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자연과 풍토 · 15 / 100
풍토와 화풍
주어진 조건에서, 자기 그림을 만드는 일
Fūdo and Painterly Style
바람과 선 사이
제주의 바람을 이야기하다 보면 검은 선이 그 바람의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실제 바람과 캔버스의 선 사이에는 생략된 일이 많다. 어떤 장면을 볼 것인가. 얼마만큼 기억할 것인가. 어디에 물감을 놓고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풍토가 화풍이 되는 문제는 그 사이의 일을 되찾는 데서 시작한다.
〈제주〉(1976)의 푸른 바다와 〈흔들리는 수평선〉(2005)의 누런 사선은 같은 화가의 제주를 다르게 보여 준다. 두 작품만으로 화풍 변화의 전 과정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제주라는 지명이 하나의 색과 한 가지 형식을 자동으로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장소도 서로 다른 회화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풍토와 무관한 자유로운 정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반대로 말할 수도 없다. 볼 수 있는 것과 생활의 리듬, 배운 기술과 구할 수 있는 재료는 선택에 참여한다. 조건과 자유는 먼저 따로 존재한 뒤 싸우는 두 힘이 아니다. 주어진 것에 응답하며 어느 관계를 바꿀지 고르는 일이 회화의 자유에 가깝다.
와쓰지: 혼자만의 날씨는 아니다
와쓰지 데쓰로의 풍토론을 읽는 한 길은 날씨와 사람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함께 보는 것이다. 백진은 풍토와 지속가능성을 다룬 연구에서 이 대인적 차원을 강조한다. 추위나 더위에 대응하는 생활의 방식은 한 사람이 환경을 홀로 관찰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함께 지내는 공간과 다른 사람의 행동이 그 경험에 들어온다.
이 관점은 화면의 작은 집과 돌담을 다시 보게 한다. 집은 바깥 자연에서 완전히 떨어진 개인의 상자가 아니다. 담은 날씨를 차단하는 선만도 아니다.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리를 나누고 이어 주는 구조다. 풍토를 몸의 경험으로 읽을수록, 몸을 둘 자리를 마련한 생활과 다른 사람의 노동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관계의 사유를 기후가 민족의 성격을 정한다는 도식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같은 날씨를 겪는 사람도 조건과 대응 방식이 다르다. 이 글에서 와쓰지는 변시지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다고 확인된 인물이 아니라 비교의 상대다. 비교의 가치는 화가를 철학의 사례로 만들기보다, 그림에서 지나쳤던 관계를 보게 하는 데 있다.
하이데거: 사물이 모으는 관계
하이데거의 「짓고 거주하고 사유하기」에 나오는 다리는 물건에 상징을 나중에 붙인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다리가 대지와 하늘, 신적인 것들과 죽을 존재들을 모으는 사물이라고 논한다. 이 논의에서 빌려올 질문은 그림의 네 요소를 골라 철학의 네 항목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한 사물이 어떤 관계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으로 그림 속 집을 보면 크기가 작은 건물이 넓은 화면에 어떤 거리를 만드는지 살필 수 있다. 집과 물가 사이, 집과 인물 사이, 낮은 지붕과 높은 하늘 사이의 관계다. 집의 의미는 지붕의 모양 안에 완성되어 있지 않다. 주위의 것들이 그 집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거주의 읽기는 한곳에 오래 산 사람만이 깊은 예술을 만든다는 판단과도 다르다. 거주와 이동을 우열로 나눌 필요는 없다. 남아 있는 사람도 바깥과 관계 맺고, 이동하는 사람도 잠시 머무는 곳의 조건을 겪는다. 변시지의 귀환 역시 순수한 고향을 되찾아 외부의 시간을 버린 사건보다, 여러 곳에서 배운 것이 새 관계에 놓이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 반복이 만드는 자리
들뢰즈와 가타리의 영토를 주소가 바뀌는 과정으로만 읽으면 표현의 문제가 빠진다. 기욤 콜레는 리토르넬로에 관한 연구에서 표현과 영토의 결합을 중심에 놓고, 영토를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바뀌는 것으로 읽는다. 이 논의를 참고하면 화가의 반복도 같은 소재를 다시 등장시키는 일만이 아니라, 알아볼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다시 여는 일로 살필 수 있다.
변시지의 그림에서 말이나 배 하나를 떼어 내는 것만으로 그의 화풍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형상의 크기와 간격, 그것들을 둘러싼 색과 선의 밀도가 함께 작용한다. 익숙한 요소들이 비슷한 관계로 돌아올 때 우리는 한 화가의 세계를 알아본다. 그러나 그 관계가 조금 달라지면 익숙한 세계 안에 다른 감각이 생긴다.
