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Ⅰ 자연과 풍토

Ⅰ 자연과 풍토 · 14 / 100

화산섬의 기억

바위의 시간과 붓자국의 시간

The Memory of a Volcanic Island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Where Do We Come From, and Where Are We Going? · 1992. 큰 절벽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른쪽 아래 바위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사람과 그 곁의 말이 있다. 왼쪽 먼 수면에 작은 배가 보인다. / A large cliff occupies most of the picture. At lower right a seated figure bows its head, with a pony beside it. A tiny boat appears on the distant water at left.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1992

암벽 앞의 작은 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992)에서는 거대한 암벽이 화면의 가운데를 차지한다. 위로 솟은 윤곽 아래에 짙은 결이 겹치고, 그 결은 아래쪽 수면까지 길게 내려온다. 오른쪽 아래에는 몸을 낮춘 사람과 고개를 숙인 말이 있다. 사람의 몸을 먼저 보고 다시 암벽을 올려다보면, 같은 화면 안의 크기가 서로 다른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작은 사람을 짧은 삶으로, 큰 암벽을 영원으로 곧바로 나눌 필요는 없다. 암벽도 변하고 인간의 시간도 한 순간의 감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대비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가가 아니다. 한눈에 같게 헤아릴 수 없는 두 규모가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는 점이다.

작품의 제목은 그 만남에 질문을 더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목이 답까지 적어 주지는 않는다. 사람의 자세를 죽음의 증거로 확정하지 않고도, 잠시 몸을 둔 자리와 그 주위의 커다란 세계를 함께 볼 수 있다. 유한성은 결말을 미리 말하는 대신 몸과 세계의 차이를 오래 바라보게 한다.

화산섬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주를 화산섬이라 부른다고 모든 지형의 생성 과정이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설명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와 성산일출봉의 응회구, 한라산의 화산 지형을 구별한다. 같은 섬 안에서도 흘러 굳은 흔적과 분출물이 쌓인 구조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화산이라는 한 단어보다 서로 다른 형성 과정이 중요하다.

이 구별은 그림을 볼 때에도 필요하다. 암벽의 결이 지층을 연상시킬 수는 있지만, 붓자국만으로 지형의 정확한 위치나 암석의 종류를 확정할 수는 없다. 그림은 지질 조사도가 아니다. 화가는 구조를 고르고 바꿀 수 있다. 지형에 대한 지식은 그 선택을 더 자세히 묻게 해야지, 보이지 않는 지질 정보를 대신 채워 넣어서는 안 된다.

화산섬의 기억이라는 말은 이때 두 방향으로 열린다. 암석에 남은 과거의 흔적을 조사하는 일과, 그 땅을 겪은 사람이 지금의 그림에서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다. 하나는 지질학적 근거를 필요로 하고 다른 하나는 그림과 기록을 필요로 한다. 둘을 나누어 두어야 그 사이의 만남도 비유 이상의 정밀함을 얻는다.

닮은 표면, 다른 생성

이 작품의 암벽에는 세로로 내려오는 획과 비스듬히 겹치는 획이 함께 있다. 어떤 곳은 짙게 모이고 어떤 곳은 밝은 바탕을 드러낸다. 그 차이들이 돌의 굴곡과 틈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림의 거침은 암석의 거침과 물질적으로 같지 않다. 하나는 그려진 자국이고 다른 하나는 화가가 마주했을 자연의 표면이다.

그래서 지질이 갈필을 낳았다고 단정하기보다, 서로 다른 물질 사이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어 냈는지 묻는 편이 좋다. 바위의 결을 모든 점까지 옮기지 않고도 단단함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 있다. 긴 획을 짧은 획과 만나게 하거나, 밝은 가장자리를 짙은 면 옆에 남기는 일이다. 닮음은 복사가 아니라 선택된 차이들로 만들어질 수 있다.

