
거친 선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거침은 아니다. 넓게 번진 획과 가늘게 끊긴 획은 눈을 다르게 움직인다. 한쪽으로 길게 뻗는 가지와 짧게 멈춘 가지 사이에서도 시선의 속도가 달라진다. 형상이 성글수록 획 하나의 방향은 더 큰 몫을 맡는다. 거침은 판단의 부재가 아니라 판단이 드러나는 방식일 수 있다.
부드러운 선을 타협으로, 꺾인 선을 진실로 미리 나눌 이유도 없다. 완만한 곡선은 무게를 드러낼 수 있고, 격렬한 획도 익숙한 장식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선의 성격을 칭찬하는 일이 아니라 그 선이 이 몸과 이 공간에 필요한지 보는 일이다. 진실은 일정한 선 모양에 독점되어 있지 않다.
변시지의 단순함을 읽는 눈은 이 필요를 따라가야 한다. 검은 획만 보면 거친 표현이지만, 그 곁의 밝은 바탕을 함께 보면 간격과 균형이 나타난다. 화가의 손이 강하게 지나간 자리뿐 아니라 멈춘 자리도 형식에 속한다. 그 멈춤 덕분에 작은 사람이 넓은 풍경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자리
원시에의 향수에서 남길 수 있는 것은 과거가 더 깨끗했다는 믿음보다, 굳어진 눈을 다시 움직이려는 요구다. 이미 아름답다고 배운 것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줄어든 화면 안에서 무엇이 새롭게 보이는지 끝까지 살펴야 한다.
그때 소박함은 한 지역의 본성이 아니라 그림이 이루어 낸 관계가 된다. 적은 색과 선이 사람과 말, 집과 바다를 함께 보게 한다. 그 안의 삶은 문명 이전으로 물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몸을 어떻게 두고 다른 존재와 어느만큼 떨어져 있는지 더 또렷하게 묻게 한다.
새로 보는 일에는 끝이 없다. 배운 눈을 버린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한때 발견한 형식도 다시 익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오래 보는 일은 그 익숙함 속의 작은 차이를 되찾는 일이다. 더 적게 말하면서도 덜 보지 않는 것. 이 글에서 원시라는 말에 남겨 두고 싶은 질문은 거기에 있다.
나무의 검은 획이 멈춘다. 그 끝과 집의 지붕 사이에 마른 풀잎색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