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자연과 풍토 · 11 / 100
제주의 사계
계절을 그리는 일과, 계절을 살아가는 일
The Four Seasons of Jeju
화면에 달력이 없을 때
〈제주〉(1976)에는 푸른빛이 넓다. 바다의 밝은 면 위로 가는 획들이 겹치고, 먼 산과 가까운 말에도 푸른 기운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 색만으로 어느 계절인지 알기는 어렵다. 푸른 바다가 곧 여름을 뜻하지 않고, 옅은 하늘이 봄을 확정하지도 않는다. 그림의 색은 먼저 화면 안의 관계를 만들고, 계절의 이름은 그다음에 온다.
변시지의 사계를 읽는 일은 봄꽃과 가을 잎을 차례로 찾는 일과 다를 수 있다. 바다가 얼마나 멀리 열리는지, 작은 몸이 어느만큼 드러나는지, 획 사이에 어떤 밝음이 남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계절은 소재 하나에 붙어 있기보다 여러 요소가 함께 만드는 분위기로 다가온다. 때로는 정확한 계절을 모르는 채로도 그 분위기에 오래 머문다.
이때 세 가지 시간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림이 보여주는 때, 화가가 그림을 제작한 때, 지금 우리가 그림을 보는 때다. 겨울에 여름을 떠올릴 수 있고, 한 장면을 여러 날 손볼 수도 있다. 화면의 계절을 제작 월과 곧바로 일치시키지 않으면, 그림 안에 들어온 기억과 선택의 시간을 더 넓게 볼 수 있다.
돌아오는 것은 같은 날이 아니다
계절이 되돌아온다는 말에는 익숙함이 있다. 그러나 살아가는 몸에게 돌아온 계절은 이전 것과 같지 않다. 작년에 걸었던 길을 올해는 천천히 걸을 수 있다. 같은 창을 열어도 함께 있던 사람이 없을 수 있다. 되풀이되는 날씨와 되풀이되지 않는 삶이 만나는 곳에서, 계절은 단순한 원보다 조금 어긋난 귀환이 된다.
이것은 변시지의 특정한 하루를 대신 지어내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슷한 소재를 다시 그린다는 행위에 어떤 시간이 들어갈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같은 말을 그려도 그 주위에 남기는 공간은 달라질 수 있다. 같은 바다를 앞에 두고도 선을 멈추는 자리는 달라진다. 반복되는 대상과 반복되지 않는 판단이 한 화면에 만난다.
따라서 사계를 화가의 일생에 곧바로 맞추기는 어렵다. 젊음은 봄이고 만년은 겨울이라는 비유는 이해하기 쉽지만, 노년의 격렬한 화면과 이른 시기의 조용한 화면을 놓칠 수 있다. 〈흔들리는 수평선〉(2005)의 거센 사선은 늦은 작품을 오직 비움과 평온으로 설명하는 일을 멈추게 한다. 한 생애에도 서로 다른 계절이 겹친다.
한 색의 온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마른 풀잎색을 가을의 색으로만 묶으면 그 색이 하는 일을 줄이게 된다. 풀잎이 마른다는 말은 한 달의 이름보다 변화를 겪은 상태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같은 계열의 바탕도 밝은 획이 길게 지나면 열려 보이고, 짙은 면이 눌러앉으면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계절감은 색 이름 하나가 아니라 그 색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긴다.
〈제주〉의 밝은 바다는 푸른 획과 옅은 바탕이 번갈아 드러나며 넓어진다. 그와 달리 〈흔들리는 수평선〉에서는 누런 빛 속의 어두운 땅과 밝은 사선이 서로를 밀어내는 듯 보인다. 여기서 푸름을 추위로, 누런 빛을 따뜻함으로 곧바로 옮겨 놓을 수 없다. 색채의 온도와 그림에서 느끼는 안온함은 서로 다른 문제다.
이 차이를 따라가면 계절은 설명할 수 있는 기상 정보이면서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각이 된다. 무슨 달인지보다 빛이 멀리 닿는지, 몸이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가 먼저 느껴질 수 있다. 그림은 달력의 구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달력만으로 나뉘지 않는 시간을 더한다. 이름을 늦게 붙일수록 보이는 차이가 많아진다.
