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자연과 풍토 · 13 / 100
빗속의 풍경
젖음을 떠올리게 하는 표면과 거리
Landscape in the Rain
먼저, 비가 그려져 있는가
〈흔들리는 수평선〉(2005)에서는 밝은 사선들이 어두운 땅의 가장자리를 스친다. 획은 짧게 끊기기도 하고 긴 띠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 아래와 위의 누런 면에도 비슷한 방향의 움직임이 있다. 우리는 비바람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획을 모두 빗줄기라고 부르면, 파도와 물보라와 붓자국이 서로 다른 일을 하는 가능성을 놓친다.
이 그림을 비의 장에 놓는 까닭은 날씨를 확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화면에서 젖음과 흐름을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서다. 비를 그린 선과 비를 연상시키는 선은 같지 않을 수 있다. 그 차이를 남겨 두면, 비는 그림을 덮는 설명이 아니라 그림의 표면을 더 자세히 보게 하는 질문이 된다.
이름을 늦추면 다른 것이 보인다. 밝은 획들이 어디에서 모이고 어디에서 흩어지는지, 어두운 땅과 닿을 때 얼마나 가늘어지는지 살필 수 있다. 작은 인물과 말의 형상은 화면 오른쪽 위의 땅에 모여 있다. 넓게 움직이는 면과 작은 형상들이 서로 다른 크기로 놓일 때, 날씨는 먼저 노출의 감각으로 다가온다.
젖음을 그리는 물감은 젖어 있지 않아도 된다
빗물에 젖은 것을 그리기 위해 그림의 표면까지 물에 젖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차이지만, 건조한 필치를 곧 가뭄으로 읽거나 습기에 대한 갈망으로 읽는 일을 멈추게 한다. 재료의 상태와 그려진 세계의 상태는 구별된다. 마른 물감으로 물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것은 회화의 모순이 아니라 회화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젖은 듯한 인상은 명도와 경계의 관계에서 생길 수 있다. 어두운 면을 밝은 획이 가로지르고, 단단해 보이던 가장자리가 다른 획 속에서 끊긴다. 눈은 고정된 덩어리를 읽다가 흐르는 자국을 따라가게 된다. 이런 전환은 실제 물을 화면에 더하지 않고도 사물의 표면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만든다.
반대로 거친 붓자국이 있다고 모두 젖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같은 흔적이 바위에서는 단단한 결로, 수면에서는 부서지는 흐름으로 읽힐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흔적 하나의 성질보다 그 흔적이 놓인 관계다. 젖음은 일정한 기법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표면과 주위를 함께 읽으며 얻는 하나의 감각이다.
비와 안개는 같은 여백이 아니다
안개와 비, 습한 공기는 서로 관련되지만 같은 현상은 아니다. 영국 기상청은 안개를 공기 중에 떠 있는 작은 물방울과 시야의 감소로 설명하고, 연무는 작은 건조 입자에 의한 현상으로 구별한다. 이런 구별은 흐린 화면을 모두 비나 습기의 증거로 읽지 않게 한다. 기상 용어가 정확해질수록 그림의 모호함도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림의 경계가 흐려질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우선 거리의 불확실함이다. 멀리 있는 것이 가까운 면과 섞이고, 위와 아래를 나누던 단서가 약해진다. 이것이 안개를 연상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안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그림에도 생긴다. 무엇을 닮았는지와 화면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함께 살펴야 한다.
〈흔들리는 수평선〉에서는 먼 경계가 약한 데 비해 바위의 어두운 덩어리가 남아 있다. 온 세계가 똑같이 녹아 버린 것은 아니다. 또렷한 부분과 불분명한 부분이 함께 있기 때문에 시선이 그 사이를 오간다. 흐림은 형태가 사라진 결말보다, 무엇을 얼마나 알아볼 수 있는지 계속 바꾸는 과정으로 읽힌다.