이를 회화의 영토를 만든다는 비유로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제주를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다. 시선이 어느 선에서 멈추고 어떤 여백으로 건너갈지를 다시 조직한다는 뜻이다. 장소의 이름이 같아도 그 조직은 달라질 수 있다. 화면은 반복을 통해 자리를 얻으면서, 바로 그 반복 속에서 이전의 자리를 바꿀 가능성도 갖는다.
그래서 떠남을 곧 탈영토화, 귀환을 곧 완성된 재영토화로 표기하지 않겠다. 중요한 변화는 지도상의 이동 없이도 한 화면의 관계에서 생길 수 있다. 반대로 먼 곳으로 갔다고 형식이 반드시 새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철학의 말은 이동 경로에 붙이는 이름표보다, 실제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묻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다른 재료, 다른 관계
안셀름 키퍼의 〈마르가레테〉(1981)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은 유채와 짚, 에멀션, 은염 사진을 리넨 위에 사용했다고 기록한다. 여기서는 짚이 그려진 풀의 모습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재료로 들어간다. 따라서 물질을 화면에 놓는 일과 물감으로 표면을 느끼게 하는 일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앤디 골즈워디의 작업을 모두 잠시 존재하다 사라지는 자연물로 설명할 수도 없다. 〈스톰 킹 월〉(1997~1998)은 지속적인 설치를 위해 기획된 돌담이다. 스톰 킹 아트센터에 따르면 골즈워디가 구상하고 감독했으며 다섯 명의 전문 석공이 쌓았다. 장소와 관계 맺는 일에는 자연의 변화뿐 아니라 재료를 고르는 지식과 여러 사람의 노동도 들어간다.
변시지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서는 암벽을 이루는 붓자국이 다른 물질의 표면을 보게 한다. 바위의 실물과 그려진 바위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 차이를 건너면서 바위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 회화의 일이다. 이 작품을 키퍼의 한 회화, 골즈워디의 한 설치와 비교하면 물질을 가져오는 방식과 장소를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 차이를 키퍼는 고발, 골즈워디는 합일, 변시지는 번역이라는 세 단어로 고정하지는 않겠다. 한 작품에서 발견한 작용을 작가의 모든 작업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비교는 변시지의 고유성을 장소의 특이함만으로 설명하지 않게 한다. 무엇을 재료로 쓰고 어떤 관계를 남겼는지까지 들어가야 다른 작가와 나란히 읽는 언어가 생긴다.
선택은 조건의 바깥에 있지 않다
풍토와 화풍의 관계는 자연이 주는 것과 화가가 만드는 것이 한 번씩 작용하고 끝나는 순서가 아니다. 그림을 그리며 본 것이 다음에 풍경을 보는 눈을 바꿀 수도 있다. 어떤 선을 찾은 뒤에는 전에 지나쳤던 기울기가 눈에 들어온다. 세계가 그림의 조건이 되는 동안, 그림도 세계를 다시 보는 조건이 될 수 있다.
이 왕복을 풍토모더니즘이라는 비평적 제안으로 부를 수 있다. 지역의 소재를 근대적 기법으로 옮겼다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 배운 형식이 삶의 장소에서 다시 시험되고, 그 시험을 거친 화면이 다시 장소를 보는 방식을 바꾼다는 뜻이다. 이 말은 확정된 유파의 이름이 아니라 변시지의 형식과 풍토를 함께 연구하기 위한 가설이다.
그 가설은 작품마다 다시 확인되어야 한다. 바람과 선이 닮았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실제로 어느 획이 어떤 거리와 관계를 만드는지 보아야 한다. 다른 곳에서 배운 것을 버렸는지 다시 썼는지도 구별해야 한다. 고유함은 외부와 관계를 끊은 순수함보다, 받아들인 것을 다시 배열하는 방식에서 생길 수 있다.
기후가 예술을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에 필요한 답은 결국 단순한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다. 어떤 조건이 어떤 경험을 거쳐 어떤 형식으로 바뀌었는가. 그 과정에서 화가는 무엇을 선택했고 그림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이 질문을 계속하면 풍토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더 가까이 보게 하는 길이 된다.
마른 풀잎색 바탕 위에 검은 선이 놓인다. 선이 멈춘 자리에도 바탕은 이어진다. 눈은 그 작은 끝을 지나 아직 그리지 않은 곳으로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