여기에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여지와 화면을 조정하는 판단이 함께 있다. 거친 획이 계획 없이 흘렀다고 미리 말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남은 자국에서 결과를 보지만 작업의 모든 순서를 보지는 못한다. 물감의 흔적을 자연의 자발성으로만 설명하면, 재료와 씨름하며 고르고 멈춘 화가의 일을 놓치게 된다.

시간은 쌓이기만 하지 않는다

바위의 과거를 층이라는 말로 생각하면 긴 시간을 가까이 느끼게 된다. 다만 모든 시간의 흔적이 차례로 쌓여 완전한 기록을 이룬다고 상상할 수는 없다. 남은 면에는 사라진 부분의 자리도 있을 수 있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그대로 보존했다는 뜻만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없어지고 달라지는 시간을 지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화가의 생애를 지층에 비유할 때에도 같은 주의가 필요하다. 이전에 배운 것이 다음 그림 속에서 다른 일을 할 수 있고, 한동안 쓰지 않던 형식이 돌아올 수도 있다. 과거는 모두 같은 깊이에 묻혀 있는 재료가 아니다. 지금의 선택과 만나 다시 쓰이는 경험이다. 화업은 쌓인 순서를 읽는 일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층의 비유를 버릴 필요는 없다. 그것은 한 획이 처음부터 혼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앞선 습관과 지금의 감각, 재료의 저항이 그 획에 함께 닿을 수 있다. 다만 이 겹침을 날짜별로 분리해 읽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편이 정확하다. 그림에 시간이 있다는 것과 그림이 연대기라는 것은 다르다.

작음은 무가치함이 아니다

암벽의 크기를 따라가다 오른쪽 아래로 눈을 내리면 사람과 말이 다시 보인다. 넓은 화면에 비해 작지만 지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작은 자리 때문에 암벽의 규모를 새롭게 느낀다. 큰 자연과 작은 인간은 한쪽이 다른 쪽을 무효로 만드는 대립이 아니라, 서로의 크기를 드러내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지질학의 긴 시간을 떠올린다고 인간의 하루가 하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몸을 둘 자리나 곁에 선 존재의 의미는 시간을 얼마나 오래 차지하는가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회화는 서로 다른 크기의 시간을 한눈에 놓으면서도 그 가치를 같은 자로 재지 않을 수 있다. 작은 형상은 거대한 배경을 위한 장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몸은 땅 가까이에 있다. 말은 그 곁에 있다. 그 관계를 보면서 우리는 탄생과 귀환, 잠시 머묾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림에서 출발한 우리의 읽기다. 그것을 화가가 확정해 둔 답으로 바꾸지 않을 때, 작품의 질문은 다음 사람에게도 열려 있다.

남긴 시간을 돌보는 일

그림도 물질이라는 사실은 이 읽기를 현재로 데려온다. 표면의 갈라짐이나 변색을 작가가 의도한 오래된 시간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처음부터 그린 거친 흔적과 이후에 생긴 손상은 서로 다른 질문을 요구한다. 보존은 예술의 시간을 멈추는 일이기보다, 무엇이 작품의 일부이고 무엇이 나중의 변화인지 살피며 다음 사람에게 전하는 일이다.

아카이브의 제목과 제작연도, 도판을 대조하는 일도 그 돌봄에 속한다. 잘못 붙인 설명은 다음 해석의 출발점을 바꿀 수 있다. 작품의 표면을 가까이 보는 일과 기록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은 반대편에 있지 않다. 둘 다 그림이 남겨 놓은 것을 우리가 덧붙인 이야기와 구별하려는 일이다.

화산섬의 기억은 그래서 돌 속에 완성되어 있는 뜻을 꺼내는 일이 아니다. 다른 속도로 남은 흔적들을 지금의 눈으로 조심스럽게 만나는 일이다. 암벽의 결, 물 위의 획, 땅 가까운 작은 몸은 서로 같지 않은 시간을 불러온다. 그 차이를 한 색 안에 두었다는 데서, 이 그림의 넓이가 생긴다.

암벽의 짙은 골에서 눈이 내려온다. 물 위에 밝은 획이 남아 있다. 그 너머 작은 몸 곁에 말 한 마리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