그림 앞에서 떠오르는 다른 감각
비를 겪은 사람은 젖은 옷의 무게나 발밑이 미끄러웠던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런 기억이 그림을 보는 일에 참여한다. 그렇다고 캔버스에서 실제 비 냄새가 나오거나 모든 관람자가 같은 감각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시각이 다른 감각의 기억을 불러오는 일과, 감각들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결합하는 현상은 구별해야 한다.
이 차이는 감상을 메마르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의 경험이 그림에 들어올 자리를 넓힌다. 한 사람은 밝은 사선에서 물소리를 떠올리고, 다른 사람은 바람에 몸을 기울였던 때를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화면의 어떤 관계에서 시작했는지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감각의 자유는 그림을 떠나는 자유와 같지 않다.
변시지의 비를 읽는다는 것은 이런 왕복을 포함한다. 눈은 획을 보고 몸은 어떤 때를 떠올린다. 다시 눈이 화면으로 돌아오면 처음에는 지나쳤던 어두운 면과 작은 형상이 보인다. 그림은 기억을 확인하는 표지만이 아니라 기억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때 익숙한 날씨도 낯선 거리에서 다시 경험된다.
피할 곳을 생각하는 일
작은 몸이 거친 화면에 놓여 있으면 우리는 그 몸이 버티는 모습을 먼저 보게 된다. 그러나 노출을 곧 용기로, 피할 곳을 찾는 일을 곧 패배로 나누고 싶지는 않다. 비바람 안에서 필요한 것은 견딤만이 아니다. 몸을 옮길 자리, 함께 머물 사람, 잠시 쉴 곳도 삶의 조건이다.
이것은 그림 속 인물에게 집으로 가라고 말하는 해석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갈 수 있는지 화면이 다 알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몸을 바라보되, 그 이후의 운명을 대신 정할 수는 없다. 작은 형상을 오래 본다는 것은 그 인물의 의지를 평가하기보다, 그에게 주어진 공간을 살피는 일이 된다.
그렇게 보면 바람과 비는 강한 인간을 골라내는 시험장이 아니다. 서로 다른 몸을 서로 다르게 노출시키는 조건이다. 그림의 연민은 끝내 서 있는 몸만 칭찬하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화면의 크기에 비해 너무 작은 몸을 놓치지 않는 시선에서 생길 수 있다. 그것은 감정을 설명하기 전의 주의다.
비 뒤의 빛을 미리 약속하지 않는다
비가 그친 뒤의 평안을 모든 그림의 결말로 만들 필요는 없다. 어떤 화면은 아직 흐름 속에 머물고, 어떤 화면은 움직임이 멎은 듯 보인다. 둘 사이에 실제로 앞뒤의 사건이 있었다고 말하려면 다른 근거가 필요하다. 회화는 한 장면으로 여러 시간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그 시간들을 하나의 줄거리로 묶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흔들리는 수평선〉의 작은 형상들 아래에서 밝은 획들은 계속 비껴 간다. 실제 시간은 멈추어 있지만 보는 눈은 멈추지 않는다. 한 획을 따라가면 다른 획이 방향을 이어받고, 짙은 면에 닿으면 시선이 잠시 돌아선다. 그림 속 날씨의 지속은 그런 눈의 움직임 안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빗속의 풍경은 그래서 비를 정확히 식별하는 문제보다 넓다. 날씨 속에 있는 몸과, 그 몸을 보는 우리의 거리를 함께 묻는다. 젖음을 연상할 수 있는 표면을 살피면서도, 그 연상을 증거로 바꾸지는 않는 것. 감각을 열어 두되 작은 사람을 이야기의 도구로 만들지 않는 것. 그 사이에 이 그림을 읽는 자리가 있다.
짙은 땅의 끝에 작은 형상들이 남아 있다. 그 아래를 밝은 획이 비스듬히 지난다. 눈은 다시 그 작은 자리로 돌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