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자연과 풍토 · 12 / 100
빛의 계절
밝음은 어떻게 그림의 관계가 되는가
The Season of Light
해를 찾기 전에
〈제주〉(1976)의 수면은 밝다. 바다의 옅은 면 위에 푸른 획이 놓이고, 그 사이의 바탕이 다시 드러난다. 해의 둥근 형상을 먼저 찾아야만 이 밝음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바위의 짙음과 멀리 놓인 옅은 산도 수면의 밝기를 달라 보이게 한다. 빛은 화면 한곳의 물체이기 전에, 여러 부분을 오가며 생기는 감각이다.
여기서 구별할 것은 바깥세계를 비추는 빛과, 물감으로 그려 놓은 밝음이다. 실제 빛은 그림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려진 밝음은 그 빛 아래에서 색과 명도의 차이로 나타난다. 화가는 햇빛을 캔버스 안에 가두는 대신,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서로를 드러내는 질서를 만든다. 이 차이 때문에 같은 풍경도 다른 그림이 될 수 있다.
제8장에서 태양의 원을 살폈다면, 여기서는 그 원이 없어도 만들어지는 밝음을 본다. 화면의 바탕은 얼마나 넓게 남아 있는가. 어두운 면은 어디에 모이는가. 밝은 획은 어느 방향으로 이어지는가. 이 질문들을 따라가면 빛은 제주를 설명하는 수식어에서, 그림의 구체적인 문제로 바뀐다.
오래 비추는 것과 밝게 보이는 것
일조시간은 빛의 색을 측정하는 값이 아니다. 세계기상기구의 기준을 설명하는 유럽중기예보센터 자료에서 일조는 지표의 직달 일사 강도가 일정 기준 이상인 시간을 뜻한다. 얼마나 오래 기준을 넘었는지와, 어느 장면이 어떤 색으로 보이는지는 다른 질문이다. 일조시간을 그대로 팔레트의 원인으로 바꾸면 이 차이가 사라진다.
어떤 도시의 연평균 수치를 쓸 때에는 관측 지점과 기준기간을 함께 알아야 한다. 숫자는 그런 조건을 밝혀 줄 때 비교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수치가 정확하더라도 거기에서 검은 선의 두께나 마른 풀잎색의 배합을 계산해 낼 수는 없다. 기상 자료는 화가가 겪은 환경을 묻는 데 도움을 주지만, 작품의 선택을 대신 설명하지는 않는다.
빛은 혼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받는 면과 주위의 어둠, 보는 자리와 함께 경험된다. 같은 돌도 어느 쪽을 보느냐에 따라 다른 면을 내놓는다. 화가는 그 차이들 가운데 무엇을 한 화면에 둘지 고른다. 그래서 빛의 연구는 자연을 더 자세히 아는 일과 회화를 더 자세히 보는 일을 나란히 요구한다.
밝은 면은 혼자 밝지 않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992)에서는 밝은 수면과 짙은 암벽이 맞닿는다. 암벽에는 거친 결들이 모여 있고 물 위에는 밝은 획이 옆으로 길게 퍼진다. 비슷한 누런 계열이지만 두 표면은 같아 보이지 않는다. 밝음의 차이는 색 이름뿐 아니라 획의 방향과 어두운 결이 모이는 방식에서 생긴다.
물의 밝음은 바위의 짙음 때문에 더 넓게 느껴지고, 바위의 무게는 그 앞에 열린 수면 때문에 더 또렷해진다. 어느 한쪽을 따로 떼면 이 관계가 약해진다. 빛을 그린다는 것은 밝은 물감을 늘리는 일만이 아니다. 어두운 부분을 남겨 밝은 면이 머물 자리를 만드는 일도 포함한다.