모네를 다시 비교한다
모네와 비교할 때도 눈과 몸을 나누어 두 화가에게 배정할 필요는 없다. 미국 국립미술관은 루앙 대성당 연작을 설명하면서 현장에서 시작한 그림들이 작업실에서 상당히 다시 손질되었다고 밝힌다. 그 연작을 순간의 시각 인상을 곧바로 옮긴 결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관찰과 기억과 화면의 조정은 한 화가 안에서도 함께 일한다.
그러므로 비교의 질문도 달라진다. 누가 눈으로 보고 누가 몸으로 보았는가가 아니다. 반복되는 대상에서 어떤 차이를 골랐는가, 그 차이를 색과 획의 관계로 어떻게 만들었는가다. 변시지의 적은 색채를 깊이라고 부르기 위해 다른 화가의 다채로운 색을 표면으로 낮출 이유는 없다. 차이를 정확히 볼 때 비교는 두 회화를 함께 열어 준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먼저 따라갈 것은 대상을 알아보게 하는 선과 그 주위를 잇는 색이다. 색이 한 계열로 모일수록 획의 밀도와 사물의 간격이 더 크게 읽힐 수 있다. 계절의 변화도 이 작은 차이들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 어느 계절을 그렸는지 확정하는 일과, 계절을 겪는 감각이 어떻게 형식이 되는지 묻는 일은 함께 가되 같아서는 안 된다.
계절을 기다리는 생활
계절은 아름다운 경치를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문을 여는 때와 닫는 때, 밖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바꾼다. 이 생활의 구분을 생각하면 그림 속 작은 집도 장식 이상의 자리를 얻는다. 집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묻기 전에, 사람이 어디에서 잠시 몸을 둘 수 있는지 보게 된다.
그림에 이런 행동이 실제로 그려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화면의 사건으로 확정할 수 없다. 다만 집과 길과 배가 놓인 관계를 통해 생활의 가능성을 헤아릴 수 있다. 길은 어느 쪽으로 열리는가. 배와 육지 사이에는 얼마나 넓은 물이 있는가. 계절을 생각하는 일은 사물에 꽃과 눈을 더하는 것보다, 그 사물의 쓰임을 되묻는 일이 된다.
이 관점에서 사계는 삶이 저절로 완성되는 순환이 아니다. 돌아오는 때를 기다리면서도 오늘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시간이다. 화가의 반복 또한 이미 완성된 제주를 되풀이하는 행위로만 읽히지 않는다. 익숙한 것을 다시 보아야 하는 필요가, 같은 자리에 머물며 다른 그림을 만드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봄을 대신 그리지 않는 색
변시지의 색 안에 사계가 있다는 말은 모든 계절의 실제 색이 물감 속에 들어 있다는 뜻일 필요가 없다. 여러 번 달라진 세계를 본 눈이 지금의 선택에 참여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선택은 과거의 경험을 보존하기도 하고 바꾸기도 한다. 기억은 같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저장고보다, 현재의 화면에서 다시 관계를 맺는 시간에 가깝다.
따라서 한 계절의 감각을 한 가지 감정으로 고정하지 않아도 된다. 봄에도 떠남이 있고 겨울에도 온기가 있을 수 있다. 이를 특정 작품의 이야기로 대신 써 넣기보다, 그런 복합성을 받아들일 공간을 남겨 두는 것이 중요하다. 마른 풀잎색은 지나간 계절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답보다, 서로 다른 기억이 머물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이렇게 사계는 화가의 색을 결정하는 법칙에서, 그림을 다시 읽게 하는 시간으로 옮겨 간다. 우리는 봄을 찾으러 갔다가 바다의 밝은 간격을 보고, 겨울을 떠올리다가 작은 몸 곁의 여백을 본다. 계절의 이름을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름 아래 놓였던 차이를 오래 보는 것으로도 한 장면은 새로워진다.
푸른 획 하나가 옅은 수면에 남아 있다. 그 옆은 비어 있다. 눈은 그 간격을 지나 다음 획으로 간다.