이런 화면에서 내광이라는 말을 쓴다면 실제로 사물 안에서 빛이 나온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특정한 광원 하나를 찾지 않아도 화면의 관계로 밝음을 느낀다는 비평적 표현에 가깝다. 그 말을 신비한 실체로 만들기보다, 어떤 색과 획이 그런 인상을 만드는지 되돌아보면 좋다. 빛의 깊이는 설명에서가 아니라 다시 보는 일에서 늘어난다.
눈과 피부를 갈라놓지 않는다
빛을 몸으로 겪는다는 말은 눈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눈을 가늘게 뜨거나 그늘 쪽으로 몸을 옮길 때, 보는 일과 자세를 바꾸는 일은 이어진다. 이런 경험을 떠올리면 회화의 밝음도 시각만의 추상적인 정보로 남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감각을 특정한 날 화가에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대신 기록할 수는 없다.
마른 풀잎색을 따뜻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감각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넓은 바탕은 눈을 쉬게 할 수 있고, 그 위의 짙은 획은 눈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온기와 긴장이 같은 화면에 머문다. 눈의 감각과 몸의 기억을 서로 경쟁시키지 않을 때, 색이 불러오는 경험도 더 복합적으로 남는다.
회화는 그 복합성을 옮기면서 바꾸기도 한다. 실제 풍경에서 짧게 본 어둠을 길게 남길 수 있고, 눈을 잠시 스친 밝음을 넓은 면으로 만들 수 있다. 본 것에 충실하다는 말과 본 모양을 그대로 복사한다는 말은 같지 않다. 기억 속 감각이 화면의 비율을 얻는 동안, 빛은 다른 시간에 놓인다.
그늘이 있어야 보이는 자리
한낮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에도 어두운 부분은 필요할 수 있다. 해가 높다는 정보만으로 그림의 모든 그림자가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어두운 획은 그림자일 수도, 윤곽일 수도, 표면의 질감일 수도 있다. 먼저 그 획이 다른 형상과 어떻게 만나는지 보아야 그 일을 구분할 수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바위에서는 짙은 선이 암벽의 굴곡을 따라 이어지다가 다른 방향의 획과 만난다. 그 만남이 바위의 두께를 느끼게 한다. 모든 검은 부분을 결핍이나 슬픔으로 읽지 않아도 된다. 어둠은 여기서 단단한 것을 단단하게, 깊은 골을 깊게 보이게 하는 회화의 재료다.
그러므로 빛과 어둠은 위로와 비극의 두 진영으로 갈라지지 않는다. 밝은 바다는 작은 몸을 더 노출시킬 수 있고, 짙은 땅은 그 몸이 놓일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 의미는 색의 밝기만 따라가지 않는다. 빛이 누구에게 닿고, 어떤 형상을 주위에서 드러내는지가 함께 작용한다.
빛을 남기는 선택
서귀포의 빛과 변시지의 색을 연결할 때 중요한 것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자동으로 만들었다는 결론이 아니다. 경험한 빛이 어떤 선택을 거쳐 그림의 관계가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남겨 둔 밝은 면, 덧그은 어두운 획, 멈춘 가장자리는 서로 영향을 준다. 색채는 이 결정들이 함께 놓인 결과다.
이 때문에 빛의 계절은 일조량이 가장 많은 때라는 뜻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때일 수도 있다. 같은 화면 앞에서 어제는 바위를 보았고 오늘은 그 앞의 수면을 볼 수 있다. 빛을 그린 사람의 시간에, 빛을 읽는 사람의 시간이 다시 겹친다.
그림은 실제 햇빛의 한 순간을 영원히 고정하지 않는다. 밝음을 알아볼 관계를 남겨, 다른 날의 눈이 다시 그 관계를 따라가게 한다. 그때 그림 속 빛은 같은 채로만 남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이 어느 면에서 멈추느냐에 따라, 가까이 있던 것이 멀어지고 어둡던 부분의 결이 살아난다.
짙은 바위 앞에 옅은 물이 펼쳐져 있다. 밝은 획 하나가 바위 밑에서 멎는다. 그 작은 끝이 눈에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